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당가에서 동상이몽
“자네 말대로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대 사천당가가 무림공적과 손을 잡고 마신단을 제조하라는 뜻이 아닌가?”
당고륜은 스스로 말을 꺼내면서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했다간 사천당가의 명성이 바닥으로 추락하다 못해 자칫 백도의 배신자라는 낙인마저 찍힐 수 있었다.
천하대살성과 엮인 남궁세가가 얼마나 급격히 몰락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강호 무림이 한통속이 되어서 외면하면 방법이 없어진다.
부자가 망하면 삼 대를 가지만, 강호세가가 낙인찍히면 멸문을 피하기 어렵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한데 무림공적인 천독노와 손을 잡아?
게다가 천독노는 독을 다루는 흑도인인만큼 당가와 묘한 대립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정말로 천독노가 찾아온다고 해도 선뜻 손을 잡는다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 망설임을 읽은 남궁천이 태연하게 말했다.
“오히려 잘된 걸 수도 있죠.”
“뭐가 말인가?”
“천독노는 무림공적이에요. 이 기회에 천독노를 꾀어내어 마신단을 제조하고 무림공적도 사로잡는 성과를 올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에이, 겉과 속이 다른 건 당가가 전문이시면서.”
남궁천이 농담처럼 던진 말에 당고륜이 슬쩍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남궁천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확실히…… 무림공적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면…….’
어차피 마신단을 제조하라는 것은 맹주의 특명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대로 제조를 할 수 없어도 문제다.
남궁천이 넌지시 말을 이었다.
“무림공적과 손을 잡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천독노를 이용한다고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오히려 세간에서 박수를 치지 않을까요?”
“하나 천독노가 그리 순진하게 속겠는가?”
“속지 않을 수도 있죠. 하지만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 거예요. 천독노는 쌍두오독을 엄청 갖고 싶어 하니까요.”
“자네,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는 잡서를 너무 맹신하는 게 아닌가? 제목도 이상한 것 같던데…….”
“믿어서 손해 볼 건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제목이 어때서요? ‘미친놈들이 만든 무림의 독’이 얼마나 인기인데요?”
“으음? 아까랑 제목이 좀 다른 것 같네만.”
“예? 뭐, 제가 워낙 이런저런 잡서를 많이 읽다 보니. 하하하.”
“흐음. 어쨌거나 천독노가 찾아와준다면 방법이 생길 수도 있겠군. 남궁검 가주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나도 소가주와 뜻이 같소. 귀 가가 천독노를 잘 이용한 다음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아니겠소?”
확실히 그렇긴 하다.
당고륜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면 천독노 유인 작전을 한 번 시행해 보지요. 자네가 읽은 그 잡서가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네.”
당연히 도움이 되지.
천독노를 내가 잘 아는데.
남궁천이 속내를 갈무리하며 씨익 웃었다.
“효과가 있을 겁니다. 좋은 책이니까요.”
* * *
사천당가가 최근 수집한 약초와 독에 대한 정보가 암암리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사천당가에서 천독노를 유인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퍼뜨린 소문이었다.
하지만 천독노보다 더 빨리 사천당가를 찾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섬서에서 패전하여 가문으로 곧장 복귀한 당예설이었다.
한편 당고륜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복귀한 당예설을 냉랭한 태도로 맞이했다.
“패전 소식은 일찍이 전해 들었다.”
얼음장 같은 당고륜의 태도에 당예설이 입술을 꾹 씹고는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내게 죄송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죽은 수하들의 유가족에게 죄송할 일이지.”
“…….”
“맹주께서 본 가에 잠시 머물다가 떠나셨다. 너는 출가외인인 만큼 본 가에 책임을 묻지 않으시더구나.”
“……!”
당예설이 다시 한번 어금니를 뿌득 깨물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또 한 번 자신을 차기 가주 자리에서 밀어내신 거다.
그동안에는 여자라는 이유가 걸렸는데, 이번에는 패전 무인이 되었으니, 적절한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
이쯤 되자 당예설도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다행이군요. 덜떨어진 동생과 같은 가문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영 신경 쓰였는데요.”
“설아…….”
“됐습니다. 어차피 출가외인이 한 말일 뿐입니다. 가장에서는 잠시 머물다 곧 떠나겠습니다.”
“설아.”
“…….”
“내 너의 능력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이 아비가 널 가주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으로 보이느냐?”
“아닌가요?”
“당 가주가 네게 무엇이냐? 고작 당 가주로 너는 만족하겠다는 것이냐?”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
“너는 적랑단주다. 아주 어린 나이에 맹의 요직을 맡았지. 그만큼 재능이 출중하다. 한데 어째서 너는 본 가에만 시선을 두느냐? 내 너를 모질게 대하는 것이 정녕 여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란 건가요?”
“답답하구나. 너는 사천이라는 우물에서 놀 아이가 아니다. 그래, 너에게 당가는 좁다. 사천도 좁다. 너는 강호에서 놀아야 할 아이란 말이다.”
“……!”
당예설이 봉목을 부릅뜨자, 당고륜이 야트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서부터 너를 강인하게 키우고자 모진 말을 많이 한 게 오히려 오해를 쌓게 한 모양이구나.”
“믿을 수 없네요.”
“정녕 이 아비의 뜻을 모른 척할 셈…….”
