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기 싸움
비교적 널찍한 연공실에 네 사람이 들어섰다.
남궁천이 주변을 한차례 휘 둘러보고는 감탄했다.
“연공실일 뿐인데도 상당히 견고하게 만들어졌네요.”
“본 가는 독공을 익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자칫 독기가 연공실 밖으로 흘러나가기라도 하면 사고가 일어날 수 있으니 더욱 세심하게 건설할 수밖에 없었지.”
“과연. 이 정도로 튼튼하고 견고한 건물이면 안심하고 시도해도 되겠어요.”
“장소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일세. 그럼 바로 시작하겠나?”
“그러죠. 어차피 시간을 끌어봐야 달라질 것도 없을 테니까요.”
“알겠네. 그 전에…….”
당고륜이 천장을 힐끔 보았다.
그러자 시커먼 그림자들이 날렵하게 떨어졌다.
슈슈슉!
당고륜의 호신위들이었다.
검을 패용한 호신위들이 남궁천을 둘러싸듯 내려서자, 남궁검이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당 가주.”
“아무래도 확실한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남궁검 가주님이 작정하고 소가주를 지키려고 하신다면, 저와 설아만으로는 버거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를 믿지 못하시겠다?”
“남궁검 가주님의 의지만은 믿으나, 혈육의 정 앞에서는 또 어찌 흔들릴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당고륜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자, 남궁검은 기분 나쁜 듯 코웃음을 쳤다.
하나 그 이상의 반박은 하지 않았다.
당고륜이 이해를 부탁한다는 듯 남궁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가 남궁천에게 건네줄 영단은 마신단이 아니라, 내력을 모두 녹여 버리는 용공단이니까.
하지만 너무 순순히 마신단을 건네주게 되면 괜한 의심을 사게 될 것 같아서 일부러 이런 무례를 저지른 것이다.
남궁천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당 가주님은 확실히 매사에 철두철미하시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대신 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진 말아주세요. 혹시라도 제가 위기를 잘 넘기고 곧 안정을 되찾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겠네.”
당고륜도 어렵지 않게 대꾸했다.
‘어차피 너는 마신단을 복용할 일이 없으니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속내를 갈무리한 당고륜이 턱 짓을 하자 호신위들이 적당히 물러섰다.
당고륜이 남궁천에게 다가가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주었다.
“마신단일세. 유일하게 성공한 영단이니 부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겠네.”
“감사합니다.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조그마한 목함을 받아들었다.
남궁천이 돌아서기 직전에 당고륜이 다시 말을 덧붙였다.
“만약 자네가 조금이라도 주화입마에 빠질 것 같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행동하겠네.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지켜보겠으나, 그것이 단지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이성을 잃는 지경까지 간다면 망설이지 않을 것이야.”
“물론이죠. 그런데…….”
“……?”
“후회하진 않으십니까?”
남궁천이 여린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당고륜이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되물었다.
“뭘 말인가?”
“오늘 이 선택을 말입니다.”
묘한 질문이었다.
입장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수 있는.
특히 남궁천의 미묘한 눈빛은 뭔가를 안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나…….
‘그럴 리는 없을 터.’
이미 진짜 마신단은 당우기가 가져갔다. 지금쯤 맹주를 만나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을 터다.
당우기도 이번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을 테니 실수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사정을 남궁천이 알고 있었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을 터.
‘내가 과민한 모양이군.’
당고륜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후회하지 않네. 자네는 강호신룡일세. 사실 맹주님이 이 사실을 알면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맹주님보다 자네를 믿어보기로 했네.”
“어째서요?”
“간단하지. 자네는 강호의 미래가 아닌가? 신룡이라는 별호는 아무에게나 붙는 게 아니지. 당가는 그 미래와 함께하기로 한 걸세.”
남궁천은 그 대답이 썩 마음에 드는 듯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그럼 진짜 시작하죠.”
남궁천이 목함을 받아 들고는 몸을 휙 돌렸다.
그제야 당고륜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제자리로 돌아섰다.
하나 그는 보지 못했다.
남궁천이 돌아서는 순간 목함이 소매 속으로 사라지고, 그가 또 다른 목함을 소매에서 꺼냈다는 것을.
연공식 한가운데로 걸어간 남궁천이 마침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호신위들이 남궁천 뒤쪽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둘러섰고, 남궁검과 당고륜, 당예설이 맞은편에서 역시 부채꼴로 둘러싸듯 앉았다.
