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당가에서 동상이몽
천독노가 눈을 부라리고는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와 근데 손이 되게 특이하시네요. 뭔가 막 울룩불룩하고 화상 자국에다…….”
“시, 시끄럽다! 무례한 녀석 같으니라고!”
천독노가 얼른 손을 소매로 집어넣으며 날카롭게 따졌다.
도대체 이 귀찮은 녀석은 왜 자신을 이리 물고 늘어지는지.
그러면서도 천독노는 죽립을 깊이 눌러써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괜히 서로 안면을 익혀봐야 좋을 게 없기에.
하지만 이미 전생에 천독노를 만나서 알고 있던 남궁천은 일부러 더욱 이리저리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우선 저와 함께 들어가시지요.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됐다! 앞으로 길을 똑바로 보고 걸어 다녀라!”
천독노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뱉고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한데 남궁천이 불쑥 손을 뻗어 천독노의 팔을 붙드는 게 아닌가?
‘이놈이……?’
천독노가 눈을 부릅뜨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우선 자신의 팔을 낚아챘다는 사실에 먼저 놀랐다.
‘감히 내 팔을 잡아?’
강호신룡으로 자자하더니 확실히 한가락이 있는 녀석인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듯 자신을 막아설 배짱도 능력도 없을 테니.
“뭐 하는 짓이냐?”
천독노가 잔득 화난 표정으로 팔을 뿌리치자, 남궁천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혹시 다치셨을 수도 있잖아요. 이대로 그냥 가셨다가 나중에 탈골이 됐느니, 뼈가 부러졌다느니 하면서 또 보상금 요구하지 마시구요. 같이 가서 진찰 한 번 받아보시죠?”
아니, 이 끈질긴 미친놈이……!
천독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버럭 소리 질렀다.
“일없다니까! 다친 곳 없으니 더 이상 날 막지 마라!”
“어…… 그럼 안 되는데…….”
“안 되긴 뭐가 안 돼?”
“같이 가셔야 하는데…….”
“아니, 뭔……! 에휴, 됐다. 네 성의는 이제 알았으니까 그만 귀찮게 하거라.”
“그러지 마시고 같이 가시죠? 잘 치료해 드릴 테니까.”
“아, 글쎄! 필요 없다니까!”
“어…… 그럼 더 처맞아야 하나?”
“뭐 인마?”
천독노는 이제 넋이 나간 표정이 되어서 남궁천을 보았다. 얼굴이 팔리는 것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아니, 어디서 뭐 이런 미친놈이 나타나서 귀찮게 하는 거지?
남궁천이 헤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알쏭달쏭할 때는 확실히 해두는 게 좋잖아요.”
‘그러니까 뭘? 뭘 확실하게 해두자는 건데?’
남궁천이 어딘지 서늘한 미소를 짓더니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가온다. 천독노가 본능적으로 물러나며 손을 뻗었다.
‘어어? 이 새끼 뭐야? 거기 안 서? 오지 마, 인마!’
남궁천이 목을 우두둑 꺾는다.
“살살 해드릴게.”
그러니까 뭘 인마!
“어렵게 돌아가지 마시고 이리 오세요.”
“저, 저리 가라! 이 미친놈이 왜 이래? 정말!”
“거참, 치료 잘 해드린다니까. 우선 조용한 곳으로 가서…….”
휙!
순간 남궁천의 손이 빛살처럼 날아든다.
‘어림없다, 이놈아!’
찰나지간 금나술의 술법을 눈치챈 천독노가 재빨리 몸을 빙글 돌리면서 피했다.
허공을 움켜쥔 남궁천이 어딘지 광기 서린 미소까지 지으며 읊조린다.
“정말로 안 다쳤네.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새끼, 도대체 정체가 뭐야? 뭔가 무서…….’
천독노가 무심결에 떠올린 생각을 떨치느라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는 다시금 날아드는 손바닥을 보면서 이화접목의 술법으로 손목을 낚아채 얼른 꺾었다.
파밧!
하지만 호락호락 당할 남궁천이 아니었다.
휘리릭!
잽싸게 몸을 팽이처럼 회전한 남궁천이 이번에는 발을 뻗으면서 천독노의 앞길을 막았다.
