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69화 (268/508)

269. 나 아닌데?

남궁검은 창가에 앉아 묵묵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가장에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처럼 한가로이 차만 마셨다.

마침 밖에서 기척이 들리더니 당고륜이 성큼성큼 들어섰다.

“앉으시오.”

남궁검의 손짓에도 당고륜은 날카로운 시선을 내부를 훑을 뿐이었다.

남궁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여기에도 남궁천 소가주가 보이지 않는군요.”

“산책을 나갔다고 들었소. 한데 그 아이는 왜?”

남궁검의 시선이 당고륜의 손에 들린 복면으로 향했다.

당고륜이 복면을 콱 움켜쥐며 서늘한 목소리를 흘렸다.

“장내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아까부터 시끌벅적한 소란은 그 때문에 일어난 일이로군.”

“그럼에도 시종 담담하시군요.”

“내 집에 도둑이 든 것도 아닌데, 내가 호들갑 떨 일이 뭐가 있겠소?”

“나서서 도와주실 만도 하지 않습니까? 남궁 가주께서 힘을 보태주시면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내 당가의 고절한 무공을 잘 알고 있는데, 어찌 함부로 나서겠소? 더욱이 당가는 독과 암기의 명가가 아니오? 검을 이용해서 근접전을 펼쳐야 하는 내가 섣불리 설치다간 오히려 방해만 되고 말 것을.”

한마디, 한마디가 일리 있는 지적이다.

거기에 원래 남궁검의 성격이 목석같다는 걸 잘 알기에 지금의 상황이 전혀 연기처럼 보이지 않는다.

남궁검은 시종 차분한 태도로 차만 들이켤 뿐이었다.

그럼에도 당고륜이 기분 나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방을 떠나지 않자, 남궁검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흐음.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들어봅시다.”

“우선 마신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잘됐군. 천이가 돌아오면 말해주겠소.”

미적지근한 반응이다.

이래서야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당고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천독노가 달아났습니다.”

“그렇군.”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이 나이가 되도록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되지. 절대 죽지 않을 것 같던 천마가 눈먼 칼에 찔려 죽는 것을 본다든가, 강호의 기둥이라 믿은 맹주가 독살을 당한다든가, 우화등선한 줄 알았던 도인을 강시로 만난다든가. 그에 비하면 당가에서 천독노가 달아난 일은 놀랄 일도 아니지.”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그렇군.”

“그 조력자의 목소리가 남궁천과 똑같았습니다.”

멈칫.

처음으로 인지할 만한 반응이었다.

남궁검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당고륜을 보았다.

당고륜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왜 내가…….’

잘못한 건 어디까지나 남궁천인데 왜 자신이 눈치를 본단 말인가?

주춤거리며 물러날 뻔했던 당고륜이 더욱 당당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며 대답을 기다렸다.

‘어디 한번 말해보시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복면인은 남궁천이었다.

이윽고 남궁검의 목소리가 열렸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소?”

“추측입니다만.”

“추측으로 사람을 죽이는 곳이 강호요.”

“하나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추측이 필요하지요.”

“목소리 하나로?”

남궁검의 말투가 칼날 같다.

딱히 살기를 일으키지도 않았는데, 수틀리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검을 휘둘러도 이상할 게 없다는 느낌.

남궁검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괴한이 본 가의 무공을 펼쳤소?”

“그건 아니외다.”

“하면 본 가의 복장을 하고 있었소?”

“그건…… 아니외다.”

“하면 목소리 말고 또 뭐가 있소?”

“공교롭지 않습니까? 그 괴한이 등장한 시점에 하필 남궁천 소가주가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

“당가에서는 자리를 비운 자가 없소?”

“그건…….”

대답이 궁해지자 당고륜이 한숨을 얕게 내쉬었다.

일단 논리적으로도 빈약하지만, 무엇보다 남궁검이 풍겨내는 살벌한 분위기는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다.

그래도 당가를 이끌면서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남궁검에게는 여전히 아이 수준인 걸까?