“모른 척이라고요? 어떻게 이게 ‘척’으로 보일 수 있죠? 아버지는 언제나 동생을 더 챙기셨죠! 늘 동생을 앞세웠고요! 저는 뒷전이었어요. 우기에게는 항상 차기 가주가 될 것이라고 언질하면서도 저에게는 뭐라고 하셨나요? 동생이 가주가 되면 잘 도와주라는 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랐다고요! 우기에게 한 것처럼 제게 칭찬 한 번이라도 하신 적이 있나요?”
“설아……!”
“죄송합니다. 제가 패전의 울분을 괜히 가주님 앞에서 터뜨린 것 같습니다.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피곤하네요.”
“내 말 끝나지 않았다.”
“하실 말씀 있으면 짧게 부탁드립니다.”
당예설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당고륜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 일만큼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지만, 이리도 소통이 힘들 줄이야.
세상에서 가장 가꿔야 할 부모자식간이 어찌 보면 가장 먼 거리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주 앉은 딸과 자신 사이로 애증의 강이 도도하게 흐르는 것만 같다.
“남궁가가 여기 와 있다.”
“알고 있습니다. 들어오면서 보았습니다.”
“이유는 묻지 않는 것이냐?”
“물으면 알려주실 건가요?”
“당연하다. 너는 적랑단주가 아니더냐? 맹과 관련되어 있으니 알아야겠지.”
당예설이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렇죠. 저는 적랑단주죠. 말씀하시죠.”
“남궁가에서 본 가에 마신단을 제조해달라고 의뢰했다.”
“마신단을……!”
이번만큼은 당예설도 놀랐는지 흠칫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당고륜이 그 예쁜 얼굴을 마주 보며 그간의 사정을 담담하게 전했다.
시시각가 표정이 변하던 당예설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당연히 맹주님의 뜻에 따를 생각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적랑단주인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테지.”
“그렇군요.”
“맹주께서는 마신단이 만들어지면 너에게 전해주라고 하셨다. 너는 그걸 들고 맹으로 복귀하면 될 것이다.”
“알겠어요. 그때까지는 남궁가의 이목을 속여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지.”
당예설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푹 쉬어라.”
당예설이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서서 나가려고 하자, 당고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설아.”
“…….”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런 목소리…… 이젠 속지 않을 거예요.
당예설이 아무런 반응 없이 그대로 가주전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당고륜의 긴 한숨만이 실내를 채웠다.
* * *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간.
티잉…… 탁. 티잉…… 탁.
객잔 창가에 걸터앉은 노인이 철전을 손가락으로 튕겼다가 잡길 반복했다.
얼굴에 곰보 자국이 가득하고 검버섯이 보기 싫게 핀 노인이었다. 손등에도 온갖 화상 자국과 자잘한 상처가 가득하다.
노인은 철전을 튕기면서도 저만치 당가 장원을 빤히 응시했다.
“클클클. 재미있구먼. 재미있어.”
티잉…… 탁!
마침내 철전을 낚아챈 그가 주머니에 쑤셔 넣더니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파고는 훅 불었다.
“감히 본좌를 낚아보시겠다고? 이 천독노를 말이지?”
히죽 웃는 노인의 입술 사이로 누런 이가 훤히 드러났다.
묘하게도 그의 혓바닥은 검정빛이 돌고 있었기에 언뜻 보면 굉장히 기괴한 외모라고 할 수 있었다.
천독노는 침상에 올려둔 죽립을 쓰고는 침실을 빠져나가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나저나 내가 쌍두오독을 노린다는 걸 어찌 알았을꼬?’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더구나 백도 무인들은 절대 알 수 없다.
한데 사천당가는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사실 그가 사천 성도에 온 건 벌써 한 달 전이었다.
쌍두오독을 찾기 위해서였다.
평생을 쌍두오독만 찾으러 다녔는데, 마침 사천당가가 세상의 모든 진귀한 약초와 독을 모으는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해서 쌍두오독도 있을까 싶어 이곳에 왔다. 은밀하게 조사한 결과 사천당가에 쌍두오독이 있다는 사실을 어렵게 알아냈다.
그렇게 사천당가에 잠입할 기회만 찾고 있었는데…….
‘이것들이 갑자기 쌍두오독 정보를 고의적으로 흘리네. 클클.’
며칠 전부터 갑자기 사천당가에 쌍두오독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당가가 어떤 곳인가?
기밀은 그 어느 곳보다 철저하게 유지하는 곳이다.
한데 그런 소문이 퍼진다고?
필시 고의적으로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냄새가 난다. 뭔가 구린 냄새가.
무림공적으로 여태 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자의 예리한 육감이라고 해도 좋다.
이건 필시 자신을 낚기 위한 함정이리라.
마치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 소문이 퍼지고 나서 사흘 후부터 번을 서는 무인들이 줄어들었다.
소문이 퍼졌는데 오히려 번을 서는 무인들은 줄었다.
‘이 개 같은 것들이 누굴 병신으로 아나?’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리 초대를 하는데 마냥 모른 척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터.
‘방문해 주지. 도대체 당가가 왜 갑자기 날 부르는지도 궁금하고 말이야.’
천독노가 당가의 높은 담벼락을 따라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 밤 방문을 위한 마지막 점검이었다.
일부러 허술한 부분과 진짜 허술한 부분을 적당히 찾아냈다.
그렇게 사천당가를 대략 한 바퀴 돌았을 때였다.
툭.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쳐 돌아보자, 웬 새파란 애송이가 헤실헤실 웃으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이건 뭐야? 음? 이 새끼는 분명 당가의 식객인 남궁세가 소가주.
천독노의 시선을 받은 남궁천이 히죽 웃으며 사죄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너무 작으셔서 못 봤어요. 그러게 키 좀 크시지.”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