턱!
순간 발목이 걸린 천독노가 바닥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얼른 균형을 잡으며 몸을 회전했다.
파바밧!
천독노가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보법을 밟으면서 남궁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애송아, 네놈이 나를 가지고 놀려고 하는구나! 하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가지고 놀기는요. 상처를 치료해드리려는 거죠.”
“필요 없다지 않느냐!”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러지요.”
“아니, 뭐 이리 말도 안 통하는 놈이……!”
타다다닷!
순식간에 수차례의 공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잠시 거리를 두고 훌쩍 물러나면서 숨을 골랐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천독노, 여전하네.’
독에 있어서 사파 제일 괴짜라고 불리는 천독노.
그가 무림공적이면서 아직도 잡히지 않은 것은 무공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오늘 이렇게 오랜만에 손을 섞으니 다시 한번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편 천독노는 어깨를 들먹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뭔 놈의 애새끼가 이렇게 말이 안 통해서야……!’
사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범상치 않은 무공 실력이다.
강호신룡이라는 별호가 붙었다지만, 늘 그렇듯 별호에는 과장이 더해지기 마련이다.
한데 이 새파란 녀석은 확실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실력이지 않은가?
자신은 벌써 지쳐 어깨를 들먹이는데, 눈앞의 녀석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제길, 나도 많이 늙었군!’
하지만…….
“애송아, 네놈이 한가락 한다고 해서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네.”
“엉?”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허! 맹랑한 놈이로고. 하나 객기와 용기를 구분하지 못하면 이 비정한 강호에서 살아남기 힘든 법. 잠시 후 너는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할 게다.”
“에이, 그럴 리가요. 이렇게 몸이 멀쩡한…… 헉! 크읍!”
남궁천이 돌연 목을 쥐고는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숨, 숨이……!”
“클클클. 이제야 알았느냐?”
비틀……!
이윽고 남궁천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천독노가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다행히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두 사람을 눈여겨보는 이는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남궁천이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을 붙들려고 애쓰면서 간신히 목소리를 흘려냈다.
“대체 언제 하독을…….”
“너는 곧 의식을 잃을 것이야. 그나마 다행이라면 네놈이 당가의 식객이라는 것이지. 누군가 널 발견하고 당가로 옮긴다면 해독제를 구해서 살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영원히 깨지 못할 게다.”
“그런…….”
“그러게 왜 이 늙은이의 앞길을 가로막고 지랄을 떨었느냐? 점잖게 말을 할 때 들었어야지. 미친놈.”
“아아…… 쓰러질 것 같아…….”
“푹 자거라. 한숨 푹 자고 일어날 수 있길 기도하마.”
“어지러워…….”
“그럼 나는 이만 가마.”
천독노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천천히 걸음을 멈춘 천독노.
그가 뻣뻣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저 새끼…… 왜 안 쓰러져?’
남궁천은 여전히 비척거리면서 천독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뼈마디 관절이 제멋대로 꺾이듯이 걸어오니 뭔가 죽은 자가 걷는 것처럼 느껴져 등골이 오싹했다.
“뭐, 뭐야? 너!”
“아아…… 어지러워…….”
“그럼 쓰러져야지!”
“쓰러질 것 같아…….”
“그러니까 쓰러지라고!”
“숨, 숨이 너무…… 잘 쉬어지네?”
“뭐?”
천독노가 눈을 동그랗게 뜨니, 남궁천이 곧 멀쩡한 표정으로 돌아와 히죽 웃는 게 아닌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대던 걸음은 어느새 완전히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뭐야? 이 새끼는…….
천독노가 돌처럼 굳어 있는데, 저벅저벅 걸어온 남궁천이 천독노 어깨에 손을 척 걸쳤다.
“어이, 영감.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나 좀 하시죠?”
“너…… 도대체……?”
“에이, 그래도 사천당가 식객인데 피독주(避毒珠) 정도는 입에 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또 뭔 개소리야?
천독노가 얼어붙은 것처럼 입만 딱 벌리고 있자, 남궁천이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만 가자고. 사람들 꼬이기 전에. 어차피 쌍두오독이 필요해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거잖아? 천독노.”
“……!”
* * *
“크으……! 좋다!”
