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 도궁비견(圖窮匕見)
“킬킬킬. 쌍두오독을 갖다준다더니 뭔 대가리가 이렇게 많이 몰려온 거여?”
천독노가 걸걸한 웃음을 흘리는 동안에도 당가의 무인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별채 지붕 위에도 무인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으리라.
“창문이 한쪽으로만 나 있는 이유가 있었군.”
벽을 부수지 않는 한 별채 반대 방향으로 달아날 방법은 없다.
결국 안마당으로 나서는 순간 완벽하게 포위되는 형국.
그렇다고 마냥 죽치고 있을 수도 없지 않나?
“빌어먹을 새끼들. 고얀 놈들.”
천독노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안마당 복판까지 나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등짝이 따갑도록 살기가 느껴진다.
별채 지붕 위에 포진한 무인들이 여차하면 암기를 발사할 태세를 마친 상황.
천독노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야이, 빌어처먹을 당가 새끼들아. 뭐? 사천당가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아? 에라이, 카아악! 퉤! 네놈들이 말하는 신의는 국수에 말아 처먹었냐?”
신랄한 도발에도 당가 무인들은 말을 잃은 사람들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대신 금방이라도 암기를 던질 듯 흉흉한 기세만 풀풀 휘날렸다.
천독노가 다시 뭐라고 쏘아붙이려는데, 마침 묵직한 음성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들려왔다.
“피차 서로 각오한 바가 아니었소? 나는 그런 걸로 알고 있었는데.”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당고륜이었다. 그가 수하들 틈에서 자박자박 걸어 나오더니 이윽고 천독노와 마주 보며 멈춰 섰다.
천독노가 입매를 비틀었다.
“호오, 내 앞에선 온갖 정의로운 척 지랄을 떨어놓고 낯짝 보일 정신이 있나 보군. 이제 보니 당 가주는 내 생각보다 훨씬 뻔뻔한 인물이었어.”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뻔뻔함도 필요한 법. 칭찬으로 듣겠소.”
“허! 하여튼 정파라는 새끼들이 더 지랄 같다니까.”
“뭐가 됐든 영감과 나는 도박을 했지. 영감은 위험을 무릅쓰고 쌍두오독을 노린 것이고,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영감을 이용했소. 그 도박에서 내가 이긴 것일 뿐이외다.”
“흥!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고 해도 네놈이 더러운 속임수를 썼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법. 이래서 독 쓰는 새끼들을 믿으면 안 된다니까.”
당고륜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영감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소?”
“있지! 있고말고. 왜냐하면 나는 나도 싸잡아서 욕하거든. 누구처럼 고상한 척, 아닌 척하지 않는단 말이지. 그러니 나야말로 누구보다 자격이 있는 게다.”
당고륜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영감이 미친 게로군.”
“클클클. 이제 선배 대접도 끝난 거냐? 그건 좀 서운한데?”
“본 가의 독은 억울한 생명을 구한다. 하나 네놈의 독은 억울한 생명을 앗아가지.”
“에라이, 미친 당가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구나. 개소리 그만하고 덤벼라. 어차피 네놈들은 내가 필요한 게 아니더냐?”
구오오오오……!
말을 마친 천독노의 전신에서 녹빛의 독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당고륜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나직이 읊조렸다.
“체포해라.”
“존명!”
수십 명의 당가 무인들이 일제히 대답하자 천지가 떨쳐 울리는 듯했다.
쉬쉬쉬쉬쉬이익!
순간 허공을 새카맣게 채우면서 암기 수백 자루가 천독노를 향해 쏟아졌다.
“흥! 어림없다!”
퍼엉!
순간 천독노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시커먼 독무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튕기듯 물러난 천독노가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잡앗!”
누군가 명을 내리자 당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별채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갔다.
하나 천독노의 무공은 얕잡아 볼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별채 안까지 스며든 독무 때문에 앞을 잘 구분하기 어려운 데다 좁은 공간에서는 머릿수의 우위를 점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천독노의 독은 사천당가인들에게 생소한 종류였다.
피독주를 복용하긴 했다지만 천독노가 스스로 만든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자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기력이 떨어지고 내공 소모도 극심할 수밖에.