남궁천이 목함을 앞에 내려두고 덮개를 열자 알싸한 약향이 실내에 가득 풍겼다.
향기만 맡아도 머리가 맑아지는 그런 약향과는 뭔가 다르다. 만약 향기만으로도 사악함이 느껴질 수 있다면 바로 마신단이 그럴 것이다.
당고륜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공정 과정에 가장 신경 쓴 것이 바로 이 약향이다. 남궁천이 아무리 눈치가 좋다 하더라도 저것이 가짜라는 걸 눈치챌 순 없으리라.’
실제로 자신이 맡아도 감쪽같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남궁천이 아무런 의심 없이 영단을 덥석 잡았다.
“……!”
단순한 동작이었을 뿐인데도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움찔 떨었다.
당고륜 역시 은근히 양손에 공력을 집중했다.
당가에서 만든 용공단.
그 어떤 해독제도 없다.
한 번 녹아내린 공력을 되살릴 방법은 전혀 없다.
이제 남궁천이 저 영단을 입에 넣는 순간 체내에서 변화가 일어나리라.
내력이 녹으면서 남궁천은 고통으로 몸부림칠 것이고,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남궁검이 당황하게 되리라.
영단이 바뀌었다는 걸 깨닫는다고 해도 적랑단주인 딸과 자신, 그리고 호신위까지 함께라면 남궁검 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자, 마지막 한 걸음이다. 어서 먹어라.’
손에 땀을 쥐는 순간.
남궁천이 마침내 입을 열고 영단을 넣으려는데…….
“아아,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물 한 잔만 먹고 싶네요.”
“으음? 그런가?”
당고륜이 어딘지 맥이 빠진 표정으로 호신위 한 명에게 눈짓을 했다.
곧 호신위가 연공실을 빠져나가더니 물을 한 잔 들고 돌아왔다.
물을 시원하게 들이켠 남궁천이 다시 영단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만 쳐다보고 복용을 하란 말이다. 어차피 네놈이 아무리 봐도 알 수 없을 테니!’
괜히 마지막 순간에 저리 시간을 끄니까 조바심이 생긴다. 그래서 부러 남궁천이 자극받을 만한 말을 골라서 던졌다.
“망설여지면 복용하지 말게. 내 생각엔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으니.”
“아뇨. 복용할 거예요. 그래야 백도가 한 단계 성장하는 겁니다. 마공마저 포용하는 제왕의 기운을 보여 드리죠.”
“끄음. 그럼 기대하겠네.”
“예, 그런데…….”
“뭔가?”
“역시 물 한 잔으로는 아쉽네요. 이왕이면 술로 한 잔…… 헤헤.”
이제 좀 처먹으라고!
발끈한 당고륜이 치미는 속내를 삼키며 겨우 말을 흘렸다.
“술을 마시고 운공할 생각인가?”
“어차피 주기를 빼내면 되니까요.”
“그럴 거면 뭐 하러 술을 마시나?”
“에이, 술은 분위기로 마시는 거죠.”
“거, 적당히 하게! 자신 없으면 하질 말든가!”
“에헤이, 성격 급하시긴. 알았어요, 알았어. 먹으면 되잖아요.”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던 당고륜이 씨근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럼 진짜 먹어요?”
“그야 자네 마음이지.”
“네, 가주님의 뜻 잘 알겠습니다. 그럼.”
휙!
순간 남궁천이 손바닥에 올려둔 영단을 허공으로 던지더니 그대로 넙죽 받아먹는 게 아닌가?
우물우물…… 꿀꺽!
“꺼으윽!”
길게 트림까지 한 남궁천이 히죽 웃는다.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 망설임 없는 행동에 당고륜은 물론 남궁검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당예설 역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하여튼 골 때리는 녀석이라니까.’
하지만 내심으로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남궁천이 복용한 게 진짜 마신단이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고륜 역시 양손에 공력을 잔뜩 실으며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남궁천이 복용한 게 마신단이 아니라, 용공단이라는 게 밝혀지면 남궁검이 가만있지 않으리라.
그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우우우우웅……!
아직까지는 큰 변화가 없다.
남궁천을 중심으로 은은한 기운이 퍼져나가면서 운기조식할 때의 흔한 증상이 나타난다.
