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묘서동처(猫鼠同處)
가주전으로 들어선 당우기가 정식으로 당고륜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자, 인사 올립니다.”
“그래,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한데 네가 어째서 돌아온 것이냐? 아직 휴관기가 아닐 텐데.”
당고륜이 어딘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당우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당우기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큰 신뢰를 얻진 못한다는 것을.
자신이 남자라는 이유로 소가주가 되었지만, 누이인 당예설이 다방면으로 뛰어난 게 사실이었다.
무공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상황에 따른 처세술 역시 당예설이 늘 앞서나갔다.
하지만…….
‘이젠 다를 것이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은 당우기가 턱을 살짝 치켜들고는 말했다.
“소자, 맹에서 중요한 임무를 받아들고 오는 길입니다.”
“맹에서? 너에게 임무를?”
뜻밖의 말에 당고륜이 미간을 좁혔다.
당우기가 입매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예. 맹주님이 직접 저를 불러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아버지, 저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네가 뭘 안다는 것이냐?”
“아버지, 그리 절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이번 작전에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당고륜이 입을 가만히 다문 채 아들을 보았다.
당우기는 뭔가 막중한 임무를 받아서 한껏 들떠 있는 듯했다.
‘저리 심중이 가벼워서야. 쯧쯧…… 맹주가 이미 우기의 성품을 어느 정도 파악한 모양이구나.’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라고 왜 모르겠나?
아들보다는 장녀인 당예설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것이 잘못이리라.
비교적 터울이 많이 나는 탓에 당우기를 지나치게 예뻐하기만 한 것이다.
한편 아버지가 별로 탐탁잖은 표정을 짓자 당우기는 괜히 오기가 솟구쳐 짐짓 큰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맹주님께서 이번 작전의 핵심은 저의 역할에 달렸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저만 믿으시죠. 제가 실수 없이 해내서 맹에서도 본 가의 입지를 더욱 단단히 다지겠습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누님은 패장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우기의 당돌한 말투에 당고륜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데 너는 어찌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구나.”
“그럴 리가요. 저는 단지 가문이 다시 일어설 기회를 가졌다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에요.”
“다시 일어서? 본 가가 언제는 주저앉았더냐?”
“그렇진 않지만, 적랑단주인 누님이 패전한 것은 결코 본 가에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죠.”
“우기야.”
“예, 아버지.”
당고륜이 당우기를 빤히 바라보다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을 깎아내리는 것은 결국 누워서 침을 뱉는 것과 같다. 어찌 너는 네 누이에게 경쟁의식만 가지고 사느냐?”
“그게 아니라…….”
“됐다. 어서 할 말이나 마저 해보아라.”
당고륜이 말을 끊자, 자존심이 상한 당우기가 어금니를 꾹 씹다가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냈다.
“맹주님이 보내신 겁니다. 읽어보시지요.”
“이리 가져오너라.”
서신을 넘겨받은 당고륜이 담담한 표정으로 글을 읽어갔다.
내용은 간단했다.
마신단이 제조되면 당우기를 통해서 맹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글귀까지 읽은 당고륜이 눈살을 가늘게 여몄다.
‘결국 본 가를 온전히 믿진 못해서 당우기를 보낸 것이로군.’
아들의 성격상 녀석은 맹주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당우기의 성품에 대해서는 이미 천뇌당에서 모두 파악하고 있을 테고, 그걸 이용해서 맹주는 당우기를 불러 온갖 감언이설로 구워삶았을 터.
그러니 당우기는 지금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니겠나?
‘저래서야 중요한 임무를 위해 집에 온 거라고 홍보하는 얼굴이로군.’
당고륜은 글에 적힌 대로 삼매진화의 수법을 이용해서 서신을 완전히 태워 버렸다.
당우기가 새카만 재가 되어 떨어지는 서신을 보며 웃었다.
“이제 대략의 사정을 아시겠죠? 아버지, 저는 맹주님의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이건 본 가에 기회가 온 겁니다.”