어쩌다 보니 따지러 와놓고서 되레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지 않았나?

뱃속에서부터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데, 마침 기척이 들리더니 수하 한 명이 다급히 들어와 보고했다.

“가주님! 남궁천이 돌아왔습니다!”

“뭐? 어디냐?”

“지금 내원으로 들어서는 중입니다! 그런데…….”

“말해라.”

“아가씨도 함께 계십니다.”

“아가씨라니? 설아가?”

“예, 가주님.”

당고륜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다가 이내 물었다.

“그럼 설아가 남궁천을 잡아온 것이냐?”

“그건 아닌 듯합니다.”

“일단 가보자!”

당고륜이 성큼 걸음을 내딛는데, 마침 남궁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갑시다.”

“음…… 그러시지요.”

당고륜이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남궁천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연신 혀를 놀렸다.

“허얼,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웬 암기가 여기저기 박혀 있대요? 혹시 오늘 당가에서 엄청난 훈련을 한 건가요?”

“글쎄. 그런 계획은 없었던 걸로 안다.”

“그럼 역시 천독노 때문인가요?”

“아마도 그렇겠지.”

남궁천의 너스레에 당예설이 적당히 반응하며 걸음을 옮겼다.

마침 가주전으로 향하는 도중 당고륜과 남궁검이 저만치에서 오는 것을 보고는 두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남궁천이 먼저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가주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당고륜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이 목소리는 역시……!

잠시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고민하던 당고륜이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고 소리쳤다.

“네 이놈! 네가 저지른 짓을 어설프게 부정하려느냐!”

“예?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요?”

남궁천이 화들짝 놀라며 되묻자, 당고륜이 더욱 큰 소리로 나무랐다.

“정녕 몰라서 묻는 것이냐! 네놈이 천독노와 손을 잡고 본 가를 능멸한 것을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 할까!”

“아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천독노와 손을 잡다뇨? 저는 천독노를 뒤쫓다가 왔는데요!”

“어디서 개수작을……!”

“아버지, 남궁천의 말이 맞아요.”

“설아! 넌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온 것이냐?”

“저도 밖을 돌아다니며 생각을 좀 정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남궁천이 천독노를 뒤쫓더군요. 그래서 저도 천독노의 뒤를 쫓았죠.”

“하면 천독노는?”

당고륜이 일말의 기대를 안고 얼른 물었다.

하나 당예설은 고개를 살래살래 내둘렀다.

“놓쳤어요. 당가 못지않은 독공을 사용하는 데다 민첩하기 이를 데가 없더군요.”

“끄음. 하나 네 말 중 일부는 틀렸다.”

“그게 무슨 말이죠?”

“천독노는 남궁천의 도움을 받아 본 가를 벗어난 것이다!”

“그럴 리가요? 남궁천이 왜 천독노를 도와요?”

“그건 당사자에게 물어봐야겠지!”

당고륜이 딱딱한 표정이 되어서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상황이 거칠어지는데도 남궁검은 말없이 지켜만 볼 뿐이었다.

당고륜이 윽박지르듯 외쳤다.

“변명할 생각은 말게!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대체 왜 천독노를 도와준 것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저는 정말 산책하다가 달아나는 천독노를 보고 뒤쫓은 죄밖엔…….”

“닥치지 못하겠느냐? 감히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냐?”

“진짜라니까요. 아니, 제가 복면인이라는 증거 있어요?”

“나는 복면을 썼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만.”

“에이, 그거야 뻔하지요. 지금 손에 들고 계신 복면이 그놈 거잖아요.”

“끄음. 그럼 가만히 있어 보아라.”

당고륜이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남궁천의 얼굴을 복면으로 가려보았다.

그러자 남궁천이 미간을 팍 구기며 괴상한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뭐하는 것이냐?”

“복면에 냄새가 나서.”

“표정을 바로 해 보아라!”

“흐음. 그럼 이렇게…….”

