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사람 사는 냄새
“제발…… 살려…… 아니, 죽여…… 주십시오…….”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중년 사내가 입가에서 걸쭉한 피를 흘리며 사정했다.
“술맛 떨어진다. 입 다물어.”
“제발…….”
사내는 이제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온몸이 통나무처럼 굳어버린 사내는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선 채로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시체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남궁천이 술을 한 잔 들이켜고는 물었다.
“그래서 배후가 누구라고?”
“모릅니다…… 정말…… 정말 모릅니다…… 제발 그만 죽여주시…….”
피융, 퍽!
“끄으으읍!”
한 줄기 지풍이 날아가자 사내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을 흘렸다. 남궁천이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마다 지풍이 날아들어 전신의 요혈을 두드려 대니 정말이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모른다네요, 가주님.”
“다행이구나.”
“그러게요.”
중년 사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도대체 이 미친놈들이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객잔에 있던 모든 살수가 죽었다.
그리고 자신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이들이 무슨 정보를 얻고 싶은지 몰라도, 그걸 말하지 않는 이상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런데 오판이었다.
삶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걸 이제 알았으니.
이들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였다.
남궁세가 사람들이 이토록 잔인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늘 제왕의 가문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간 자들이 아니던가?
아무리 몰락한 처지에서도 그 자존심만큼은 하늘을 찌른다는 가문.
공명정대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그런 가문.
그런데 사람 하나를 세워두고 이렇게 악랄하게 괴롭히다니!
“크읍! 쿨럭, 쿨럭!”
“이 새끼가 더럽게…….”
남궁천이 탁자까지 튄 피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서늘한 시선을 보면서 사내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이놈들은 오히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흡족하게 여기고 있다. 마치 날 죽이지 않고 고문하는 게 즐겁다는 듯이. 차라리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해 버리는 게 낫겠구나!’
잠시 후 남궁검이 술잔을 들이켜더니 사내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배후가 누군가?”
사내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제는 말해야 해!’
그는 앞서 남궁천과 남궁검이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는 대충 하나를 지목했다.
“말, 말해드리겠소. 사실…… 무림맹이오.”
남궁천과 남궁검이 흠칫거리고 서로를 보았다.
동시에 사내의 표정에는 희미한 안도감이 떠올랐다.
‘드디어 죽을 수 있겠구나.’
한데 남궁천의 반응이 어째 불길하다.
남궁천이 눈을 부라리더니 사내를 향해 으르렁거린다.
“무림맹이라고? 진짜 확실해?”
“확, 확실하오.”
“아니야. 너는 그걸 몰라. 알면 안 돼.”
‘이 새끼는 진짜 미친 건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모르길 바란다는 거야, 뭐야?’
사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데, 남궁천이 계속 말했다.
“네가 말하면 안 돼. 네가 그걸 말하면 우린 어쩌라고? 이 새끼야.”
“무, 무슨 소리요?”
“너 솔직히 모르잖아? 아는 척한 거지?”
“아, 아니오. 난 정말로 알고 있었소! 배후는 무림맹이오! 자! 나는 아는 걸 다 말했소!”
그러자 다시 남궁천과 남궁검이 그늘진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남궁천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남궁검에게 말한다.
“이 새끼가 자꾸 아는데요? 어떡하죠?”
“그러게 말이다. 난감하구나.”
아니, 안다는데 왜? 뭐가 난감한데!
사내가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쳤다.
“이제 날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 아는 걸 말했으니 더 이상 난 쓸모도 없잖소!”
“쓸모가 없다니! 누가 그런 말을 해? 안 그래도 지금 너무 신나게 다 죽여 버려서 후회하는 중인데. 너도 죽으면 그 어색한 분위기를 또 어찌 버티라고.”
“뭐요……?”
사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니, 남궁검이 얕은 숨을 내쉬고는 말을 흘린다.
“그러게 왜 그리 살풀이를 했느냐? 어린 녀석이.”
“언제는 소각해도 되는 쓰레기라고 하셨잖아요. 무공 수련이라 생각하라면서요.”
“그래도 조금 남겨놨어야지. 하나만 남겨두니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느냐? 갈 길도 먼데.”
“아……! 갈 길……!”
