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묘서동처(猫鼠同處)
남궁천이 한참이나 눈만 끔뻑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참, 손님에게 다짜고짜 암기를 날리시더니 이젠 청혼입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단주님은 제 취향이 아니에요.”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어가는데, 당예설이 얼른 손을 뻗어 남궁천의 손목을 낚아챘다.
하나 재빨리 돌아서면서 손목을 빼낸 남궁천이 두어 걸음 물러나며 눈살을 찌푸렸다.
“에헤이, 왜 이러실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당예설은 다시 한번 놀랐다.
‘확실히…… 보통 녀석이 아니야.’
조금 전 일장을 부딪친 것 때문에 아직도 오른팔이 욱신거린다. 한데 남궁천은 조금도 타격이 없다는 듯 자유롭게 팔을 움직이고 있다.
당예설이 굳은 표정으로 남궁천을 빤히 보며 물었다.
“내가 지금 농을 하는 것으로 보이니?”
아, 정말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래?
하여튼 요즘 것들은 속을 알 수가 없다니까.
남궁천이 내심 혀를 내두르다가 고개를 살래살래 내둘렀다.
“아무래도 단주님이 패전의 충격이 커서 머리가 어떻게 되신 모양이에요. 지나간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는 말도 있잖아요.”
“물론이지. 그런 건 신경 안 써. 아니, 신경은 쓰여도 지금 내 행동이 그것과는 별개란다. 너는 당가의 데릴사위가 될 자격이 충분해.”
“아니, 뭔 데릴사위냐고요. 내가 싫다니까!”
“아직 어려서인지 이해를 못 하는구나.”
“이해를 못 하는 건 그쪽 같은데.”
“당가의 데릴사위다.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노리는 자리지. 하지만 내가 그 만인을 제쳐두고 너를 택해주겠다는 거야. 내가 널 가주로 만들어줄 수도 있어. 이미 다 쓰러진 남궁가보다는 본 가를 이끌어보는 게 너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 될 텐데?”
“허! 당가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렇게 가주가 좋으면 직접 하시지요?”
당예설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까지 우리 집안에서 여자가 가주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런 관례 정도는 부술 정도의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그걸 부수려고 널 이용하려는 거잖아.”
“이젠 대놓고 날 이용한다고 하시는군요.”
“네가 마음에 드는 것도 사실이고. 말했다시피 너는 데릴사위가 될 자격이 충분…….”
“그놈의 데릴사위. 미안하지만 난 관심 없습니다.”
“데릴사위에 머무는 게 아니라, 관례를 깨고 널 가주로 만들어줄 수도 있……!”
“그런 식으로 관례를 깨는 건 제 성격과 맞지 않아서요. 그럼 이만.”
남궁천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은근 부아가 치민 당예설이 소리쳤다.
“아직 말 끝나지 않았어. 기다려.”
“전 할 말 없습니다. 아니, 뭔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남궁천이 구시렁거리며 걸어가자, 당예설이 어금니를 꾹 씹었다.
‘여기고 저기고…… 내가 그리 우스워 보이는 건가?’
타앗!
순간 당예설이 바닥을 차는 것과 동시에 품에서 비도 열 자루를 꺼내서 뿌렸다.
쉬쉬쉬쉬쉭!
허공을 어지럽게 가르며 날아가는 비도.
어느 것은 직선으로 날아가고, 어떤 것은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
당예설이 가문절기를 응용해서 창안한 십지비도술(十指飛刀術)이었다.
남궁천은 가장 먼저 날아드는 직선의 비도를 연이어 쳐냈다.
따당!
동시에 몸을 돌풍처럼 회전하면서 사방에서 곡선으로 날아드는 비도를 차례로 쳐냈다.
따다당!
십지비도는 당예설의 외모만큼이나 화려했다.
어떤 것은 직선, 어떤 것은 완만한 곡선, 또 어떤 것은 추혼비접을 응용하여 나비처럼 너풀너풀 날아들기도 했다.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혼이 쏙 빠져나갈 정도로 현란한 비도술이었다.
‘과연 적랑단주에 오를 만하군.’
남궁천은 반사적으로 벽라검을 휘두르면서도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동시에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듯했다.
젊은 여고수를 상대하면서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남궁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에.
하지만…….
‘선아, 이 아이도 너만큼은 아니구나.’
남궁천이 쓴웃음을 머금고는 벽라검을 뒤집으면서 무한히 곡선을 그려나갔다.
따다다다다앙!
남궁천의 품으로 날아들면서 그 모습을 본 당예설은 눈을 부릅뜨고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저걸 다 쳐낸다고?’
남궁천의 무위가 이전보다도 훨씬 향상된 것을 깨닫고서 손속에 사정을 두진 않았다.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십지비도를 펼쳤다.