꿀꺽……!
당고륜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주먹을 콱 말아쥐었다.
동시에 곁눈질로 남궁검의 동태도 살폈다.
한편 남궁천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단전에서 뻗어 나가는 공력이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임독양맥을 따라 원활하게 기가 순환했다.
한데 마신단이 배 속에서 완전히 녹아들었을 때쯤.
쿠우우웅!
단전에서 폭음 같은 것이 울렸다.
물론 이 소리는 누구도 듣지 못했다.
오로지 남궁천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일 뿐이었다.
그리고 남궁천은 그것을 온전하게 느끼고 있었다.
“크읍!”
순간 남궁천이 신음을 토해내면서 온몸에 힘을 바짝 주었다.
“……!”
남궁천을 둘러싸고 있던 자들이 저마다 움찔 떨었다. 당고륜은 다시 한번 남궁검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용공단의 독효가 들기 시작하는 건가!’
한데 조금 이상하다.
용공단을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과 다르지 않은가?
남궁천을 중심으로 푸르게 흩어져 가던 기운은 지금쯤 조금씩 희미해져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기운이 더욱 강해지고 있지 않은가!
‘으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점점 강해지는 기운은 조금 전 복용했던 약향까지 더해서 주변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분명 용공단을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과는 다르다.
당고륜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끄아아아압!”
순간 남궁천이 고개를 꺾어 들더니 비명을 터뜨렸다.
“천아!”
남궁검이 고함을 질렀다.
이는 자신의 목소리로 무아지경으로 끌려가는 남궁천을 붙들기 위함이었다.
남궁천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드러난 피부 표면으로 시커먼 핏줄이 실지렁이처럼 마구 뻗어나간다. 게다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남궁천의 두 눈은 온통 시커멓게 물든 상태.
“이, 이건……!”
당고륜이 당혹감을 지우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용공단이 아니다!
당고륜이 혼란한 심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남궁천의 전신에서 퍼져 나오는 사이한 기운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졌다.
짙푸른빛을 뿜던 기운이 이제는 그냥 새까만 기운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약향은 어느새 혈향으로 바뀌어서 연공실에 진동한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반사적으로 버럭 소리치며 일어나던 당고륜이 아차 하는 마음에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마신단을 복용했을 때 나타날 법한 반응이지 않은가?
하지만 남궁천은 용공단을 복용했을 텐데? 어째서 이런?
“크아아아악!”
남궁천이 다시 굵직한 비명을 토해냈다. 한데 이번에는 그 소리가 괴이하다.
마치 남궁천의 몸 안에 또 다른 존재가 함께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지 않은가?
확실히 이상하다.
‘뭔가 잘못됐어!’
그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남궁천의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리더니, 등 뒤로 시커먼 형상이 구름처럼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쿠르르르르릉……!
먹구름처럼 피어오른 기운이 마구 충돌하며 뇌전과 함께 괴성을 내지른다.
동시에 검은 기체가 뭉실 거리며 만들어가는 거대한 형상!
“천마……?”
온몸이 굳어버린 당고륜이 뭐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놀란 건 당고륜뿐만이 아니었다.
남궁검과 당예설조차도 천마혼을 실제로 보자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 버리는 듯했다.
게다가 피부가 따갑도록 느껴지는 지독한 마기!
‘남궁천 네놈이 기어이……!’
당고륜이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어떻게 한 건진 모르지만, 남궁천은 정말로 마신단을 복용한 것이리라!
이제 남궁천은 전신의 피부에서 핏줄이 징그럽게 도드라지면서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이는 명백한 주화입마의 전조 증상이었다.
“남궁처어어언!”
차아아앙!
결국 당고륜이 검을 뽑아 들자, 반대쪽에 서 있던 호신위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차차차앙!
“날 원망하지 마라!”
당고륜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는데, 남궁검과 당예설이 느닷없이 나타나며 막아서는 게 아닌가?
차차앙!
두 사람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며 당고륜과 호신위들을 견제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당 가주.”
남궁검의 묵직한 목소리가 심장으로 날아와 꽂힌다.
하나 그보다 놀라운 것은 어째서 자신의 딸이 저기에 서 있단 말인가?
“설아, 너 지금……?”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있는 한 남궁천을 건드릴 순 없어요.”
“너!”
당고륜의 눈이 찢어지도록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