“우기야.”
“예, 아버지.”
“기회란 누가 챙겨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물론 압니다. 하지만 때론 챙겨주는 기회도 잡아야죠.”
“보통 그건 기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자칫 이용당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항시…….”
“설마 맹주님을 불신하는 겁니까?”
당우기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당고륜이 입을 다물었다.
‘맹주, 내 아들을 제대로 구워삶았군.’
기분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에 와서 아들을 엄하게 대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을 터.
당고륜이 연거푸 한숨을 쉬자 당우기가 눈살을 푹 구겼다.
“아버지. 절 앞에 두고 너무 한숨만 쉬시네요. 이제 걱정 좀 그만하세요. 저도 어엿한 어른입니다.”
“세상은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그만하시죠? 도대체 언제까지 철부지 취급을 하실 겁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누나를 소가주로 앉히세요.”
“그게 무슨 소리냐?”
“사실 그렇잖아요. 저를 소가주로 세워두시고 인정을 안 하시니, 누나가 저렇게 제멋대로 설치는 것 아니겠어요?”
“노옴! 말을 함부로…….”
“왜요? 아버지도 저 때리실 겁니까? 남궁천처럼?”
당고륜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자식의 한심한 행동 때문에 울분이 치솟는데 그걸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
그때 문 쪽에서 들린 기척에 당고륜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거기 누구냐!”
“저예요.”
사박사박 발걸음을 옮기며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당예설.
“우기랑 무슨 얘기 나누고 계셨어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던져오는 질문에 당고륜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너는 어찌 가주실에 들어오면서 기척을 내지 않는 것이냐?”
“저 들어왔습니다, 아버지. 됐나요?”
“너 그게 무슨…….”
“아버지는 예전부터 그러셨죠. 우기는 밖에서 아무렇게나 들어와도 별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제게는 늘 잔소리를 하시고.”
“자고로 여자는 조신해야…….”
“알겠어요. 그래서 우기랑 무슨 얘기하셨는데요?”
거듭된 질문에 당고륜이 입을 다물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만 몇 번째 한숨을 쉬는지 모르겠다.
자식이란 이렇게 힘든 존재였던가?
당고륜이 고개를 저으며 집무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별말 아니었다.”
“흐응. 또 제가 알아서는 안 되는 거군요? 저 같은 여자는 알 필요도 없는 것일 테고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느냐?”
“글쎄요. 매번 아버지는 집안의 대소사를 우기하고만 대화하셨죠. 저는 이방인이나 다름없고.”
“설아. 대체 너까지 왜 이렇게 아비를 힘들게 하는 것이냐? 우기와 나눈 대화는 맹의 기밀 사항이라 말할 수가 없다.”
“맹의 기밀 사항이라면 저도 알아야겠어요. 잊으셨나 본데 저는 무림맹 적랑단주입니다.”
“설아!”
“아버지.”
당예설이 딱딱한 표정으로 마주 바라보자 당고륜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당예설이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당고륜을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지금 전 아버지 딸이 아니라, 맹의 적랑단주로서 협조를 구하는 겁니다.”
감정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순간적으로 당고륜은 자신의 딸이 정말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진득한 아쉬움이 남는다.
‘우기가 제 누이 반만 닮았어도…….’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당고륜이 고개를 들더니 냉소를 지었다.
어느덧 그는 독왕 당고륜으로 돌아와 있었다.
“적랑단주로서 하는 말이라고 했느냐? 그렇다면 더더욱 말해줄 수 없다. 맹주님은 우기를 통해 내게 전한 이야기를 절대적 기밀이라고 하셨다. 하면 너 또한 맹주님의 말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 이상 호기심을 가진다는 것은 맹에 반한 행동이라는 것을 명심하거라.”
“……!”
당예설이 입술을 꾹 씹자, 당우기가 옆으로 오며 빈정거렸다.
