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묘서동처(猫鼠同處)
천독노가 합류하면서 마신단 제조는 확실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당가에 모인 자들이 저마다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었으니, 마신단의 완성이 가까워질수록 미묘한 긴장감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당고륜은 매일같이 당우기를 만나서 마신단을 빼돌릴 계획과 맹주에게 전할 방법에 대해 점검을 했고, 천독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탈출 방법과 쌍두오독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알아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남궁천은 두 사람의 검은 속셈을 대략 눈치를 채면서도 모른 척했고, 당예설은 가문 내에서 돌아가는 미묘한 변화를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지객당에서 차를 마시던 남궁검이 마주 앉은 남궁천에게 말을 꺼냈다.
“마신단이 내일이면 완성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역시 천독노가 도움이 된 모양이네요. 그 영감이 보기엔 허술해도 독에 관해서는 당 가주만큼 빠삭한 것 같더라고요.”
“잘된 일이다만, 당 가주를 어디까지 믿어야겠느냐?”
“믿어선 안 돼요. 당가는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많으니까요. 설득을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따로 대비책을 마련해 둬야죠.”
“해서 대비책은 마련해 두었느냐?”
“네,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남궁천이 말끝을 흐렸다.
‘천독노도 쉽게 찾진 못하는 건가?’
천독노에게 가문 직계만 이용하는 비상통로를 찾으라고 말해두었다.
명목은 천독노에게 무사히 탈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 그 길을 이용해 당우기가 마신단을 빼돌릴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 것이다.
한데 아직까지 천독노에게 소식이 없다. 게다가 최근에는 천독노가 대놓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통에 당고륜이 예의주시하는 중이었다.
‘이거 양쪽 균형 맞춰가며 줄타기를 하려니 영 피곤하네.’
남궁천이 생각에 잠긴 사이 남궁검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 동행하긴 했으나, 모든 진행을 너에게 맡겨두었다. 왜 그런지 아느냐?”
“예. 차후 가문을 이끌어갈 재량을 알아볼 겸, 또 저의 방식을 지켜볼 겸이시겠죠.”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하나 그것만이 아니다.”
“하면 또 무엇입니까?”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천마신단을 제조하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다. 거듭 생각해 보아도 네가 천마신단을 복용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구나.”
“할아버지. 저를 믿으시고…….”
“믿는다. 여기까지 와서 너를 믿지 않으면 내 누구를 믿겠느냐?”
망설임 없이 대답한 남궁검의 표정에는 정말 신뢰가 가득해 보였다. 남궁검이 굳어진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하나 너는 소가주다. 그리고 내 외손자다. 너를 믿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아니, 믿기 때문에 더욱 걱정이 된다. 해서 할아비로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하여튼 이 영감은 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다니까.
남궁천이 코끝을 스윽 문지르고는 말했다.
“걱정 마세요. 지금까지 잘 준비했으니까 마신단을 소화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내 듣기로 마신단은 천마의 혼을 부른다고 들었다. 그 혼에 짓눌려 이성을 잃고 기운이 폭주하면 바로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이지.”
“반드시 주의하겠습니다.”
남궁천이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찻잔을 들었다.
남궁천도 찻잔을 들며 말했다.
“오늘 밤에는 당 가주님을 만나 뵈려고 합니다.”
“이유는?”
“아무래도 천독노와 저의 관계를 의심하는 것 같아서요.”
“실제로는 어떠하냐? 너는 천독노와 손을 잡은 것이냐?”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 둘을 이용하는 중입니다.”
“좋구나. 정과 의리를 쉽게 보이지 마라. 악랄한 자는 너의 정과 의리를 이용해서 제 뱃속을 채우려 들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하나 누군가를 이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매사에 신중하길 바란다.”
“예, 그래서 오늘 밤에 당 가주를 만나려고 합니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두었다.
* * *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천독노는 이독당으로 들어와서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만치 약재 보관실을 확인한 그가 잰걸음으로 다가가자, 그 앞을 지키던 당가의 무인이 막아섰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급히 알아봐야 할 약재가 있어서 왔네. 물러서게.”
“지금은 허가 시간이 아닙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오십시오.”
“거참, 자네는 내가 이곳에서 하는 일을 모르는가?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내일 오라는 건 뭔 방귀 같은 소리야?”
“죄송합니다. 가규 때문에 어쩔 수 없…….”
탁탁.
순간 전광석화처럼 날아간 천독노의 손이 문지기의 요혈을 짚었다. 일순 전신이 굳어버린 문지기는 그 자리에 선 채로 혼절해 버렸다.