한데 죽기는커녕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지 않은가?
당예설이 남궁천의 심장으로 짓쳐 들어가는 사이, 남궁천은 마지막 비도를 쳐내고 있었다.
땅!
피이잉!
튕겨 나간 비도가 공교롭게도 당예설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공교롭게도? 아니다.
다분히 의도된 바다.
“헉!”
당예설이 얼른 허리를 비틀면서 몸을 젖히자, 튕겨 나간 비도가 아랫배를 살짝 스치면서 전각 기둥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콰직!
파바바밧!
당예설이 바닥을 툭 차는 것과 동시에 몸을 현란하게 회전하면서 튕기듯 날아올랐다.
하나 이번에는 남궁천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앗!”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사이, 지척까지 날아든 남궁천이 그대로 손을 뻗어 와 당예설의 손목을 꺾어 쥐는 것이 아닌가?
재빨리 이화접목의 술법으로 방어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마저도 읽은 것처럼 남궁천은 현란한 금나술을 펼쳐 그대로 밀어붙였다.
“아악!”
결국 팔이 꺾인 당예설이 그대로 밀려나면서 전각 벽에 쿵 부딪쳤다.
“윽…….”
벽에 짓눌려지다시피 떠밀린 당예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여자를 다루는 방식이 좀 거치네?”
남궁천의 왼손은 당예설의 손목을 꺾어 쥐고 있었고, 오른손은 뒷목을 잡고 누르는 상태.
남궁천이 다시 왼손을 반대로 꺾자, 당예설이 반사적으로 빙글 돌아서며 벽에 등을 대고 섰다. 곧이어 남궁천이 당예설에게 불쑥 다가가며 싸늘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손님을 다루는 방식이 거치니까 저절로 이렇게 되네요.”
그 순간 당예설은 왠지 모르게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이런 기운은…….’
기분 탓일까?
지금 이 순간 남궁천이 약관도 채우지 않은 애송이가 아니라,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강호 고수로 보인다.
당예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데,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관례를 부수고 싶으면 제대로 하세요. 이런 어설픈 방법 쓰지 마시고. 내가 안 되니 남을 내세우겠다? 그건 부순 게 아니라 결국 관례에 굴복한 겁니다. 그런 정신으로 강호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남궁천이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자, 당예설이 그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남궁천…… 날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당예설의 뺨에 홍조가 깊어졌다.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라니까.’
* * *
다음 날부터 사천당가는 마신단 제조에 박차를 가했다.
남궁천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부지런히 수련을 하며 마신단을 소화할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갔다.
아침에는 운공조식을 하고 오후에는 초식을 수련하면서 몸을 단단하게 다져갔다.
때론 사람이 없는 틈에 창벽공을 이용해서 다른 무공을 품는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 때, 사천당가 소가주인 당우기가 돌아왔다. 예정에 없던 방문이었기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당예설이었다.
늘 집안에서 차별 대우를 받았던 그녀로서는 사랑과 관심만 받아온 당우기와 대면하는 것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학관에 있어야 할 네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처음부터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하나 당우기는 입매를 비틀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는 누님은 왜 여기서 머물고 있소? 한창 바빠야 할 적랑단주께서? 아, 맹주님의 명을 기다리고 있는 건가? 하긴. 맹주님도 골치 아프시겠지. 이 중요한 시기에 패전한 단주를 곧바로 불러서 중책을 맡기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이 시국에 엄벌을 내리기도 힘드실 테고.”
다분히 도발적인 발언에 당예설이 눈을 사납게 치떴다.
“말이 신중하지 못하구나.”
“누님. 여긴 맹이 아니오.”
“그래서?”
“본 가에서는 내가 소가주란 말이외다. 엄밀히 말해서 여기에선 내가 누님보다 위란 말이오. 그러니 예를 갖춰주면 좋겠소.”
“네가 감히…….”
“감히? 지금 소가주에게 감히라고 말했소? 암탉이 울면 집구석이 망한다던데…….”
“닥쳐라! 네가 가주님께 관심을 받는다고 이리 안하무인하다니. 네 말대로면 너는 소가주로서 맹의 요직에 있는 내게 예를 다해야 할 것이야.”
“흐음. 그런가? 알겠소. 내 실수를 인정하지. 그럼 패전한 적랑단주께선 본 가에 어인 일로 와 계시오?”
“너…….”
당우기가 당예설을 힐끔거리며 낄낄거렸다.
“뭐,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라 했으니, 난 이만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소. 비켜주시겠소? 적랑단주?”
당예설이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당우기를 노려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한심하구나. 실력이 모자라 견습생에도 들지 못한 주제에 꼴에 소가주라며 으스대는 모습이라니.”
