271. 기 싸움
당고륜이 뺨을 부들부들 떨며 잔뜩 억눌린 음성을 흘려냈다.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지금 뭐라고 했느냐?”
“제가 있는 한 남궁천은 건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당예설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꾸했다.
“설아! 네가 어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왜요? 이러면 안 되는 이유가 뭔가요?”
“내 너를 그간 어찌 키웠는데! 감히 네가 아비 등에 칼을 꽂아?”
“이 정도로 아버지 등에 칼을 꽂았다고 할 수 있나요? 참고로 저는 본 가를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본 가를 위해서? 너의 사리사욕이 아니고?”
“그것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네요. 하지만 제 감은 본 가를 위해서도 이래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 녀석!”
“아버지!”
“……!”
“언제까지 우기만 감싸고 돌 거죠? 우기가 본 가를 이끌어 나가기에는 부족하다는 걸 잘 아실 텐데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저를 어찌 키우셨나요? 금이야 옥이야 키우셨다고 하시려고요? 세상에 자기 자식을 그리 키우지 않는 부모도 있을까요? 금수만도 못한 부모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나 금수도 제 새끼는 예뻐하죠.”
“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이냐!”
“가장 기본적인 걸 했다고 모든 걸 다 한 부모처럼 굴지 마시라고요!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것으로 할 일을 다 끝낸 사람처럼 당당하게 굴지 마시라는 겁니다!”
“너, 너……!”
“한 지붕 아래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정받지 못하고 차별받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셨다면 제게 그런 말씀 못 했을 겁니다.”
“도대체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게 바로 아버지의 시각이라는 게 문제라고요! 됐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굳이 사적인 이야기를 들먹일 필요도 없죠. 제가 잠시 감정적으로 대응했으나, 이젠 아버지의 딸이 아닌 무인 당예설로 대응하겠습니다.”
“네가 정녕 내게……!”
쿠구구우우웅!
그 순간 남궁천의 전신에서 우러나온 기운이 폭발하듯 흔들렸다.
쿠와아아아아!
시커먼 기운이 용트림을 하듯 몸부림치더니 기묘한 괴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연무실이 통째로 흔들리면서 천장에서 먼지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얼른 중심을 잡고 선 당고륜이 정신을 차리고는 소리쳤다.
“그래,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하자. 하지만 아비에게 섭섭한 게 있다고 이런 식으로 반항을 한다는 건…….”
“착각하지 마세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전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무인 당예설입니다.”
“하면 네가 생각하는 협의가 천마혼을 부르는 것이더냐!”
“저는 남궁천을 믿어요. 저 아이가 해낼 거라고.”
“이런 어리석은……! 가만, 너 그럼 혹시…….”
당고륜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그가 남궁천의 등 뒤로 피어오른 사악한 기운과 당예설을 번갈아보다가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설마 네가 남궁천에게…….”
“네. 제가 전해주었어요. 마신단을.”
“그런……!”
당고륜은 이제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이 이성을 잃으면 딸을 막을 사람이 없으리라.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가 지금 아비를 배신하고…….”
“아버지, 저는 아버지와 강호인으로서 싸웠을 뿐입니다. 그 싸움에서 제가 이긴 것이고요.”
“싸움이라. 네가 정녕 날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네?”
“네가 정녕 그리 생각한다면 아직도 멀었다!”
파바바밧!
순간 당고륜의 품에서 수십 개의 암기가 터져 나갔다.
당예설이 얼른 몸을 움직이며 암기를 피했다. 남궁검도 현란한 검술로 날아드는 암기를 순식간에 쳐냈다.
따다다다앙!
하지만 당예설이 피한 암기가 그대로 남궁천을 향했다.
그제야 당예설이 화들짝 놀랐다.
아뿔싸!
피해서는 안 됐다.
애초에 아버지는 자신에게 암기를 던진 게 아니라 남궁천을 노렸던 것!
“안 돼!”
당예설이 단말마 비명을 터뜨리듯 소리치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몇 자루의 암기가 그대로 남궁천의 급소에 틀어박히려는 순간!
쉬따다다다다앙!
남궁천 등 뒤로 피어오른 거대한 기체가 완전한 구의 모양으로 축소되더니 남궁천을 감싸듯 응축되는 게 아닌가?
마치 커다란 구슬 안에 남궁천이 갇혀 버린 듯한 모양이 되었다. 동시에 남궁천을 향해 날아들던 암기는 모조리 튕겨 나가면서 사방의 벽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저, 저건 또 뭐야?”
회심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당고륜이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남궁검과 당예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
천마혼처럼 보였던 기체가 동그란 구슬처럼 변하면서 남궁천을 가둬 버리다니.
‘남궁천…… 너 괜찮은 거야?’
당예설이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남궁천을 감싼 검은 구체에 손을 뻗었다.
파지지지짓!
“크읏!”
“설아!”
당예설이 놀라며 물러나자, 당고륜이 반사적으로 나섰다.
그래도 자식은 자식인지라 괘씸한 생각을 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예설이 허연 연기를 풀풀 풍기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뇌전이 흐른 것처럼 손바닥이 따끔거린다.
만약 급히 손을 떼지 않았다면 화상을 입었으리라.
검은 구체에 갇힌 남궁천은 뭔가 고통스러운 것인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당예설이 남궁검을 슬쩍 바라보았다.
남궁검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검을 앞세우며 돌아섰다.
“당 가주. 이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진 것 같소. 이유는 모르나 남궁천은 천마혼의 보호를 받는 것 같군.”