“그러게 진작 말을 들으면 좋잖은가? 가규는 얼어 죽을.”
천독노가 콧방귀를 뀌고는 보관실 안으로 들어섰다.
약재 보관실답게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약향이 진동한다.
왠지 이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건강해질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난다.
“어디 보자…… 여기 어디쯤 있을 것 같은데…….”
천독노가 수납장을 한참이나 눈으로 더듬거리던 때였다.
따악!
순간 뒤통수에 불이 나면서 천독노가 눈을 부릅뜨고 홱 돌아섰다.
“웬 놈이……!”
“이것 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지금 이걸 찾는 거지?”
어느새 나타난 남궁천이 약병 하나를 들고 흔들었다. 약병에는 쌍두오독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어어……? 그걸 네가 왜?”
“왜긴 왜겠어? 영감이 분명 이걸 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미리 빼둔 거지.”
“노리긴 누가 노린단 말이냐? 마신단을 제조하는 데 협조하면 그 쌍두오독을 분명 내게 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준다고 했지, 훔쳐 가게 해준다고 한 건 아니잖아?”
“훔칠 생각 없었다!”
“그걸 믿으라고?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그, 그야…… 내가 가져갈 쌍두오독이 여전히 잘 있는지 보려고 그랬을 뿐이다!”
“개소리도 좀 작작 하쇼. 누굴 호구로 보나?”
“아닌 말로 네놈들이 날 잡아 죽이려는지 어쩌려는지 내 알 게 뭐냐? 이만큼이나 도와준 것도 나로선 모험이니라.”
“하여튼 쌍두오독은 지금 드릴 수 없겠고. 마신단이 완성되면 그때 가져가시오.”
“흥! 지금 가져갈 생각을 안 했대도!”
“예, 예. 그러시겠지요. 그럼 내일 봅시다. 거, 밖에서 고생하며 번을 서는 무인한테 사과도 하시고.”
“끄응. 당 가주에게 분명히 전해야 한다. 약조를 지키라고!”
“알았으니까 어서 썩 꺼지시길.”
“쳇!”
천독노가 혀를 차고는 몸을 휙 돌리고 걸어갔다.
약재 보관실에 홀로 남은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쌍두오독을 원래 자리에 두었다.
그러자 보관실 한쪽 수납장이 스르륵 돌아가더니 안에서 또 다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그는 바로 사천당가의 주인 당고륜이었다.
당고륜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과연. 자네 말대로 천독노가 쌍두오독을 가지러 왔군.”
“제 버릇 개 못 주는 법이죠.”
“그간 내가 자네를 조금 오해했었군.”
“오해라니요?”
“나는 자네가 천독노와 손을 잡고 본 가를 곤란하게 하진 않을지 내심 경계했었네.”
“어…… 그건 좀 서운한데요?”
“미안하네. 가주로서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하니. 이해해 주게나.”
“그럼 이젠 오해가 풀리셨나요?”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네와 천독노가 한통속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은 드는군.”
“그럼 완전하지 않은 부분은 뭐죠?”
“별건 아니네만, 천독노가 왜 마신단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지 의아하군.”
“아, 그건 간단해요. 그 영감 성격상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걸 딱 질색하거든요. 분수에 넘치는 걸 욕심내지 않죠. 그리고 원래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걸 안 보는 성격이기도 하고요.”
“호오. 자네는 정말 천독노에 대해 잘 아는군? 그것도 책으로 배운 건가?”
“물론이죠. 그 책 제목이…….”
“그건 됐네. 어쨌거나 내 자네를 의심한 건 사과하겠네. 나중에 자네가 가문을 이끌다 보면 이해할 걸세. 이 세상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을. 내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단순히 기분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족속도 있게 마련이니.”
“그렇군요. 아무튼 그럼 내일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시게. 그나저나 준비는 잘 되어가는가?”
“문제없습니다.”
남궁천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당고륜이 침음을 흘리다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자네가 실패할 경우에는…….”
당고륜이 차마 뒷말을 잇기 어렵다는 듯 얼버무리자,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지체 말고 목을 치십시오.”
“알겠네.”
당고륜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럼 내일 보세.”
“편안한 밤 보내시길.”
남궁천의 포권에 당고륜이 답례하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이상한 점이 한둘은 아니야. 어쩌면 맹주의 우려가 사실일지도. 이번만큼은 맹주와 뜻을 함께 하는 게 좋겠다.’
* * *
지객당 후원.
남궁천은 당고륜이 가주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천독노와 은밀하게 만났다.
“옘병할. 닮을 걸 닮아야지. 손버릇 더러운 것까지 꼭 제 아비를 닮아 가지곤.”