다음 순간 남궁천의 눈알이 가운데로 몰리며 사시가 되었다.

이래서야 복면으로 가린 얼굴을 보기가 힘들 지경.

“지금 장난하는가!”

“그게 아니라 복면에 냄새가 너무 지독해요. 이 복면 썼던 새끼 이도 안 닦나 보네. 더러운 새끼!”

당고륜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남궁천이 히죽 웃었다.

“이런 식으로 범인을 색출하면 강호인 절반은 의심해야 할 겁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실망입니다. 설마 마신단까지 천독노가 훔쳐 간 건 아니겠죠?”

“흥!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천독노는 분에 넘치는 걸 노리지 않는다고. 다행히 마신단은 안전하다.”

“그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건 마신단 아닙니까?”

“흐음.”

당고륜이 침음을 흘리고는 남궁천을 빤히 응시했다.

참으로 가증스럽다.

하나 지금 더 자극해 봐야 좋을 건 없으리라.

‘그래, 어차피 이놈은 용공단으로 제거해 버리면 그만이지.’

한때는 남궁천의 기개를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하나 수상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찜찜함을 남긴 어설픈 동행보다는 확실히 맹주와 같은 노선으로 가는 게 옳으리라.

당고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수상쩍은 부분이 한둘은 아니지만 자네에게도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겠네.”

“아무튼 저는 아닙니다.”

남궁천이 끝까지 뻔뻔하게 나오자, 당고륜이 내심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네놈의 그 잘난 척이 어디까지 이어지나 보자.’

심호흡으로 속을 달랜 당고륜이 남궁천과 남궁검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신단이 완성됐으니 이제 복용해도 무관합니다. 연공실을 비워두었는데, 언제 시작하시겠습니까?”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니 소가주의 뜻에 따르겠소.”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남궁천에게 향했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으니 바로 시작하죠.”

“지금 바로?”

당고륜이 놀라서 묻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죠. 마신단을 노리는 다른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을 테니까요.”

“흐음. 마신단은 한 알뿐이다.”

“실패하면 또 만들 수는 없는 거죠?”

“어려운 일일세. 마신단은 영단들을 조합해서 만든 것일세. 그 영단을 만드는 법을 모르네.”

“그렇군요. 뭐, 어차피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이니 상관없죠.”

“좋아. 자네가 각오가 되어 있다면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남궁 가주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소.”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고륜이 앞장서며 몸을 돌렸다.

그때 당예설이 얼른 나섰다.

“잠깐만요.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마신단이라니요?”

“설아, 너는…….”

“아뇨. 이번엔 저도 알아야겠어요. 말씀해주세요. 이건 맹의 문제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 가가 마신단을 만들었다니요? 세상이 알기라도 하면…….”

“흐음.”

당고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진짜 마신단은 아들이 가져갔으니 이제는 말해줘도 상관없으리라.

“실은…….”

당고륜이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당예설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래서 천독노가 여길…….”

“당연히 천독노 일은 비밀로 해야 한다.”

“당연하죠. 대신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뭐라?”

“남궁천이 마신단을 복용할 때 저도 참여하겠다고요.”

“네가 왜…….”

“당연히 아버지를 지켜야 하니까요.”

당예설의 말에 당고륜은 살짝 감동을 받았다.

마냥 자신을 원망하는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생각을 해주다니.

하나 당고륜이 손을 저었다.

“너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나와 호신위들이 함께 지켜볼 것이다.”

“설마 제가 여자라서 이번에도 빼는 건가요?”

“설아.”

당고륜이 입을 열다 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남궁천과 남궁검을 한 번씩 보았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저는 상관없습니다. 제가 주화입마에 걸렸을 때, 누구라도 나서줘야 할 테니까요.”

당고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해해 줘서 고맙네.”

동시에 당고륜은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주화입마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내력이 모조리 녹아서 사라질 뿐. 일이 끝나면 설이에게도 속사정을 얘기해 주면 될 테지.’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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