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제왕의 철학
당고륜이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남궁천을 빤히 보았다.
“남궁가에서 품은 강령신공이라니. 자네 말을 함부로 해서는 큰 파장이 일어날 텐데.”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진주언가에서도 알고 있는 부분이니까요.”
“진주언가에서도 안다?”
“진주언가의 강령신공에 대한 실마리를 제가 찾아주었거든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진주언가의 무공에 대해 남궁천이 언질을 했다고?
그게 다 남궁가의 무공 덕분이고?
당최 이해가 되질 않는다.
다른 무공을 품을 수 있는 무공이라니.
다른 내공을 흡수하는 무공은 들어봤어도, 다른 무공을 흡수하는 무공은 또 처음 본다.
아니, 무공이란 본디 하나의 식(式)과 술(術)에 속하니 흡수한다기보단 남궁천의 말대로 품는다는 말이 어울리긴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고륜이 눈살을 가늘게 여미고는 남궁천이 내민 벽라검을 물끄러미 보았다.
쉽게 구하기 힘든 보검이다.
서너 살 아이가 휘둘러도 어른이 쉽게 다칠 수 있을 만큼 예리한 검신.
이걸로 지금 자신을 치란 소린가?
당고륜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남궁검을 힐끔 보았다.
남궁검은 그대로 바위가 된 것인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다.
이렇게 되니 은근한 오기까지 생긴다.
제왕의 철학?
자신을 앞에 두고 남궁가의 무공을 제왕이라 칭하다니.
마음을 굳힌 당고륜이 서늘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보도록 하지. 그 제왕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
얼어붙은 표정만큼이나 차가운 말투였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벽라검을 한 번 더 내밀었다.
“그러시죠.”
“좋아.”
당고륜은 더이상 거절하지 않고 벽라검을 움켜쥐었다.
지이이잉.
부러 공력을 주입하자, 검신이 낯선 손길에 부르르 떨며 공명음을 떨친다.
확실히 훌륭한 검이다.
이런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긴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무공에 자신 있다는 뜻이리라.
또한 상대에 대한 믿음을 먼저 보여줌으로써 신뢰를 얻고자 함일 테고.
남궁천이 주먹 쥔 팔을 옆으로 훅 뻗어냈다.
“해보시죠.”
당고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그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면서 남궁검을 곁눈질했다.
하나 남궁검은 여전히 그 돌 같은 표정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이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살짝 불쾌할 정도였다.
만약…… 정말 만에 하나 자신이 휘두른 검에 남궁천이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는다면?
‘그것도 모양새가 썩 좋진 않겠지.’
물론 당가는 검공보단 독공과 암기에 능하다. 하지만 상대의 소가주에게 검을 휘두르고도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망신살이지 않겠나?
‘잠깐, 내가 실패할 걸 감안하다니.’
순간 실소가 나온다.
확실히 남궁천은 대단한 녀석이다.
몇 마디 말과 행동으로 벌써 자신을 반쯤 압도한 게 아닌가?
당고륜이 시퍼런 검신을 들어 올린 채로 말을 뱉어냈다.
“후회는 말게.”
“거참, 말 많으시네. 그냥 치시라니까요. 쫄리세요?”
“……!”
결국 당고륜이 피식 웃으며 벽라검을 내렸다.
“굳이 내가 나설 것도 없겠지. 전위.”
“예, 가주님.”
전위라 불린 호신위가 얼른 다가왔다.
“자네가 하게.”
“명 받들겠습니다.”
“이건 소가주가 도로 가져가게.”
당고륜이 벽라검을 휙 돌려서 남궁천에게 내밀었다.
남궁천이 호신위를 한 번 바라보고는 벽라검을 받아 검집에 척 갈무리했다.
“나중에 가주님이 직접 나서지 않았다고 다른 말 하기 없습니다?”
“물론일세.”
“좋습니다. 그럼 전력으로 내리치시길.”
남궁천이 다시 주먹을 훅 내밀었다.
