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나 아닌데?
뜻밖에도 당예설이 등장하자 당우기가 눈살을 푹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님……?”
“그래, 나다.”
“누님이 왜 여기 있는 거요?”
“글쎄.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누님이 여기 있는 이유를 지금 내가 물었잖소?”
“묻지만 말고 한번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것 같으냐?”
“나참, 그걸 내가 어찌 아오?”
당우기가 퉁명스레 대꾸하자 당예설이 피식 조소를 지었다.
“그렇지. 넌 항상 그랬지.”
“또 뭐가 말이오?”
“너는 일절 남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없는 아이였어. 궁금할 땐 물어보면 되니까. 어려서부터 소가주라며 떠받들어져서 스스로 뭔가를 알아볼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지.”
“아니,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그래도 우기야. 사람은 한 번쯤 타인의 감정에 공감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네가 모든 걸 가졌다곤 하지만, 세상을 가지진 못했다. 네가 이 강호를 품을 정도의 그릇이 되려면 보다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당우기가 기가 차다는 듯 피식 웃었다.
“누님, 소가주가 못 되어서 지금 내게 떼를 쓰는 거요? 아니면 분풀이 같은? 그도 아니면 집안 어른 노릇을 하고 싶은 거요?”
“그깟 소가주. 내가 못해도 상관없다.”
“한데?”
“한데 너처럼 한심한 녀석이 당가를 이끄는 주인이 된다는 게 용납되지 않아.”
“뭐요? 지금 나하고 한번…….”
“우기야. 네가 뭐라고 생각해도 좋다. 내가 소가주 자리를 욕심내서 이런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네가 한심한 인간이라는 거야.”
“알았소, 알았으니까 비키시오. 난 갈 길이 급하니까. 다 커서 지금 뭐하는 거요?”
“넌 여길 지나갈 수 없다.”
“뭐요?”
그제야 당우기는 당예설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흠칫거렸다.
단순히 서운함을 토로하는 자리가 아니다.
당예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지하 통로 한쪽에 박힌 야명주가 당예설의 옥 같은 얼굴을 조용히 비추었다.
“여길 지나가려면 날 꺾어야 할 것이다.”
“누님! 정말 왜 이러는 거요?”
“자신 없느냐? 그렇다면 네가 가진 걸 내놓아라.”
“하! 누님 진짜 미쳤소? 왜 이래? 정말!”
“너와 내가 반목해 온 날이 하루 이틀이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느냐?”
“진짜 누나 미친 거야?”
당우기가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비상 통로 천장에서 흙부스러기가 푸스스 흩날리며 떨어졌다.
그럼에도 당예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 미쳤다.”
“아니,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나잇살 처먹고 지금 애정결핍 때문에 이런 식으로 반항을 한다고? 정신 차려!”
“너 뚫린 입이라고…….”
“철 좀 드쇼!”
“훗.”
문득 웃음을 흘린 당예설이 이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사뭇 날카로웠기에 당우기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한참이나 웃던 당예설이 곧 정색을 하더니 당우기를 빤히 노려보았다.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듣는 날도 오는구나.”
“아무리 누나라도 이런 식으로 날 막으면 무력을 쓸 수밖에 없어.”
당우기가 전신의 기운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좁은 비상 통로가 당우기의 기운에 공명하듯 울음소리를 나직이 흘려댄다.
당예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날 아주 우습게 여기는구나.”
“그건 누나겠지. 나도 그동안 많이 성장했다고. 이를 악물고 수련했어.”
후우우웅!
뜨끈한 기운이 당우기의 전신에서 훅 뿜어지자 장삼 자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확실히 당우기는 예전에 비해서 내공이 훨씬 심후해 보였다.
하지만 앞서 남궁천과 손을 섞은 적이 있던 당예설은 그저 동생이 가소로울 뿐이었다.
“같은 나이에도 하늘과 땅의 차이구나.”
“뭐?”
당우기가 발끈하며 물었다.
“지금 누구하고 비교한 거야?”
“알 것 없다.”
“말해. 그게 누군데?”