남궁천이 방망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입을 딱 벌렸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오늘 밤만 어색하지 않게 보낼 수 있도록 한 놈을 살려둔 건데, 남궁검은 사천당가에 도착할 때까지 어색함을 달랠 방도로 염두에 두었다니.
‘과연 연륜이란 무시할 수 없구나!’
큰 깨달음을 얻은 남궁천이 시선을 휙 돌려서 중년 사내를 노려보았다. 괜히 움찔 떤 중년 사내가 헛바람을 삼켰다.
‘헉, 이 새끼가 또 왜……!’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묻는다.
“나는 아직 궁금한 게 많다. 가주님도 그렇죠?”
“그렇다. 아는 것은 언제나 힘이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럼 다시 질문.”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아는 걸 다 말했다고 하지 않았소? 이제 날 그만 죽이……!”
“아니, 난 더 알아야겠다. 무림맹이 너희들에게 얼마를 줬지?”
아니, 그런 걸 왜 묻는 건데, 이 미친놈아!
사내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겨우 삼켰다.
‘이 새끼들은 내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또 지독한 고문을 가하겠지. 그간 죽인 자들과 유가족들의 아픔을 느끼라는 개소리를 해대면서!’
생각을 정리한 중년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꾸했다.
“내 알기로는…… 십만 냥으로 들었소.”
“십만 냥? 고작 십만 냥?”
“아, 아니…… 이십만 냥인 것 같기도 하고…….”
“이십만 냥? 이십만 냐아앙?”
“삼, 삼십? 사십?”
피융, 퍼억!
“끄아아아아압!”
“이 새끼가 지금 나랑 흥정해? 어디서 개수작질이야? 방금 그 고통은 네가 어디선가 죽였을 목숨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도록.”
“이런 썅! 차라리 죽이라니까!”
“어허, 생명은 소중한 것. 이 살수 새끼가 버릇을 못 버리네. 어찌 그리 목숨을 함부로 다루려고 하느냐?”
남궁천이 짐짓 엄한 투로 꾸짖자 앞에 앉은 남궁검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썩 옳다.”
“칭찬 감사합니다, 가주님.”
“녀석, 끝까지 그리 부르는구나.”
“으음. 차차 나아지겠지요.”
“그래, 넘어가자.”
“그래도 역시 훨씬 낫네요. 객잔에 손님이 우리 말고 또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삭막한 분위기보다는 훨씬 낫구나.”
이 미친놈들아!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 더미가 삭막하지 않으면 도대체 뭐가 삭막한 거냐? 어엉?
남궁검이 부드럽게 웃으며 사내를 돌아보았다.
“자아, 우리 살수님께서는 올해 나이가 몇이신고?”
아니, 염병할! 왜 그런 게 궁금한 거냐고! 이 새끼들 정말 남궁세가 가주와 소가주 맞아? 도대체 정체가 뭐냐!
* * *
짹짹. 짹……!
아침을 알리는 산새가 맑은 소리를 지저귄다.
푸드득!
객잔 현판에 앉은 새가 날아오르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현판이 결국은 균형을 잃고 떨어졌다.
끼이익, 쿠웅!
풀썩 먼지가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객점 문이 열렸다.
“흐아아암!”
늘어지도록 기지개를 켠 남궁천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모처럼 푹 잤습니다.”
“나도 그렇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포대기에 싸인 젖먹이 아기였다.
“어…… 이걸 왜 저에게?”
“그럼 여기 버리고 갈 것이냐?”
‘아니, 원래 이 영감이 이렇게 온정이 넘쳤나? 어차피 두고 가더라도 살곡이 와서 데려갈 텐데.’
하지만 이어진 남궁검의 말은 그 생각을 쑥 들어가게 만들었다.
“갈 길이 멀다. 데려가야지.”
“아……!”
순간 남궁천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만약 아기가 없다면 앞으로 남은 여정을 저 좁은 마차 안에서 어찌 둘이 버티겠나?
‘과연 존경을 받을 만한 영감이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아기를 받아 안았다. 그러고는 뒤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저 살수 놈이 살곡에 말을 잘 전달하겠죠?”
“그럴 거다. 나름 밤새 고생했을 테니.”
