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57화 (256/508)

257. 당가에서 동상이몽

묵천악은 미간을 푹 구긴 채로 생각에 잠겼다.

모두가 그를 보고 있었다.

상황을 놓고 보면 당연히 자신이 맹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묵천악이 고개를 들어 헤실헤실 웃고 있는 남궁천을 보았다.

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제 아비도 생각보다 속을 썩였는데, 그 아들놈도 만만치가 않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저놈을 두고 맹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라.’

복잡한 시선으로 다시 당고륜을 돌아보았다.

당고륜의 표정은 담담했다.

‘당 가주는 쉽게 속을 알 수 없는 자지.’

자신과 먼저 대화를 했지만, 진짜 속내는 어떤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만약 자신이 이곳을 떠난 후, 남궁천이 당 가주와 밀담을 나눈다면 또 결과가 어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흑무련이 북쪽을 다 장악한 이 시점에 당가에 머물 수도 없는 노릇.

그때 남궁천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맹주님은 당가에 왜 오신 거죠?”

“그건…… 별일 아닐세. 흑무련이 심상치 않으니 앞으로 당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온 것일세.”

“그렇군요. 하긴 맹주님이 정말로 도둑고양이는 아닐 테니 그런 이유겠네요.”

“자네는 말을 참 재미있게 하는군.”

“엇. 그런가요? 이 각박한 세상에 제 말 몇 마디로 재미를 느끼셨다면 다행입니다.”

“역시 재미있어. 하나 조심하게. 이 강호에서는 실없는 농 한마디에 오해가 생기고, 사사로운 오해 하나로 목숨이 오가니 말일세.”

“명심하지요.”

남궁천이 입매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검과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하면 두 사람은 잠시 자리를 비워주시겠소? 당 가주와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자 이번엔 남궁천이 씨익 웃더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얘기인데요?”

“당 가주와 함께 강호 중대사를 논하려는…….”

“그럼 뭐 어때요? 같이 얘기하죠. 강호 중대사라면 역시 머리가 많을수록 묘안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과는 완전히 반대된 상황.

남궁천이 팔짱을 끼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떠냐? 이 영감탱아! 어제 내 기분을 알겠냐?’

묵천악이 눈살을 찌푸리며 짐짓 엄한 투로 일렀다.

“소가주. 어른들끼리 할 얘기일세. 자네가 끼어들기에는 아직…….”

“아, 그렇군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겠습니다. 할아버지, 마저 대화 나누고 오세요.”

“그러마.”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자 묵천악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 남궁검의 성격이 남궁천을 닮아가는 느낌이다.

상황이 이리되자 당고륜도 애매한 표정이 되어서는 남궁검을 말렸다.

“남궁 가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맹주님께서 제게만 긴히 하실 얘기가 있으신 것 같으니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명백한 축객령이다.

남궁검이 짐짓 기분이 상한 듯 눈살을 찌푸리자, 당고륜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혹여나 본 가의 기밀 사항이 나올 수도 있는 문제니까요.”

“흐음. 당가의 기밀까지 맹과 공유하고 있었소? 하면 그게 정말 기밀이라 할 순 있소?”

남궁검이 매섭게 몰아붙이자, 이번엔 남궁천이 거기에 한 술 더 떴다.

“혹시 두 분의 대화에 본 가가 끼어들면 절대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걸까요?”

“하하. 그런 이야기가 뭐가 있겠나?”

“뭐, 그거야 알 수 없죠.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니까요.”

“이거 괜한 오해를 산 것 같군. 그런 일은 없을 걸세.”

당고륜이 동의를 구하듯 맹주를 돌아보았다.

묵천악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본 맹이 흑무련과 관련하여 세운 작전이 있소. 이는 기밀 사항인데 당가의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오. 그러니 두 분은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주시면 고맙겠소. 보안이 중요한 문제라.”

이쯤 되자 남궁검도 더 이상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정 그렇다면 비켜 드리지요. 그만 가자, 천아.”

“예, 할아버지.”

두 사람이 가주전을 빠져나가자 그제야 당고륜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나 묵천악은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지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궁천, 저 아이는 영악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로군.”

“흐음. 맹주께서는 정말로 남궁세가와 마교가 손을 잡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당 가주도 날 의심하는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마교가 왜 하필 남궁세가를 선택했는지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 더구나 마신단을 제조하기 위해 남궁가를 선택한 게…….”