술을 한잔 들이켠 남궁천이 몸을 부르르 떨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맞은편에 앉은 천독노가 시종 냉랭한 얼굴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네놈 정체가 뭐냐?”
“거, 몇 번을 말해야 해요? 남궁세가 소가주 남궁천이라니까. 강호신룡. 그게 납니다.”
“별호를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는군.”
“그럼! 아주 자랑스럽고말고. 천하대살성보단 낫잖소?”
“뭐? 갑자기 무슨 대살성 같은 소리를 가만…….”
말을 꺼내던 천독노가 눈살을 구기고는 남궁천을 찬찬히 뜯어 살폈다. 그가 이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오호라, 네놈이 대살성의 사생아 놈이로구나! 그러고 보니 남궁세가에 그 녀석 사생아가 있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 허! 한데 소가주가 됐다고? 남궁세가도 배짱 한번 두둑하군.”
“빤히 함정인 줄 알면서 사천당가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영감도 배짱은 두둑하지.”
“고놈, 주둥아리가 제법 여물었구나. 핏줄이 무섭긴 무섭군. 마치 네 아비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으니. 뭐, 얼굴은 네 아비보다 낫구나.”
“아니, 내 얼굴이 어때서?”
“네 얼굴이 낫다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 아니, 우리 아버지 얼굴이 어때서!”
“됐고. 어디 씨불여 보아라. 날 어찌 알아보았느냐?”
“아…… 그게 말이죠.”
남궁천이 술잔을 다시 한번 입에 털어 넣더니 육전을 입에 넣고 쩝쩝 씹으며 말을 이었다.
“꿈에서 아버지가 나타났죠. 그러더니 이렇게 생긴 천독노가 곧 나타날 테니 인연을 쌓거라, 하고 말을 하시더라고요.”
“별 미친 소리를 다 들어보겠군.”
“뭐, 그게 아니면 내가 어떻게 영감을 알아보겠어요?”
“흐음. 됐고. 그래서 할 말이 무엇이냐? 아니, 혹시 쌍두오독 정보를 흘려서 날 꾀어낸 게 네놈이냐?”
“오, 바로 아시네. 맞아요. 저예요.”
“왜 날 찾는 거지? 남궁세가가 사천당가에서 본좌를 노리는 이유가 뭐냐?”
“협조를 요청하려고요.”
“협조?”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전했다. 역시나 ‘마신단’이라는 명칭이 나오자마자 천독노는 눈을 부릅뜨고는 대경실색을 했다.
대략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천독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군. 클클. 사천당가가 마신단을 제조한다라.”
“어때요? 도와주면 쌍두오독을 공짜로 주겠답니다.”
“말은 바로 해야지. 공짜가 아니라 도와준 대가라고.”
“예, 뭐 어쨌든.”
“흐음. 확실히 흥미로운 제안이로군. 하나 인간이란 본디 측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심정이 다른 법. 거기에 더해 무인이란 바지 풀 때와 바지 끌어 올릴 때부터 달라지는 법이다. 내 당가와 너를 어찌 믿느냐?”
“당가는 믿을 수 없겠죠. 하지만 난 믿어도 돼요. 내가 책임지고 빼내 줄 테니까.”
“클클. 그 말은 마치 당가가 일이 끝나면 날 사로잡을 거라는 걸 자백하는 것만 같구나.”
“맞아요. 당가는 그럴 계획이니까.”
“으응?”
뭐야, 이놈? 그걸 인정한다고?
남궁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천독노에게 말했다.
“봐요? 엄청 솔직하죠? 그러니 믿으시죠?”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느냐!”
“에이, 좋게 좋게 갑시다. 괜히 처맞고 질질 짜면서 끌려가지 말고. 당당하게. 응? 그게 보기도 좋잖아.”
“이런 미친…… 헉.”
발끈하던 천독노가 순간 헛바람을 삼키고는 움찔 떨었다.
남궁천의 전신에서 진득하게 풍겨나오는 기운.
이 사이한 기운이 남궁세가의 소가주라고?
천만에……!
‘이건 마치 그놈의……!’
남궁천이 서늘한 웃음을 그렸다.
“어떻게? 그럼 처맞으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