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당가에서 동상이몽
“어…… 음…… 이게 어떻게……?”
당고륜이 입을 헤 벌리고는 만신창이가 된 천독노를 내려다보았다.
구부정한 허리에 작달막한 노인.
죽립을 푹 눌러쓰고 있었지만 잠깐 고개를 들었을 때 슬쩍 보이는 얼굴은 분명…….
“왜 눈탱이가 밤탱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을 얼른 삼킨 당고륜이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소?”
“가는귀가 먹은 건가?”
“뭐요?”
당고륜이 눈썹을 꿈틀대자, 남궁천이 천독노의 어깨에 손을 척 올린다. 한데 천독노의 반응이 이상하다. 순간적으로 움찔거리면서 남궁천의 눈치를 힐끔 살피는 게 아닌가?
‘방금…… 쫄았어?’
남궁천이 히죽 웃으며 천독노에게 말했다.
“에이, 무슨 말씀을 그리 까칠하게 하세요? 당 가주님이 못 들었을 수도 있죠. 영감님, 다시 한번 말해주시죠?”
“끄응. 알았다.”
천독노가 못마땅한 듯 침음을 흘리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는…… 천독노라고 했소.”
“천독노…….”
당고륜이 멍하니 그 별호를 중얼거렸다.
정말로 천독노가 제 발로 찾아와?
소문을 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럼 그 잡서가 사실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순 없다.
당고륜은 천독노의 전신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남루한 옷차림이지만 작고 단단한 체구에서는 남다른 기백이 느껴졌다.
다만…….
‘왜 남궁천이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는 거야?’
천독노는 유난히 남궁천을 신경 쓰는 듯했다.
고개를 갸웃거린 당고륜이 나름의 예를 갖춰 물었다.
“정말 천독노 선배가 맞소?”
남궁천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천독노는 당고륜이 뜻밖에도 극진하게 대하자 기분이 좋아져서 입매를 비틀었다.
“그렇네. 귀하는 사천당가의 주인이신가?”
“그렇소.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천독노 선배를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
“흥! 반갑긴. 무림공적이라며 잡아 죽일 날만 벼르고 있었을 것을.”
천독노가 반사적으로 반응하자, 남궁천이 ‘쓰읍’ 하는 소리를 낸다.
그 바람에 다시 한번 어깨를 움츠린 천독노가 남궁천의 눈치를 슬쩍 본다.
‘도대체 이 둘의 관계가 뭔지…….’
하나 그것보다 급한 건 천독노가 벌건 대낮에 이렇게 찾아온 이유였다.
몰래 숨어서 쌍두오독만 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올 줄 누가 알았으랴?
“본 가를 그리 생각하시는 천독노 선배께서 이렇게 절 찾아온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소?”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쌍두오독을 구하는 중에 여기 당가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네. 해서 그걸 얻고자 하네.”
세상 당당한 태도다.
대충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말로 듣고 보니 어이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마치 쌍두오독을 맡겨 놓은 것처럼 말하다니.
‘어찌 됐건 그 잡서가 틀리지 않았던 거로구나.’
오늘부터라도 저잣거리의 잡서들을 찾아서 탐독을 해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천독노가 말을 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대놓고 찾아올 생각은 없었지. 쥐도 새도 모르게 쌍두오독만 노릴 생각이었네.”
당고륜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호기심이 일었다.
“한데 왜 그러지 않으셨소?”
“솔직히 오늘 밤에 잠입하려고 장원을 염탐하던 중, 놀랍게도 이 애송이 놈이…… 나를 알아보더군.”
‘남궁천이? 그런데 왜 애송이라고 부르면서 눈치를 보는 거야?’
당고륜의 시선을 받은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뭐랬습니까? 천독노 선배가 찾아올 거라고 말씀드렸죠?”
“하나 자네가 천독노 선배를 본 적도 없을 텐데 어찌 알아보았나?”
“아…… 그 책에 외모에 대한 묘사가 자세히 나와 있더라고요. 키는 난쟁이처럼 작은 데다 손이 험하고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해서 역겨운 외모라고요. 보세요, 딱이잖아요?”
“이익……!”
이번엔 천독노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역겹다니! 도대체 어떤 책에서 날 그따위로 써놨다는 거냐?”
“음…… 그게……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로운 잡놈들이었던가?”
당고륜이 눈살을 슬쩍 찌푸린다.
“어째 제목이 자꾸 바뀌는 것 같은데?”
“그런가요? 아, 그건 용모파기에 관한 책이었거든요. 제가 워낙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읽다 보니. 하하!”
남궁천이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자, 천독노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이 애송이 놈이 나를 설득하더이다. 지금 사천당가가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다더군. 그리고 그 일을 도와주면 쌍두오독을 그냥 줄 수도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지 확인하러 왔소.”
“으음.”
당고륜이 침음을 흘리고는 천독노를 찬찬히 뜯어 살폈다.
확실히 전신에서 은은하게 풍겨지는 기운으로 보아서는 독을 능숙히 다루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독인은 독인을 알아보는 법.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독기가 본 가와는 결이 다르구나.’
확실히 천마신단은 보통의 영단이나 독단과 다른 만큼 정과 사의 조화가 필요할지도 모를 일.
“재미있는 일을 꾸민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고 있소?”
“알다마다. 마신단 제조가 아닌가?”
천독노가 태연하게 대꾸하자, 당고륜은 괜히 주변을 한 차례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마신단의 제조 방식이 워낙 독특하여 본 가가 어려움을 겪는 중이오. 선배께서는 본 가를 도울 수 있겠소?”