“남궁가야말로 지금 남은 게 없지 않소? 게다가 남궁가는 본 맹에 어느 정도 원망이 있소. 마교가 노리기엔 가장 좋은 먹잇감이지. 한데 그 정보가 흑도인들 귀에 들어가서 이번에 그 사달이 난 거고.”

“그게 천뇌당의 분석이군요.”

“그렇소.”

“이해했습니다.”

“하니 절대로 마신단이 그들의 손에 들어가서는 아니 될 것이오. 그건 곧 마교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니. 마교가 부활한다면 가장 위험해지는 곳이 바로 이곳 사천 아니겠소?”

당고륜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다.

마교의 본산은 서장 가까운 곳에 있기에 놈들이 출몰하면 항상 사천이 제일 먼저 위험에 빠지곤 했다.

물론 사천만 해도 청성파와 아미파 등 쟁쟁한 문파들이 있으니 호락호락 당하진 않겠지만, 주의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내 상황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이 맹으로 돌아가지만, 당 가주를 믿는 마음이 크다는 걸 알아주시오.”

“알겠습니다, 맹주님.”

당고륜이 무거운 마음을 접으며 대꾸했다.

묵천악은 그러고도 잠시 머물면서 뭐라고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쉬이 떨어지지 않는 발길.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겨놓고 떠나는 기분이 이럴까?

그래도 불안한 것인지 묵천악이 당고륜의 손을 잡았다.

“잘 부탁드리겠소, 당 가주.”

“염려 마십시오.”

당고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묵천악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 가주만 믿고 떠날 수는 없지. 차선책을 대비하길 잘했어.’

* * *

다음 날 맹주가 맹으로 돌아가자 남궁천은 조금 더 느긋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다.

생선을 노리는 도둑고양이가 사라졌으니 일단은 안심이었다. 매일같이 이독당을 살피러 가는 일도 없었다.

당고륜을 찾아가서 굳이 맹주 사이를 이간질하지도 않았다.

원래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하는 법.

적절한 시기를 봐가면서 손을 쓰면 될 터였다.

그렇게 비교적 한가로운 나날이 흘렀다.

낮에는 당가 무인들과 허심탄회하게 어울리며 함께 수련을 하기도 하고, 대련도 했다.

강호신룡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남궁천은 당가 무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다만 다른 문파의 수련을 지켜보는 것은 실례가 되는 행동인 만큼 정식 수련 시간에는 일부러 사천성도 일대를 산책하곤 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운기조식을 통해 창벽공을 더욱 단단하게 다져갔다.

마신단의 기운을 온전하게 흡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창벽공의 성취가 중요했으니까.

그렇게 꼬박 닷새가 지났을 때였다.

당고륜이 남궁천과 남궁검을 가주전으로 불렀다.

두 사람이 가보니 당고륜이 난감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고민에 잠겨 있었다.

“무슨 일이죠?”

“다소 문제가 생겼네.”

“무슨 문제입니까?”

“아무래도 이대론 마신단을 제조하기가 어려울 것 같네.”

뜻밖의 대답에 남궁천과 남궁검을 마주 보았다.

‘벌써 마신단을 만들고 빼돌린 건가?’

남궁천이 당고륜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유가 뭐죠?”

“이독당에서 재료가 될 영단들을 분석하는 것만 꼬박 사흘이 걸렸네. 자네도 알겠지만 약과 독에 관해서만큼은 본 가가 천하제일일세. 다만…….”

“다만?”

“주로 사파나 사이비 교에서만 유통되는 재료가 있는데, 이것들은 중원에서도 구하기 힘든 것들이라 본 가가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것들이지.”

“그래서요?”

“자네가 제공한 영단을 분석해 보니, 본 가에서 잘 알지 못하는 성분이 두어 개 정도 포함되어 있네. 문제는 이 성분의 비율과 조합 방식인데…….”

“그걸 알아내기 어려운 거군요.”

당고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이나 말투로 보아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게 아닌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남궁천이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당가가 천하의 온갖 약초를 다 쓸어 담는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럼 그 성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신 것 아닙니까?”