파바밧, 와장창! 카차앙!
시커먼 연기 속에서 이따금씩 불꽃이 번쩍이기도 하고, 타격음에 이어 뭔가 깨지는 소리가 정신없이 섞여 들려왔다.
그나마 안마당에 퍼진 검은 독무는 이제 안개처럼 흩어져서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별채 건물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콰차아앙!
창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면서 시커먼 그림자가 튕겨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주 한 명이 목청이 갈라지도록 소리쳤다.
“쏴라앗!”
쒜쒜에에엑!
다시 한번 수백 개의 암기가 새카맣게 날아든다.
하나 천독노는 이미 기절한 당가 무인을 들쳐 업고 있었다. 그가 재빨리 납작 엎드리자, 매섭게 날아들던 암기가 당가 무인의 등을 고슴도치처럼 만들어 버렸다.
푸푸푸푸푸푹……!
“커억!”
울컥 피를 토한 당가 무인이 옆으로 스르르 쓰러지자, 천독노가 튕기듯 일어나면서 재빨리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어엇! 잡아앗!”
애초에 당가는 천독노를 생포할 생각이었기에 암기를 던져도 치명적인 위력이라 할 수는 없었다.
한데 저렇게 활개를 치고 있으니 당고륜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천독노오!”
당고륜이 사자후를 터뜨리며 수하들을 헤집으며 나아가 그대로 일장을 날렸다.
“어딜!”
천독노가 눈을 부릅뜨고는 쌍장을 뻗어 막아냈다.
퍼어어어엉!
츠츠으으으읏!
두 사람이 동시에 튕겨 나가면서 한참이나 미끄러졌다.
푸스스스……!
녹색으로 물들었던 당고륜의 손이 서서히 제 색으로 돌아왔고, 벌겋게 물들었던 천독노의 손도 서서히 원래대로 변했다.
두 사람이 일장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하독한 것이다.
하나 누구도 중독되지 않았으니 둘 모두 엄청난 해독력을 지녔다고 볼 수 있었다.
‘끄음. 과연 사파의 독왕이라는 건가?’
‘흥! 사천당가가 허명만은 아니로군.’
당고륜도 천독노도 이 싸움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다만 형세로 볼 땐 당고륜이 훨씬 유리했다.
둘의 독성과 무공 수위가 호각을 이룬다면 역시나 주변 환경에서 당고륜이 우위일 수밖에 없으니.
당고륜이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영감, 포기하시오.”
“왜? 손을 섞어보니 다시 선배 대접을 해야 할 것 같은가?”
“……예를 차릴 때 좋게 갑시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네놈의 예는 필요할 때마다 붙였다 뗐다 하는 게로구나. 코딱지만도 못한 예는 필요 없다.”
“역시 말이 안 통하는군.”
구오오오오……!
우우우우웅……!
두 사람이 동시에 독기를 머금은 공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검붉은 기운이 당고륜의 전신을 무섭게 휘감았고, 진녹색의 기운이 천독노를 불태우듯 에워쌌다.
한참이나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마침내 바닥을 찼다.
파파앙!
바람처럼 달려간 당고륜이 재빨리 품에서 암기를 꺼내 하늘로 던져 올렸다.
촤라라라라라랏!
순간 노을빛 하늘에 수만 개의 꽃잎이 나풀거리며 흩어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지켜보던 당가 무인들조차 입을 딱 벌리고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하나 천독노만큼은 그것이 아름다운 꽃잎의 향연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건 죽음의 향연이다.
모든 화려한 것은 독을 품는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다.
때문에 천독노는 당고륜이 펼친 만천화우(滿天花雨)가 실속이 없는 한심한 무공이라 여겼다.
‘당가의 만천화우가 최고의 절기라? 같잖은 소리!’
정말 무서운 것은 화려하지 않음에도 독을 품는 것이다.
저렇게 하늘을 붉게 수놓으면서 ‘나 독이오!’ 하고 외치는데, 손 놓고 당할 멍청이가 있다면 그게 한심한 일이지 않겠나?
물론 이런 오만한 생각은 천독노이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어쨌거나 그렇게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던 꽃잎들이 이내 비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파라라라라라라!