“물론이지. 본좌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독은 없으니.”
천독노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사천당가 앞에서 이런 말을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당고륜이 그런 천독노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묻지 않소?”
“응? 뭘?”
“본 가가 어째서 마신단을 제조하는 건지.”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나는 쌍두오독만 가지면 되니까. 자네들이 마신단을 만들든, 천마를 위해 제단을 세우든 조금도 관심이 없어. 대신 일이 다 끝나면 쌍두오독만 주면 돼.”
“쌍두오독을 왜 원하는 거요?”
“독인이 독을 원하는데 이유가 있나? 게다가 나도 호기심을 가지지 않듯, 자네도 내게 호기심을 거두는 게 서로 좋을 것 같은데?”
“흐음. 좋소. 마신단을 제조할 수만 있다면 쌍두오독을 내어 드리리다.”
“부디 그 말 지키길 바라겠네.”
천독노가 씨익 웃으며 당고륜을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그렇게 한참이나 허공에서 엉겨 붙었다.
* * *
천독노가 별당의 전각으로 안내받는 것을 본 남궁천은 걸음을 돌려 지객당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가주전 모퉁이를 막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쉬쉬이잇!
돌연 파공성이 일어나면서 비수 두 자루가 매섭게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얼른 몸을 팽이처럼 회전한 남궁천이 손을 뻗어 날아들던 비수를 낚아챘다.
파바밧!
하지만 느닷없는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모퉁이 너머에서 튀어나오더니 두 손을 하늘로 활짝 펼쳤다.
촤촤촤촤촤아악!
새카만 침들이 노을빛을 받아 번쩍이며 우수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남궁천이 얼른 보법을 밟으며 물러나면서도 재빨리 벽라검을 뽑아들었다.
티티티티티티이잉!
검신에 튕겨 나가는 세침 소리가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늘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면 마치 검은 꽃봉오리가 터지면서 만개하는 것처럼 보이리라. 그리고 만개한 흑화의 중심으로 날아드는 이가 있었으니.
쒸이익!
당예설이 손을 뿌리자 단검 세 자루가 다시 남궁천에게 날아들었다.
따다당!
벽라검으로 단검을 튕겨내자 마침내 지척까지 다다른 당예설이 기합성과 함께 일장을 내질렀다.
“하아앗!”
쉬퍼어어엉!
남궁천의 왼손과 당예설의 오른손이 정확히 부딪치며 폭음 같은 소리가 울렸다. 가주전의 기왓장이 다르르르 떨어댄다.
당예설이 봉목을 부릅뜨며 물러났다.
파바밧!
오른손부터 어깨까지 통째로 욱신거린다.
‘내력이…….’
일전에 보았을 때보다도 더 강해진 느낌이다. 사람이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게 가능한 걸까?
분명 기척을 최대한 숨기고 급습을 한 것인데 이처럼 능숙하게 막아내다니.
약관도 되지 않은 생도가 이만한 임기응변이 가능하다고?
‘확실히 재미있는 녀석이야.’
당예설이 희미한 웃음을 짓는데, 남궁천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그래. 놀라지도 않는구나.”
“놀랐는데요? 다짜고짜 이렇게 죽자고 달려드는데 어떻게 안 놀라겠어요?”
당예설이 피식 웃었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남궁천은 더 대단한 녀석이란 말이지 않은가?
놀랐음에도 그걸 들키지 않을 정도의 노련함과 재빠른 임기응변이라니.
“확실히 넌 남다르구나. 내가 찍어 놓은 아이다워.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니까.”
“어…… 저 찍어두셨어요? 그러지 마세요. 저 찍히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역시 재미있다니까.”
당예설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옆단이 길게 찢어져 있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매끄럽고 곧게 뻗은 다리가 아찔하게 드러났다.
남궁천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으음. 그쯤에서 멈추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왜? 내가 무섭니?”
당예설이 눈매를 휘며 묻자, 남궁천이 입매를 틀었다.
“무섭죠. 아름다운 꽃은 가시를 품고 있으니까요.”
“후훗. 제법 입에 발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네, 그러니까 거기서 멈춰 주시죠. 지금 은은하게 풍기는 이 달콤한 향기는 독이겠죠?”
“눈치도 빠른 녀석. 하나 걱정하지 마. 잠시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정도일 뿐이니까.”
“아, 걱정은 안 해요. 피독주를 복용한지 얼마 안 돼서요. 당가에서 준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제게 하실 말씀은?”
“궁금한 게 있어.”
당예설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운 채 정색하며 대꾸했다.
남궁천이 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뭔데요?”
“넌 여기에 왜 온 거지? 이곳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그걸 제가 단주님께 말씀드릴 이유가 있을까요?”
뜻밖의 대답에 당예설이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당돌해. 마음에 든다니까.”
“죄송하지만 연상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그게 무슨 상관일까?”
“예?”
남궁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이, 당예설이 가까이 다가가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남궁천의 턱을 쓸어 올렸다.
당예설의 깊고 맑은 눈동자가 남궁천을 빤히 보았다.
“내가 널 마음에 들어 하는데.”
아니,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래?
남궁천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며 한 걸음 물러났다.
“이거…… 추행입니다. 자꾸 이러시면 당 가주님께 정식으로…….”
“나랑 혼인하자.”
“예, 정식으로 혼인 제안을 할 겁니…… 예에에엑?”
남궁천이 비명처럼 소리치는데, 당예설이 다시 한번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랑 혼인하자.”
아니,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정색하며 하는 거야? 무섭게!
남궁천이 입을 딱 벌린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 아니, 장인어른! 도와주세요! 제 앞에 미친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