“적랑단주님. 알아들으셨으면 그만 자리 좀 비켜주시죠? 제가 가주님과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말입니다.”
결국 당예설이 굳은 표정으로 잠시 서 있다가 몸을 홱 돌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그녀의 전신에서 매서운 한기가 휘몰아쳤다.
* * *
“진행 상황은 좀 어때?”
남궁천의 물음에 천독노가 콧잔등을 씰룩이고는 말했다.
“본좌가 누구냐? 아직까지 순탄하다.”
“호오, 그럼 대충 언제쯤 만들어질까?”
“글쎄다. 그래도 보름은 걸리지 싶은데…….”
“순탄하다면서 너무 오래 걸리는 것 아냐?”
“독 제조가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먼지 한 톨에도 조심하고 미세한 온도 변화에도 결과가 달라지는 게 바로 독이라는 것이야. 게다가 제조 과정에서 항시 불을 가까이 해야 하지만, 불에 가장 취약한 것도 바로 독이지.”
“그래도 보름은 너무 길어. 열흘 만에 끝내봐.”
“아니, 무슨 마신단이 철판 요리쯤 되는 줄 알아? 그렇게 뚝딱 만들게?”
“천독노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물론 나라면 가능할 수도 있어. 그래, 그건 인정.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쉬운 일이면 천독노가 필요 없지. 안 그래?”
“커흠. 그건 그렇지. 그런데…….”
“응?”
“너 왜 자꾸 반말이냐?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에이, 뭘 그런 걸 따져. 우리가 언제 밥그릇 수 세면서 대화 나눴나?”
“아니, 이 새끼가 싸가지 없는 건 꼭 제 아비를 닮아 가지고. 야, 인마! 내가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영감, 살아서 나가야지?”
남궁천이 문득 돌아서며 서늘하게 웃자 천독노가 말을 꿀꺽 삼켰다.
‘이놈은 이럴 때마저 제 아비랑 똑같군.’
남궁천이 어깨에 팔을 척 두르자, 천독노가 어깨를 움찔거리고는 힐끔거린다.
“뭐, 뭐냐?”
“알잖아. 이번 일이 끝나면 당가가 영감을 가만히 안 둘 거라는 걸.”
“당연히 그럴 테지. 한데?”
“내가 비밀 하나를 알고 있는데 말이야.”
“뭐냐?”
“당가에는 직계만 알고 있는 비상 통로가 있어. 독과 암기를 다루는 사천당가답게 항상 대비책이 있다는 셈이랄까?”
“그래서?”
“그 비상통로를 찾으면 영감이 쌍두오독을 찾고 무사히 떠날 수도 있단 말씀이지.”
일리 있는 말에 천독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네놈이 날 도와준다는 건 그것이었냐?”
“뭐, 서로 돕는 거지. 꼭 내가 영감을 도운다기보단.”
“그래서 그 비상통로는 어디에 있는데?”
“그걸 이제부터 영감이 찾아야지.”
“아니, 뭐 이런 무책임한 소리를 하고 있어? 당가에 비상통로가 있다는 건 확실한 거냐?”
“확실해.”
남궁천이 확신에 찬 어조로 대꾸했다. 전생에 도망자로 지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던가? 그중에는 사천당가 뇌옥에 사로잡혔다가 탈출한 무림공적도 있었는데, 그가 바로 그 비상통로를 이용해서 탈출했다고 말했었다.
‘뭐, 허풍일지도 모르지만 사천당가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단 생각이 든단 말이지.’
천독노가 남궁천을 흘겨보며 물었다.
“한데 넌 당가의 직계도 아니면서 어찌 그걸 아느냐?”
“당가를 책으로 배웠지.”
“도대체 어디서 무슨 책을 읽고 다니는 거야?”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일이 끝나고 무사히 쌍두오독을 가지고 나가고 싶다면 잘 알아보라고.”
남궁천의 말에 천독노가 서늘한 안광을 빛냈다.
“클클.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