“뭐요? 화산파와 종남파를 등에 업고도 흑무련에 처발리고 돌아온 주제에 감히 나를…….”
따악!
순간 뒤통수에 불이 난 당우기가 눈을 부릅뜨며 휙 돌아보았다.
“이런 썅! 뭐야? 이 개……!”
“이 새끼, 이거. 누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네놈 때문에 사천당가가 콩가루 집안처럼 보이잖냐?”
언제 다가온 것인지 당우기 뒤에서 팔짱을 낀 남궁천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당우기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너, 너 이 새끼…… 남궁천!”
“그래, 강호신룡 남궁천 님이시다.”
“네가 왜 끼어들어? 이 새끼야! 이젠 남의 집안 문제까지 간섭하는 거냐?”
“뭐 간섭할 생각은 없었는데, 보다 보니 너무 버릇이 없어서 그랬다.”
“오냐, 이 미친놈. 이젠 네놈이 미쳐 돌아서 남의 집에 들어와서 소가주에게 행패를 부리는구나. 저번에는 내가 방심해서 네놈에게 당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운은 통하지 않을 거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차앙!
당우기가 품에서 네 자루의 비수를 양손에 나눠쥐며 꺼내 들었다.
여차하면 출수하겠다는 의지가 두 눈에서 읽힌다.
내원 안마당에서 졸지에 소가주와 식객이 맞붙을 상황이 되자 당가의 무인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궁금하지도 않나 보네.”
“뭐가 이 새끼야?”
“내가 왜 너네 집에 와 있는지. 마치 날 보고도 내가 있을 줄 알았다는 듯 행동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남궁천의 지적에 당우기가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당우기가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다 무너져 가는 남궁가가 본 가를 방문한 이유가 뭐 있겠어? 뭐 좀 도와달라고 찾아왔겠지.”
“으음. 도와달라고 찾아온 건 맞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만…… 네 말은 여전히 싸가지가 없다.”
“그래서?”
“처맞아야지, 뭐.”
“미친새끼. 어디 해보시든가?”
구오오오오.
당우기의 전신에서 투기가 솟구쳐 올라온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당우기를 노려보았다.
‘그간 용을 쓰긴 했나 보구나.’
몸에 좋은 영단도 복용하고 내공 수련도 열심히 한 것인지 단전에서부터 솟구치는 기운의 질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혈맥을 따라 달리던 공력이 비수를 쥔 양손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문득 가주전 입구에서 묵직한 소리와 함께 당고륜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아, 아버지.”
당우기가 얼른 공력을 거둬들이고는 돌아서서 포권했다.
“소자, 아버지를 뵙습니다.”
“그래, 네가 왔구나. 한데 어찌 집에 돌아오자마자 말썽부터 부리느냐?”
“아버지, 그게 아니라 저 녀석이……!”
“갈! 남궁천 소가주는 본 가의 손님이다. 말을 함부로 뱉지 마라.”
“……예.”
당고륜의 부리부리한 눈을 마주한 당우기가 급기야 꼬리를 말며 대꾸했다.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다가가 당우기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 아버지께 손님 대하는 예절 좀 배워. 이래서야 겁나서 식객으로 머물기야 하겠어? 이 집은 죄다 손님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네.”
“남궁 소협. 자네도 우기를 그만 자극하게. 내 잘 타이를 터이니.”
“알겠습니다. 모쪼록 한없이 모자라고 부족한 녀석이지만 잘 지도 편달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끄음. 우기는 따라 들어오너라.”
“예, 아버지.”
당고륜이 돌아서자, 당우기가 고개를 돌려 남궁천에게 눈알을 부라렸다.
“어어? 지금 손님에게 눈깔을 부릅뜨…… 읍…….”
당우기가 얼른 남궁천의 입을 틀어막자, 당고륜이 이맛살을 구기고는 돌아보았다.
“뭐하고 있느냐?”
“아, 아닙니다. 제가 사과하고 있었습니다.”
“사과는 지랄…… 읍읍…….”
“하하. 남궁천,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마음에 내가 결례를 저지른 것 같다. 미안하다.”
당고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가주전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당우기도 남궁천을 놓아주었다.
“남궁천. 네가 본 가의 손님으로 온 이상 더 이상 건드리진 않으마. 그러니 너도 날 도발하지 마라.”
“애초에 도발한 적이 없는데?”
당우기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돌아섰다.
“됐다. 그 얘기는 관두지.”
당우기가 가주전으로 저벅저벅 들어가고 나자, 당예설이 입술을 꾹 씹었다.
‘아버지…… 역시 우기 앞에서 전 보이지도 않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