“모처럼 기대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가는 동안 무공을 수련한다고 여기면 되겠구나.”
“당가에 도착할 때까지 심심하진 않겠어요.”
“잘된 일이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게 두 사람이 마차 앞에 다다르자, 마부가 얼른 다가와 인사했다.
“간밤에 잘 주무셨는지요?”
마부는 어젯밤에 객잔에서 난리가 일어난 것을 보고는 마차에서 잠을 잤다.
남궁천과 남궁검이 동시에 아침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주 푹 쉬었네.”
* * *
비탈진 길을 따라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가 지팡이를 짚으며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앙상한 뼈마디가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노파였다.
하나 그녀의 안광만큼은 염라의 눈빛만큼이나 매서웠다.
그녀는 바로 무림맹주를 찾아갔던 살곡의 노파였다.
“끄응.”
마침내 언덕을 올라선 노파가 저만치 보이는 허름한 객잔을 보았다.
“쯧…….”
벌써부터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객잔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진득한 혈향이 여기까지 풍겨왔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미 각오했던 바였다.
만약 차질이 생기지 않았다면 자신이 이렇게 힘겹게 언덕을 올라오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여태 소식이 없다는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 아니겠나?
지팡이를 짚으며 객잔 안까지 자박자박 걸어 들어간 노파가 미간을 푹 구겼다.
훅!
지독한 피비린내.
그간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그녀였지만 이만한 시체 더미를 마주하는 경우는 잘 없었다.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코를 틀어막고는 한쪽 구석까지 자박자박 걸어갔다.
시체 더미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중년 사내.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가느다란 지풍이 날아가 사내의 요혈을 때렸다.
퍽, 퍽!
“크헉!”
그제야 의식이 돌아온 사내가 숨을 토해내며 눈을 부릅떴다.
하나 어찌나 얼굴이 부었는지 부릅뜬 눈이 단추 구멍보다 작을 지경이었다.
“할, 할멈……!”
“그래, 말해보아라.”
“크흑! 할멈……!”
“무슨 일을 당한 것이냐?”
노파의 질문에 중년 사내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오열했다.
“정말 이젠 그놈들이 없는 겁니까? 이곳에 없는 겁니까?”
“없다. 이미 떠난 지 꽤나 지난 듯하다.”
“크흐흐흑! 그놈들은 정말 지독한 놈들이었습니다! 절 끝까지 죽이지 않고 온갖 고문을 가하면서 이야깃거리로 삼았습니다!”
“이야깃거리?”
노파가 눈살을 가늘게 여미자, 중년 사내가 더욱 서럽게 울어댔다.
“예, 그놈들에게 전 그저 분위기를 돋우는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놈들은 정말이지 악귀…… 야차…… 아수라 같은 존재였습니다!”
“달리 들은 것은?”
“아……! 저에게 사천당가로 가는 길을 세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어디를 통해서 어떻게 갈 것인지. 서둘러 쫓아오면 따라잡을 수 있으니 힘을 내라고…… 살곡은 할 수 있다고…….”
“살곡……? 그놈들이 우리를 안단 말이더냐?”
“예, 희한하게도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 소가주라는 녀석이 아주 제대로 미친놈 같았습니다.”
“해서 가는 길은 어떻게 된다더냐?”
중년 사내가 자신이 들었던 내용을 노파에게 상세히 전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밤새 자신이 당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모두 전했다.
노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침음을 흘렸다.
“흐음. 확실히 미친놈들이구나. 맹주가 그들을 제거하려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인가?”
“할멈. 이제 나는 빼주시오. 그놈들을 다시 보고 싶진 않습니다. 차라리 다른 임무를 줘요!”
“걱정 마라. 너는 당연히 빠질 테니.”
“아아, 고맙소. 정말 고맙……!”
푹!
어느새 노파의 손을 떠난 단검이 중년 사내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그대로 입을 쩍 벌린 채 절명한 사내를 보며 노파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실패하고서 한다는 소리 하고는.”
얕은 숨을 내쉰 노파가 허리를 펴고는 주변의 시체들을 둘러보았다.
“살곡을 기다리겠다니. 도대체 얼마나 미친놈들인지 궁금하긴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