“남궁 가주!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애초에 이런 일이 발생하면 일격에 목을 치기로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끝이 아니오. 물론 천마혼이 저 아이를 잡아먹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리할 것이오.”
“아무리 가주님이어도 천마혼을 상대하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전에 쳐야 합니다!”
“하지만 이젠 방법이 없지 않소?”
“이익! 애초에 두 사람이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그러는 당 가주도 약조를 어긴 건 매한가지 아니오?”
“뭐라고요? 제가 무슨 약조를……!”
“용공단.”
“……!”
“천에게 건넨 것이 용공단이라는 걸 모를 줄 아셨소? 저 아이가 영민하여 그 상황까지 미리 예측했기에 대비할 수 있었지, 아니었다면 지금쯤 내력이 모두 녹아서 폐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을 테지.”
남궁검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다. 그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벨 것처럼 당고륜을 응시했다.
당고륜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말을 꺼내던 당고륜이 퍼뜩 스치는 생각에 당예설을 휙 돌아보았다.
“우기! 하면 우기는 어찌 된 것이냐?”
“이 순간에도 우기를 걱정하시는군요.”
“대답해라! 우기를 어찌한 것이냐?”
“걱정 마세요. 설마 동생을 죽이기라도 했을까요? 우기는 안전해요.”
그제야 당고륜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나 뱃속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길은 없었다.
“설아. 네가 우리 가문을 몰락시키려고 아주 작정했구나.”
“그 반댑니다. 저는 가문을 위해 선택했을 뿐이에요.”
“한심한……!”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아요. 저는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니까요.”
당고륜은 더 이상 대화를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제는 남궁천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 * *
익숙한 냄새다.
오랜 세월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그 냄새.
남궁천은 코끝을 스치는 혈향을 맡으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까악! 까아악!
붉은 하늘을 나는 까마귀 떼가 보인다.
마치 노을을 찢는 것처럼 날아드는 까마귀 떼가 남궁천 주변으로 내려섰다.
까아악!
독수리처럼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우는 까마귀. 뭔가를 열심히 쪼는 소리가 들려온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지?’
본능적으로 놓쳐 버린 시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도망자의 삶에서 시간은 곧 생명줄이니까.
아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제 도망자의 인생은 끝나지 않았나?
그래, 죽었던 아들의 몸을 빌려 살아가고 있었다.
당 가주에 들러서 천마신단을 복용했던 것 같은데…….
“아……!”
기억이 떠오른 남궁천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한데 주변의 광경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하다.
시산혈해.
범인이라면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들쑤신다.
남궁천이 천천히 일어섰다.
‘여긴……?’
진천랑으로 죽기 전 마지막으로 싸우던 곳이다.
그날따라 작정을 한 것인지 무림맹이 매섭게 몰아붙여 왔다.
진천랑은 그곳에서 광기에 사로잡혀 죽음의 춤을 추었다.
검이든, 도든, 활이든, 도끼든, 창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두르고 덤벼드는 적을 박살 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육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주변은 시체가 즐비해졌다.
갑자기 그 시기로 돌아오니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남궁천으로 지냈던 시간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장자가 꿈을 꾸었을 때, 스스로가 나비인지 사람 새끼인지 헷갈렸다는 말이 떠오른다.
아, 이래서 옛 성인의 말이 옳구나.
남궁천이 실없는 생각을 하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몇 걸음을 옮겼을까?
시체가 쌓인 언덕 위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남궁천이 시체들 사이로 발을 디디며 올라가자 마침 살이 따갑도록 강맹한 기운이 전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무심코 고개를 든 남궁천이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
“……!”
“여어.”
묵직한 음성을 흘려내는 존재.
시체를 겹겹이 쌓아서 만든 의자에 척 걸터앉아서 낡은 도를 어깨에 척 걸친 사내가 입매를 비틀며 웃는다.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기운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사신(死神).
장창을 움켜쥔 그는 다름 아닌 진천랑.
남궁천은 전생의 자신을 마주하자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너는…….”
“……너지.”
“그 모습 오랜만이군.”
“후후.”
진천랑이 시체 의자에 앉은 채로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혈풍이 불어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아름답지 않은가? 죽음이 가득한 땅. 그것은 원천의 아름다움. 원래 모든 생명은 죽어 있었던 것이니까.”
“난 당시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았는데.”
“클클클. 그러니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 보이는 법. 지금껏 수만 년을 지내오면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로다.”
진천랑이 몸을 우뚝 일으켰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면서 남궁천을 덮었다.
서녘 태양을 등진 진천랑은 두 눈만이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감정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맹수의 눈이다.
“그렇군. 너는 천마혼이로군.”
“제법 머리가 좋군.”
“마신단을 복용하면 천마혼을 부른다더니. 사실이었군.”
“항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럴 자격이나 되어야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한데 너의 세계는 내게 감동이다. 너는 나를 만날 자격이 있었다.”
진천랑이 양팔을 활짝 펼치며 히죽 웃었다.
남궁천이 옆으로 손을 쑥 뻗자, 한쪽에 떨어진 검 한 자루가 휘리릭 날아와 손에 잡혔다.
탁!
능공섭물의 수법으로 공력을 이용해 검을 끌어당긴 것.
“그래서?”
“으음?”
남궁천이 짝다리를 짚으며 검면으로 제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서? 그렇게 마음에 들면 여기 평생 눌러앉아 살던가?”
“클클클. 호기와 객기를 구분하지 못할 나이는 아닐…….”
“천마야.”
“응?”
“좋은 말 할 때 꺼져라. 안 그러면 처맞는다.”
남궁천이 검을 붕붕 휘두르자, 천마혼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