전위는 당고륜과 남궁천을 한 차례씩 번갈아 보더니 이내 본인의 검을 들어 올려 기운을 주입했다.
위이이잉.
검신이 공명하면서 묘한 울음을 내질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당고륜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설마 정말 맨몸으로 저 검신을 막아낸다는 건가? 아니면 우리가 결국 검을 내리치지 않고 수락할 거라고 여기나?’
그러는 사이 전위가 다시 한 번 의사를 묻는 듯 당고륜을 돌아본다.
‘이리 된 이상 본 가는 책임이 없다.’
결심을 굳힌 당고륜이 고개를 끄덕이자, 전위가 기합성과 함께 재빨리 검신을 내리쳤다.
“하아아앗!”
쒸이이익!
허공을 가르며 떨어진 검신이 마침내 남궁천의 팔뚝에 닿는 순간,
까아아아앙!
“……!”
“……!”
당고륜과 전위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분명 팔을 내리쳤는데 금속성이 울리면서 검신이 두 동강이 나 날아가는 게 아닌가?
휘리리릭, 콰직!
옆으로 날아간 검신 파편이 그대로 벽에 깊숙이 처박혔다.
“이제 됐죠?”
남궁천이 간단한 시범을 보여주었다는 듯 옷을 툭툭 털어낸다.
그러자 장삼 자락이 갈라져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하나 단단한 팔은 긁힌 자국조차 없다.
“이, 이게…… 말이…….”
말이 안 된다.
도검불침의 무공은 진주언가의 강령신공과 소림사의 금강불괴밖에 없지 않던가?
한데 정말 지금 강령신공을 펼친 것이라고?
남궁가에서 품은 강령신공이라니!
놀란 당고륜의 귓가에 남궁천의 목소리가 스친다.
“어때요? 이제 좀 마음이 바뀌셨을까요?”
“흐음.”
남궁천은 당고륜을 빤히 보았다.
만약 처음부터 초견파공안을 말해주었다면 이런 시범을 보여줄 필요도 없으리라.
하나 아직은 시기상조다.
당고륜과 맹주가 어디까지 손을 잡았는지 알 수 없는 만큼 초견파공안을 쉬이 노출해선 안 된다.
조금 더 기반을 다질 때까진 비밀을 유지하는 게 좋을 터.
당고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확실히…… 대단하군. 남궁세가의 무공에 다시 한 번 감복했네.”
“별말씀을요. 당가의 독공이 모든 독을 소화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남궁천의 말에 당고륜이 입매를 비틀었다.
참으로 교묘한 말솜씨다.
자신의 가문을 낮추지 않으면서 상대의 가문을 띄워준다. 그러면서 공감을 끌어낸다. 또한 경쟁심을 지우기까지.
이런 언변을 어찌 약관도 채우지 못한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당고륜이 새삼스러운 눈길로 남궁검을 보았다.
‘좋으시겠소. 가문을 이을 소가주가 이리 든든하니.’
새삼 자신의 아들인 당우기와 비교가 된다.
‘세상의 모든 독을 소화하는 당가처럼이라.’
그 한마디가 뭐라고 남궁세가와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당고륜이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남궁천도 자리에 앉았다.
주변을 에워쌌던 호신위들도 귀신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당고륜이 다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하면 자네는 그 천하를 품는 남궁세가의 심법으로 천마신단을 품어보겠다는 뜻인가?”
“그렇죠.”
“하나 사람의 일이라는 게 늘 계획대로만 되진 않는 법일세. 만약을 대비해서…….”
“이미 해두었습니다.”
“들어보지.”
“제가 천마신단의 기운을 오롯이 정화시키지 못하고 미치광이가 된다면…… 바로 곁에서 지켜보던 가주님이 제 목을 치실 겁니다.”
“……!”
당고륜이 진심으로 놀란 듯 남궁검을 돌아보았다.
남궁검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집안이군.’
바닥을 찍고 일어서려는 가문은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인가?
