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당가에서 동상이몽
다음 날부터 사천당가는 암암리에 마신단 제조에 돌입했다.
매일같이 독단을 제조하고 실험하는 곳이 당가였기에 마신단을 제조한다고 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좀처럼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당가에 이방인이 셋이나 머물고 있으니, 그게 좀 평소와 다르긴 했다.
남궁천은 당가에서도 가장 큰 전각인 이독당(理毒堂) 근처에서 연신 서성였다.
영단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뚝딱 제조될 수 없는 것이라지만, 당가에서 본격적으로 공정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은근히 조바심이 일어났다.
게다가…….
‘저 능구렁이가 있으니 더 신경 쓰인단 말이지!’
남궁천이 저만치 산책하는 맹주를 힐끔 보았다.
늙으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더니, 이른 아침 남궁천이 이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저 늙은 구렁이가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점심이 지나서 왔을 때도 약속이나 한 듯 맹주가 근처를 서성였다.
이번에도 모른 척하긴 어려울 것 같아 일부러 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맹주님, 간밤엔 푹 주무셨는지요?”
“허허. 자네 덕분에 푹 잘 수 있었다네.”
“다행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십니까?”
“그저 가슴이 답답해서 산책을 좀 하고 있었네.”
“그렇군요. 역시 강호 평화를 지키시느라 고민이 많으신가 봅니다.”
“평화를 지키는 건 늘 어려운 일이라네. 어째서인 줄 아는가?”
“어째섭니까?”
“본 맹도 결국 무력 집단이기 때문일세. 본 맹이 지키는 평화란 어쩔 수 없이 힘으로 억누르는 것일 뿐이지.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진 평화는 결국 언젠간 수명을 다하게 마련일세. 그래서 나는 늘 회의감에 사로잡힌다네.”
“그렇군요.”
남궁천이 무심히 대꾸하면서도 묵천악의 표정을 빤히 응시했다.
왠지 묵천악이 빈말을 하는 것만 같진 않았다.
남궁천이 저만치 당가 무인들의 대련 장면을 지켜보면서 물었다.
“하면 맹주님은 달리 평화를 지킬 방도가 있습니까?”
“글쎄…… 인간이란 간사하기 짝이 없어서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결국 평화를 무너뜨리게 되지. 다만…….”
“다만?”
“이런 이야기가 있네. 전설 속 어느 세상은 매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더군. 한데 어느 날 그곳에 흉포한 흑룡이 나타나서 가장 높은 산에 눌러앉았다지. 그 후로 어찌 되었는지 아는가?”
“인간이 전쟁을 멈추고 흑룡을 견제하기 위해 힘을 모았습니까?”
묵천악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것이 맹주께서 생각하시는 답입니까?”
남궁천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바로 저 논리 때문에 자신이 전생에 그토록 당한 게 아니던가?
결국 자신은 그 흉포한 흑룡이었다.
만들어진 공공의 적.
맹주가 남궁천을 돌아보고는 눈을 가늘게 여몄다.
“보게나. 우린 흑룡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어. 그러니 흑도인들이 설치지 않는가? 하지만…….”
“제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정사를 막론하고 무림공적인 아버지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지요.”
남궁천이 씹어뱉듯 꺼낸 말에 맹주가 미간을 좁혔다. 그는 잠시 서늘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자네 아버지 일은 유감일세.”
“하나만 여쭙지요.”
“말하게.”
“제 아버지는 정말 천하대살성이셨습니까?”
맹주의 눈빛이 짐짓 매서워졌다.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혹시 맹주님의 그 방식에 따라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흑룡이었던 건 아닙니까?”
“그 말은 본 맹을 의심한다는 건가?”
“그저 여쭤보는 겁니다. 맹주께서는 마치 그런 흑룡이 이 세상에도 필요하다는 것처럼 말씀하시기에.”
“…….”
맹주와 남궁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얽혔다.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맹주 묵천악이었다.
“자네도 들은 게 있다면 알 걸세. 자네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자네에겐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천살성을 타고난 운명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렇다면…….”
남궁천의 입매가 묘하게 뒤틀린다.
“맹주께서는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도 있겠군요?”
“뭐라?”