“너도 눈치는 채고 있을 텐데? 널 그렇게 이 악물고 수련하게 만든 존재가 누군지는?”
“설마 그 재수 없는 호구 새끼를 말하는 거야?”
“호호. 그 호구에게 처발린 주제에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구나.”
“이런 썅! 도대체 누나 정말 왜 이래? 갑자기 길을 틀어막질 않나! 아무리 공명심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동생 앞길을 막아?”
“공명심? 누가 그러지? 공명심이라고?”
“지금 이게 공명심이 아니면 뭔데? 분명 맹주님은 내게 임무를 맡겼는데, 왜 누나가 그걸 탐내는…… 가만, 설마……?”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당우기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설마 누나 지금 이걸 맹주님께 전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빼돌리려고……?”
“눈치가 늦구나. 내가 나타난 순간부터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쳤어! 진짜?”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그만 내놓아라.”
당예설이 품에서 비도 두 자루를 양손에 나눠 쥐자 당우기가 미간을 푹 찡그리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로군.”
“좋을 대로 생각하고.”
“칫! 이건 누나가 자초한 거야!”
당우기가 버럭 고함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품에서 암기를 꺼내 던졌다.
쉬쉬쉬쉬쉭!
강맹한 기운을 품은 암기 열두 자루가 마치 사슬고리처럼 이어지면서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당우기가 즐겨 사용하는 가문절기인 연환십이참이었다.
그간 견습생에 발탁되지 못하면서 뼈를 깎는 수련을 했기에 이 무공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한데 당예설은 다른 의미로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이게…… 우기의 연환십이참?’
분명 당우기는 연환십이참을 잘 사용했다. 당우기가 그 기술을 좋아하는 이유는, 가장 자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연환십이참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것과 어딘지 달랐다.
예전엔 당우기가 연환십이참을 펼치면 당예설도 힘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간신히 막아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느려. 왜 이렇게 느리지?’
어둡고 좁은 통로에서 날아드는 암기다. 보다 빠르게 느껴져야 정상이다.
한데 마치 시간을 잡아 늘린 것처럼 날아든다.
‘설마 이것도 남궁천 덕분에……?’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무인은 고수와 손을 한 번 섞게 되면 거짓말처럼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곤 한다. 무공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의식적으로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무의식중에 몸이 먼저 깨닫는 경우도 있다.
지금 당예설이 그런 경우였다.
어떤 깨달음을 자각한 적이 없지만, 남궁천과 짧게 손을 섞은 것이 그녀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우기의 연환십이참이 우스울 정도로 느려 보인다.
스슥!
당예설은 오른쪽으로 한 뼘 정도만 걸음을 내디뎠다.
쉬쉬쉭!
세 자루의 암기가 그녀의 뺨을 스치듯이 지나쳤다. 머리카락 한 올이 잘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몸을 비스듬히 돌리면서 눕히자,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따라 암기 두 자루가 더 지나간다.
‘공기의 흐름마저 보일 지경이야.’
물론 정말로 보이는 게 아니다.
그 흐름을 느낄 뿐이다.
이후부터는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그간 당우기의 연환십이참을 한두 번 보았던가?
더 날카로워지고, 더 강맹해졌지만, 버릇처럼 남아 있는 길은 지워지지 않았다.
당예설은 절묘하게 옆으로 돌아서거나 눕고, 다시 일어서면서 열두 개의 암기를 모두 피해냈다.
타다다다다다닷……!
암기 열두 개가 어두운 벽에 나란히 꽂히면서 요란한 소리를 울렸다.
당예설이 느낀 감정과 생각은 길었으나, 이 일련의 동작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당우기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전부 피하다니…….”
그간의 피나는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
힘겹게 막아내는 것도 아니고, 모든 암기를 몸을 뒤틀며 피해?
그것도 이 좁은 공간에서?
“이이익!”
약이 바짝 오른 당우기가 품에서 납작한 암기를 꺼내 던졌다.
휘리리릭!
서너 개의 암기가 너풀너풀 뒤집히면서 불규칙적으로 움직인다.
마치 나비가 날아가는 듯하다.