“미안하게 됐소. 그 정도는 해야 당 가주가 날 믿을 것 같아서.”
“두 번 믿게 만들려다간 아주 사람 잡겠구나!”
“그래도 당 가주가 날 믿어야 우리 일이 원활하게 진행된다니까요.”
“쳇, 염병할! 육시럴! 니미럴!”
“거, 적당히 합시다. 욕도 버릇인데.”
남궁천의 표정이 짐짓 서늘하게 가라앉자 그제야 천독노가 슬쩍 눈치를 보고는 꼬리를 말았다.
“아무튼 자네 말대로 샅샅이 뒤져봤지만 찾지 못했네.”
“비상통로를?”
“그래. 도무지 보이지 않더군.”
“이건 좀 실망스러운데…….”
남궁천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천독노가 슬쩍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비상통로 아니더라도 본좌는 여길 빠져나갈 자신이 있어. 자네가 조금만 도와주면 돼.”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난 반드시 그 비상통로를 찾아야만 한다고요.”
“대체 왜 그렇게 비상통로에 집착을 하는 게야? 실은 날 빼주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게지?”
“그렇소.”
의외로 남궁천이 순순히 인정하자, 천독노가 이맛살을 푹 찡그렸다.
“허, 이것 보게. 사람을 날로 굴려 먹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었다?”
“그게 다 우리를 위해서요. 막말로 내가 목적을 달성 못 하면 영감을 여기에서 무사히 보내주고 싶을까?”
“끄응. 알았으니까 이젠 어쩔 생각인가? 비상통로를 찾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게 있을 테지?”
“없소.”
“뭬야?”
“비상통로를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고요. 그런데 영감이 찾질 못했지. 멍청하게.”
“이익……! 그게 그렇게 쉬운 일 같았으면 애초에 당가가 왜…….”
“그럼 영감은 그렇게 쉬운 일만 할 수 있나 보네. 이거 완전히 실망인걸.”
“크익…….”
천독노가 발끈했지만 더 이상 따지지는 못했다.
남궁천의 말대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해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런데 다음 순간 남궁천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떨어졌다.
“하지만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뭐? 어떻게?”
“대화에 끼고 싶으면 그냥 나오시죠?”
“엉? 무슨 말이야? 네놈 누구에게 하는 말이냐?”
천독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잠시 후 지객당 지붕 위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올라오더니 사뿐히 뛰어내리는 게 아닌가?
천독노가 화들짝 놀라서 물러났다.
“웬, 웬 놈이냐?”
“후후. 역시 대단해, 남궁천.”
뜻밖에도 달빛을 등진 그림자로부터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달빛에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적랑단주 당예설……!”
천독노는 황당한 표정으로 당예설과 남궁천을 번갈아 보았다.
우선 당예설의 기척이 거짓말처럼 감쪽같다는 사실에 놀랐다. 암기와 독의 대가인 당가라서 그렇다지만, 이렇게나 완벽하게 기척을 숨길 줄이야.
한데 더 놀라운 건 그걸 눈치챈 남궁천이다.
‘도대체 저놈은 뭐야? 괴물이야?’
천독노가 혀를 내두르는 동안 남궁천이 태연하게 묻는다.
“어지간히 다 들었죠?”
“맞아. 언제부터 눈치챈 거지?”
“거의 처음부터일걸요.”
“그런데도 모른 척한 이유는?”
“단주님의 반응을 보려고요.”
“확실히 넌 재미있는 녀석이야.”
“그래서 감상은 어땠어요?”
당예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꽤 곤란한 상황 같은데…… 내가 도와줄 수도 있고.”
“그럼 도와주시죠?”
“나랑 혼인할 거야? 그럼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천독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당최!
왜 이런 자리에서 혼담이 오가는 건데?
그런 와중에 남궁천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건 이미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던 것 같고. 어차피 단주님도 절 이용하시려는 거니,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
“절 도와주면 제가 단주님을 소가주로 만들어드리죠.”
당예설이 남궁천을 빤히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차네. 그런데 네가 무슨 수로?”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당 가주님이 단주님을 소가주로 임명하도록 만들죠. 최대한 평화로운 방법으로요.”
“……!”
“어때요? 협조하겠어요?”
“글쎄. 너는 분명 재미있는 녀석이지만 본 가의 규율을 흔들 정도로 능력이 있을까?”
“그 정도 능력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제게 혼인을 하자고 한 겁니까? 그럼 오히려 제가 실망입니다만.”
남궁천의 당돌한 태도에 당예설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남궁천이 말을 덧붙였다.
“결정하시죠? 도박을 할 거면 확실하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