“아버지라는 흑룡이 있었으니, 오늘날 맹주님이 이토록 많은 사람에게 돋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침 맹주님께 필요한 흑룡이 나타나서 다행이었겠습니다.”
명백하게 비꼬는 말투였지만, 묵천악은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대살성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순 없으나, 자네 아버지가 더 큰 악을 잠시나마 막아내는 역할을 했다는 건 사실이지.”
이 미친 영감탱이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남궁천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를 꿀꺽 삼키고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아버지의 존재가 그래도 맹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니.”
“허허, 그게 그렇게도 해석되는군.”
“맹주님의 방식으로 해석하니 그리 되네요.”
“그런가? 한데 자네는 아침에도 이곳을 서성이는 것 같더니, 오후에도 여기서 보는군. 뭘 하고 있었나?”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이독당을 돌아보았다.
“그냥 구경이죠. 당가에서 가장 큰 전각이자, 당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곳이니까 호기심이 생겨서요.”
“과연 그렇군. 나는 또 워낙 부지런히 찾아오기에 뭐라도 만들어 달라고 맡겨놓은 줄 알았네.”
“에이, 당가가 어떤 곳인데. 뭘 맡긴다고 뚝딱 만들어줄까요?”
“허허, 하긴 그건 그렇지. 무엇을 맡기든 얻기 힘들 터.”
교묘한 말이었다.
마치 남궁천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물론 남궁천의 성격상 고분고분 물러갈 리가 없었다.
“한데 맹주님도 이곳에 자주 보이시는 걸 보니 신기하네요.”
“산책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네, 그러셨죠. 갑자기 고양이 생각이 나서요.”
“고양이 생각?”
“제가 사는 동네에서 산책하다 보면 매번 도둑고양이와 마주치거든요. 항상 같은 장소에서요.”
“그건 왜 그런가?”
“그곳에 생선 냄새가 많이 나거든요.”
한마디로 맹주를 생선 냄새 맡고 어슬렁대는 도둑고양이 취급을 한 것.
그 속내를 눈치챈 묵천악이 냉소를 머금으며 뒷짐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 고양이도 보통내기가 아니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지켜볼 때는 절대로 생선을 훔치지 않았으니까요.”
“후후. 벌써 훔친 것일지도 모르지.”
“그럼 처맞아야 하는 건데…….”
“허허허.”
“후후후.”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묘한 웃음을 한참 동안 흘려냈다.
속내를 감춘 두 사내의 대화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이 기묘한 상황.
‘뭐, 재미있긴 하네.’
남궁천이 입매를 말아 올리곤 물었다.
“한데 강호 평화를 지키시려면 어서 맹으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네. 맹에서 훌륭한 인재들이 지금도 애쓰고 있으니.”
“그럼 더더욱 맹주님이 돌아가셔서 진두지휘하셔야 하지 않나요?”
“자네는 마치 내가 어서 여길 빠져나가길 바라는 것 같군.”
당연하지. 도둑고양이가 내 생선을 노리는데!
남궁천이 속내를 삼키고는 히죽 웃었다.
“다 강호 평화를 위해서죠.”
“내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시게.”
그때였다.
마침 총관이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맹주와 남궁천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두 분 여기 계셨군요! 맹주님, 가주전으로 급히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가?”
“아가씨가…… 그러니까 적랑단주님이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입니다!”
“적랑단주?”
묵천악이 눈가를 푹 찡그리고는 눈알을 굴렸다.
적랑단주는 분명 섬서로 떠나지 않았던가?
한데 이곳으로 내려온다니?
하면 섬서에서 흑무련을 막아내는 일에 실패했단 말인가?
화산파와 종남파가 버틴 그 섬서에서?
뜻밖의 소식에 묵천악의 표정이 굳어지자, 남궁천이 이죽거렸다.
“이거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는데요? 그러게 강호 평화나 좀 신경 쓰시지. 왜 여기서 산책이나…….”
“총관, 앞장서게.”
묵천악이 남궁천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잘라 버리고는 돌아섰다.
“예, 맹주님!”
총관이 서둘러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맹주와 남궁천이 따랐다.
* * *
가주전에는 이미 남궁검이 찾아와 당고륜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먼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급보를 받은 모양이었다.