그뿐만 아니라 당고륜이 양손에 가득 독기를 머금은 채 천독노를 향해 달렸다.
언뜻 보기에 천하절기인 만천화우를 펼쳐놓고 그 죽음의 땅으로 몸을 던진 것만 같다.
천독노가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양손을 펼쳤다.
“칫, 귀찮게 하기는!”
그가 단전에서부터 끌어 올린 독기를 양손 가득 실으며 돌연 허리를 숙여 바닥을 때렸다.
쉬따아앙!
언뜻 보면 이상한 동작.
하늘과 정면에서 살기 머금은 공격이 들어오는데, 지면을 때리다니?
한데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쿠구구구구! 콰콰아앙!
땅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면서 일시에 바닥의 파편과 함께 허공으로 솟구치는 게 아닌가?
바닥의 파편들이 마치 무게를 잃은 것처럼 허공으로 떠오른다.
투타타타타타탕!
깨진 바닥 파편은 만천화우를 막아낸다. 동시에 파편과 함께 솟구친 독기가 당고륜을 덮쳐간다.
하나 당고륜은 당황하지 않았다.
“흥, 제법!”
파바바바밧!
그가 몸을 눕힌 채로 팽이처럼 회전하자 솟구친 파편과 독기가 그를 지나치며 허공으로 비상했다.
이번만큼은 천독노도 놀란 것인지 눈을 부릅떴다.
‘뭐 이런……!’
지금 천독노가 펼친 무공은 타지교독(打地蛟毒)이라는 초식이었다.
땅을 때려 독을 품은 교룡을 깨운다는 것으로, 천독노가 독자 개발한 최고의 절기 중 하나였다.
한데 그걸 피해?
천독노가 놀라는 사이 당고륜이 품에서 비수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이것이 진짜다.
순간 천독노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만천화우를 속임수로 쓰고 고작 비수 한 자루로 일격을 노려?’
그랬다.
당고륜은 천하 절기로 꼽히는 만천화우를 기껏 허초와 다를 바 없이 사용한 것이다.
오히려 그가 노린 회심의 일격은 평범하게 날려 보낼 비수 한 자루였던 것!
‘독인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 영감 입으로 말하지 않았소?’
파앗!
마침내 독왕 당고륜의 손에서 비수가 떠나갔다.
쒸에에에엑!
빛살처럼 날아드는 비수를 보면서 천독노는 자신이 졌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쉬따앙!
난데없이 검 한 자루가 날아들면서 비수를 튕겨내는 게 아닌가?
꼼짝없이 당할 줄만 알았던 천독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돌아보았고, 당고륜 역시 뜻밖의 방해꾼에게 눈을 부라렸다.
“웬 놈이냐?”
“이 새끼, 왜 이렇게 늦은 게냐?”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자, 복면을 쓴 무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 한 사람씩 말합시다. 헷갈리니까.”
“이 목소리는…….”
당고륜이 눈살을 찌푸리자, 복면인이 손을 척 내밀었다.
“참고로 난 목소리를 변조했으니, 당신이 생각하는 그자가 아니오.”
“목소리를 변조했다는 건 역시 내가 아는 인간이란 말인가?”
당고륜의 날카로운 지적에 복면을 쓴 남궁천이 뜨끔해서는 얼른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 내가 그리 허술할 것 같소?”
“하면 왜 목소리를 변조했다는 거지?”
“그건…… 왜지?”
남궁천이 천독노를 보며 묻자, 천독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취미 정도가 어떻겠느냐?”
“오, 그렇소. 그건 내 취미요.”
복면인의 말에 당고륜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이 새끼,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넌 누가 봐도 남궁천이잖아!
* * *
그 시각 사천당가의 비상 통로.
당우기가 미간을 푹 구기고는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누구냐? 여긴 직계만 사용하는 비상 통로인데. 웬 놈이냐?”
“후후후.”
나직하게 들려오는 웃음소리.
당우기가 눈을 크게 떴다.
‘이 웃음소리는…….’
마침내 어둠 속에서 희미한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래, 네 말대로 직계만 사용하는 곳인데 누구긴 누구겠어?”
당예설이 싸늘한 웃음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