역시나 당가의 절기인 추혼비접!
하지만 놀랍게도 당예설은 추혼비접의 비행로가 훤히 보였다.
‘남궁천…… 넌 도대체 내게 뭘 준 것이냐?’
물론 남궁천이 의식적으로 전해준 것은 없다.
단지 손을 잠깐 섞었을 뿐이다.
한데 그 잠깐이 당예설에게는 엄청난 기연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는 당예설이 타고난 자질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삥! 삐잉!
두 자루의 세침이 당예설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튕기면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따다다앙!
순간 납작한 암기가 튕겨 나가면서 서로 부딪치며 불꽃을 마구 터뜨렸다.
“크읏!”
자신이 던진 암기에 되레 당할 위기에 처하자 당우기가 성큼성큼 물러나면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는 사이 당예설이 희고 고운 손을 뻗어 아직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암기를 사뿐히 낚아챘다.
이제 당우기의 눈은 찢어질 지경이었다.
“저, 저, 저 미친……! 추혼비접을 손으로 잡아……?”
물론 자신의 누이가 타고난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혹자들은 남궁선의 뒤를 이어 마침내 당가에서 여제가 탄생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당예설 스스로도 남궁선에 비할 순 없다며 겸양을 갖췄고, 강호인들 역시 그걸 암암리에 인정했다.
한데 지금 당예설을 보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당우기가 황당함을 넘어 은근한 공포심마저 느끼고 있을 때, 당예설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내놔.”
“시, 싫어!”
“사탕 빼앗기기 싫은 아이 같구나.”
“누나는…… 늘 이런 식이었지.”
“뭐?”
“늘 나보다 앞서갔고, 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어!”
“그야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웃기지 마! 누나야말로 타인의 감정에 공감한 적이 있어? 누나처럼 타고난 천재가 둔재의 절망을 알아?”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난 어려서부터 늘 누나와 비교 대상이었어! 장차 가주가 될 텐데 항상 누이만은 못한 소가주였지! 아버지가 날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똑같았다고. 매번 귀가 닳도록 하는 얘기라는 게 ‘네 누이 반만 닮으라’는 거였어. 소가주? 빌어먹을 소가주 자리만 주면 만사형통인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누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 비참함을 알기나 해?”
어느새 울분이 차오른 것인지 당우기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지금껏 이런 속내를 들은 적이 없었던 당예설은 잠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굳은 표정으로 따끔하게 나무랐다.
“그것이 너의 막되어먹은 행동에 정당성을 주는 건 아니다.”
“시끄럽다고! 누나는 늘 잘난 듯이 훈계질만 하지! 누나만 없었어도…….”
“……!”
“나도 둔재는 아니라고. 누나가 너무 뛰어난 게 문제야! 알아들어? 누나만 없었어도 아버지는 날 지금보다 든든하게 여겼을 거야! 그런데 이번엔 내게 주어진 그 막중한 임무마저 누나가 망가뜨리려고 하잖아! 넘을 수 없는 벽과 죽을 때까지 비교당해야 하는 비참함을 누나가 알기나 하냐고! 누나의 존재 자체가 내 인생을 망쳐 버리고 있단 말이야!”
파앙!
사자후처럼 외친 당우기가 바닥을 차며 그대로 당예설을 향해 날아갔다.
그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마주쳐 오는 당우기를 보며 당예설은 처음으로 동생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하나…….
‘방법이 틀렸어. 오로지 너의 문제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망나니가 될 필요도 없었지. 이제라도 누나로서 너에게 진심으로 대하마.’
마음을 다잡은 당예설이 가볍게 손을 뻗었다.
한 단계 벽을 허문 당예설에게 당우기의 이성 잃은 공격은 그리 문제 될 게 없었다.
쉬쉬이잇!
순식간에 빈틈을 파고 든 당예설이 손끝으로 당우기의 요혈을 점했다.
팍!
“끅……!”
한차례 신음을 터뜨린 당우기가 뻣뻣하게 굳어버리더니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쿠다앙!
당예설이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부터라도 널 소가주가 아닌, 동생으로 대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