묵천악과 남궁천이 들어서자 당고륜이 황급히 다가와 말을 건넸다.
“섬서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제 여식이 흑무련과 전투에서 패전하여…….”
“총관으로부터 대략의 이야기를 들었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고륜이 황망히 고개를 숙이자, 묵천악이 손을 내저었다.
“적랑단주는 본 맹의 일원이오. 당 가주의 자녀지만, 이미 출가하여 본 맹에 몸을 담은 지 수년이 지났소. 어찌 패전의 탓을 귀가에 넘길 수 있겠소? 본 맹의 불찰이외다.”
영감탱이가 말은 잘하는구나.
남궁천이 탐탁찮은 눈초리로 맹주를 보았다.
하긴. 저 정도의 처세술은 지녀야 그 오랜 기간 맹주의 자리도 유지하지 않겠나?
그렇다고 저 둘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꼴을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
남궁천이 불쑥 나서며 맹주의 염장에 불을 질렀다.
“맹주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엉?”
당고륜이 돌아보자, 남궁천이 차근차근 풀어주었다.
“화산과 종남이 가깝다고는 하나, 두 문파는 오래전부터 견원지간이었습니다. 팽가와 언가보다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덜한 곳이 아니죠. 그걸 알기에 흑무련도 섬서를 노린 것이고요.”
논리 정연한 말에 당고륜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아무런 조치도 없이 적랑단주를 보내서 두 문파와 함께 싸우라면 누가 말을 듣겠습니까? 맹주님, 하나 여쭤보죠.”
“말하게.”
“친서는 보내셨습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아…… 보냈구나.
온갖 음모를 꾸미는 와중에도 그건 또 했구나.
예상과 다른 대답이었지만 남궁천은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달랑 친서만 보내니까 문제죠.”
“뭐라?”
“맹주님이 직접 찾아가도 손을 잡을까 말까 한 두 문파입니다. 저 하는 거 보셨죠? 언가와 팽가 손잡게 해준 거요. 그 정도 성의는 들여야죠. 뭐,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긴 합니다. 제가 그때를 떠올리면 진짜 얼마나 힘들었는지 눙물이…… 막…….”
“저어, 소가주? 그건 천천히 듣기로 하고…….”
당고륜의 말에 남궁천이 금방 정색을 하며 다시 말했다.
“아무튼 그게 쉬운 일이 아니죠. 한데 달랑 친서 한 장 써서 새파랗게 어린 적랑단주를 보내셨으니 너무 안일했습니다.”
“으음. 자네도 새파랗게 어린 건 마찬가지…….”
“당 가주님.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그건 아니지.”
당고륜이 금방 수긍하자, 남궁천이 팔짱을 척 끼며 물었다.
“적랑단주님은 무사하신 겁니까?”
“지금 곧장 남하하여 본 가로 오는 중이라고 들었네. 살아남은 적랑단원이 대략 쉰 명 정도라고 하네.”
“피해 규모가 크군요.”
“자네 말대로 화산파와 종남파가 애초에 화합을 거부하고 각개 전투를 고집했다더군.”
“흑무련을 무시했네요. 그게 아니면 감히 맹주님을 무시한 거군요.”
남궁천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맹주가 심기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럼 두 문파는 어찌 됐습니까?”
“우선 봉문을 선언하고 피해를 최소화한 것 같네.
구파일방 중 무림맹에 가입된 두 문파가 봉문 선언을 했다는 것은 확실히 예삿일이 아니었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싸움이 벌어질 때쯤 유현이 화산파에 도착했을 텐데. 무사할지 모르겠군.’
어쨌거나 상황이 이리 되자, 지금 남궁천에게는 오히려 유리한 판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그러잖아도 맹주를 어떻게 떼어 버릴지 고민하던 차였으니.
남궁천이 묵천악을 돌아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죠? 이거 얼른 맹으로 복귀하셔야겠는데요? 여기서 산책이나 하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맹주님.”
“끄음.”
묵천악이 복잡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남궁천이 방실방실 웃으며 쳐다본다.
‘알아들었으면 앓는 소리 그만 내고 썩 꺼지라고, 이 거머리 같은 영감탱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