남궁천이 말을 이어갔다.
“최근 당가는 새로운 독을 제조하기 위해 중원 각지에서 구하기 힘든 재료들을 모아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인하진 않겠네.”
“그렇다면 마신단의 재료야말로 구하기 힘든 것이 아닙니까?”
“하나 이걸 다 쓰고도 만들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럼 어쩔 수 없죠. 당가를 믿은 본 가가 실패한 셈입니다. 서로가 손해지만 최선을 다했다면 책임은 각자가 질 문제죠.”
“시원시원해서 좋군.”
“그럼 하시죠? 마신단 제조.”
“…….”
“마교 잔당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지금껏 강호 역사를 보면 흑도인들이 들고일어난 후에는 반드시 마교가 출현했습니다. 마교는 그런 곳입니다. 약점을 쥐새끼처럼 파고드는 놈들.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죠.”
“흐음.”
당고륜이 침음을 흘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남궁검과 남궁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다했으니 결정을 기다릴 차례.
마침내 당고륜의 입이 떨어졌다.
“좋네. 제조해 보도록 하지.”
남궁천과 남궁검이 서로를 마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단, 약조한 건 지켜야 할 걸세. 첫째, 남는 재료는 본 가가 가지겠네. 둘째, 완성된 마신단은 반드시 자네가 복용해야 하네.”
“물론이죠.”
“거기에 조건 하나를 더 걸어서.”
“뭡니까?”
“자네가 마신단을 복용할 때, 나도 남궁검 가주와 함께 있도록 하겠네.”
뜻밖의 제안에 남궁천과 남궁검이 서로를 보았다.
당고륜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럴 일이 생겨선 안 되지만, 만에 하나 자네가 반미치광이가 되었을 때, 남궁 가주께서 마음이 약해져 실수할 수도 있지 않겠나?”
다시 말해서 여차하면 남궁검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이 남궁천을 죽일 수도 있다는 뜻.
굉장히 도발적으로 들릴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열쇠를 쥔 자는 당고륜이었다.
남궁검이 뭐라 입을 열려는데, 남궁천이 먼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러시죠.”
“천아, 그건…….”
“할아버지. 절 믿어주세요. 괜찮습니다.”
남궁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가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오냐, 내 너를 믿으마.”
* * *
늦은 밤 맹주가 머무는 지객당.
“호오, 남궁천 그 아이가 그렇게까지?”
묵천악이 수염을 쓸며 말하자, 당고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남궁가가 어떤 일을 계기로 한 단계 도약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듣기로는 창벽공이라고…….”
“흐음. 창벽공이라.”
묵천악이 가만히 중얼거리다가 뒷짐을 지며 천장을 보았다.
“어찌 됐건 천마신단을 그들에게 넘겨선 안 될 일. 반드시 본 맹에 넘겨주시오.”
“물론입니다. 맹주님 말씀대로 그들이 마신단 재료를 가지고 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강호 평화를 위해 당 가주의 도움이 절실할 때요.”
“명심하지요.”
당고륜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같은 시각.
남궁검과 남궁천이 머물고 있는 지객당.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궁천의 질문에 남궁검이 차분한 어조로 되물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뭔가 너무 쉬웠습니다. 당 가주가 시원시원한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맹주와 먼저 만난 후라는 걸 감안한다면 역시 이상할 정도로 쉬웠어요.”
“나도 마찬가지다.”
남궁검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는 내심 남궁천에게 놀라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거기까지 심계를 읽는구나. 기특한 녀석이로고.’
남궁천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맹주가 마신단 제조를 방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면?”
“어쩌면 맹주는 마신단이 만들어지길 바랄지도 모르겠어요. 대신 만들어진 마신단을…….”
“가로채려고 할 터.”
남궁검의 말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남궁검이 중얼거렸다.
“당분간은 맹주가 만든 판에서 놀아줘야겠구나.”
남궁천이 씩 웃었다.
“뭐, 한두 번도 아닌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