“자네 말대로야. 그동안 본 가가 구한 것들만 해도 희귀한 것들 천지일세. 온연초(穩然草), 금란(金蘭), 무극담화(無極曇花), 빙청석밀(氷淸石蜜), 쌍두오독(雙頭蜈毒), 학령초(鶴靈草)…… 아무튼 이름 한 번 듣기 힘든 것들 천지일세.”

“그런데요?”

“이것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나?”

“……?”

“바로 자연산이라는 걸세. 당가가 구한 건 어디까지나 자연산일세. 하나 자네가 가져온 재료는 인공적으로 가공된 걸세. 당가만큼 독에 능한 사파 무인이나, 마교 놈들이 아닌 이상에야…….”

“흐음. 그렇군요.”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각에 잠겼다.

당고륜의 태도를 보니 이 또한 거짓말 같진 않았다.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까?”

“시간과 재료만 주어지면 언젠간 만들겠지. 하나 문제는 재료가 얼마 없다는 걸세. 이대로면 재료만 다 소진하고 정작 마신단을 만들지 못할 수도 있네.”

“그럼 안 되는데…….”

“뭔가 뾰족한 수가 없겠는가?”

“그걸 저한테 물어보셔도…….”

남궁천이 난색을 표하자 당고륜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당고륜이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이미 사람의 손을 거쳐 가공된 재료를 재조합하여 마신단을 만들려고 하니 그 특성과 성분을 명확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남궁천에게 알린 것에는 또 한 가지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로 남궁가가 마교와 손을 잡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만약 남궁가가 마교와 손을 잡았다면, 마인을 어떻게든 끌어들이지 않겠나?

당고륜이 눈매를 가다듬고는 다시 물었다.

“혹, 자네가 아는 사람 중 사술로 만든 영단에 대해 조예가 깊은 자가 없는가?”

“에이, 그런 사람은 없죠.”

“역시 그런가?”

당고륜이 안도와 아쉬움을 동시에 삼키는데, 남궁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천독노라면 좀 알 것 같긴 하네요.”

“천독노라.”

당고륜의 입가에 가소로운 미소가 스쳤다.

확실히 천독노는 흑도인 중에서도 독에 관해 빠삭하다고 알려진 자이긴 하다.

하나 당가에 견줄 위인은 되지 못한다. 뭐, 그 천독노는 또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하긴 천독노라면 본 가와 다른 독을 많이 다뤄봤을 테니 길을 찾을 수도 있겠지.’

당고륜이 속으로 생각하는데, 남궁천이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뭔가?”

“방금 말씀하신 재료들 중에 대가리 두 개가 어쩌고 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엉? 대가리 두 개……?”

“예! 그 쌍대가리! 오 뭐시기…… 뭐더라?”

“혹시…… 쌍두오독을 말하는 건가?”

“아, 맞아요! 그거요, 그거! 그게 대가리 두 개 달린 지네의 독이죠? 구하기 엄청 어려운 거죠?”

“그렇긴 한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걸 천독노가 무진장 가지고 싶어 했거든요! 만약 천독노가 아직도 그걸 찾아내지 못했다면…….”

“……?”

“당가가 쌍두오독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을 내시죠? 협조할 사람을 찾기 힘들면, 제 발로 찾아오게 만들면 되니까요.”

당고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겨우 그 정도로 천독노가 정말 본 가를 찾아오겠는가?”

“그 미친 영감탱이는 분명 그럴 겁니다. 제가 잘 알거든요.”

그러자 이번엔 남궁검과 당고륜이 동시에 눈살을 찌푸리며 같은 말을 꺼냈다.

“자네가 어찌 잘 아는가?”

“네가 어찌 잘 아느냐?”

“어…… 그게…….”

남궁천이 뒤통수를 긁다가 히죽 웃었다.

“천독노를 책으로 배웠습니다.”

“책으로……?”

“예. 저잣거리에서 파는 책을 주워다 읽었더니 그런 내용이 있더라고요. 제목이…… ‘이 시대의 미치광이 무인들’…… 이었던가?”

“도대체 무슨 책을 읽고 다니는 거냐? 게다가 그걸 믿을 수가 있는 거냐?”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해보시죠?”

남궁천의 말에 남궁검과 당고륜이 서로를 잠시 마주 보았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남궁천이 제안한 이 방식이 그렇게 빨리 통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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