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사람 사는 냄새
남궁천이 술잔을 들이켜며 감탄했다.
“와아, 염천혈(廉泉穴)이군요. 저놈은 이제 술 마실 때마다 턱주가리 아래로 술이 줄줄 새겠는데요?”
“기도가 부어서 곧 질식할 게다.”
“남은 젓가락을 요긴하게 쓰셨네요.”
“무기가 될 만한 건 아껴 쓰는 게 좋지.”
“그러게요. 제가 괜히 두 개나 써 버려서. 한 수 배웠습니다.”
“정진에 도움이 되었다니 좋구나.”
또로로롱.
술잔을 채운다.
“크으, 소흥주가 기가 막히네요.”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술맛을 아는구나.”
“제 인생도 나름 파란만장해서요.”
남궁검이 피식 웃는다.
“하긴. 술맛의 깊이는 인생의 깊이와 같은 법이지.”
“지금도 평범한 삶은 아니잖아요.”
“그렇구나.”
두 사람의 대화만 본다면 조금 이상하긴 해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하나 두 사람의 주변은 피투성이가 된 사상자들로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술 한 모금에 칼부림 한 번, 술 두 모금에 장력과 권력이 작렬하고, 술 세 모금에 피 분수가 뿌려진다.
지금도 남궁천은 남궁검에게 태연히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저라면 역시 저 아이를 골랐을 겁니다.”
남궁검이 술잔을 받아 들며 물었다. 마침 술병에 남은 마지막 술이었다.
“어째서냐?”
그러는 사이 남궁천이 가리킨 그 ‘아이’가 살기를 휘날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그 아이는 바로 할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온 것처럼 내내 조잘거리며 웃고 떠들던 아이였다.
“가주님의 방식으로 말씀드리자면…….”
카차앙!
남궁천이 그대로 빈 술병을 휘둘러 아이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그대로 고꾸라진 아이의 머리 위로 깨진 술병의 파편이 어지럽게 흩어져 내렸다.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이 웃지 않았거든요.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기감은 젖먹이만도 못할 정도로 희미했지요.”
“올바른 지적이다.”
“다 큰 아이가 젖먹이보다도 기감이 희미하다는 건 어려서부터 살수로 길들여진 아이라는 뜻이죠. 아직은 서툴러서 ‘적당히’를 모르기에 기감을 아예 죽일 줄만 아는.”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어 올리는 사이, 이번에는 외모가 출중하여 시선을 끌었던 여인이 등 뒤에서 날아들었다.
“죽어엇!”
쉬컥!
남궁검이 술잔을 든 채로 다른 한 손으로 검을 뽑아 들어 머리 위로 원을 그리듯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미녀의 목이 그대로 갈라지면서 머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츄아아아아!
창틈으로 스며드는 석양. 그리고 잘린 목에서 피를 분수처럼 터뜨리는 여인. 그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술잔을 들이켜는 남궁검.
이 묘한 조화가 꽤나 인상 깊게 느껴졌다.
‘이 영감도 어째 즐기는 것 같은데. 우리의 여정이 영감에게도 꽤나 어색하고 힘들었던 건가?’
이쯤 되자 다른 살수들은 감히 기습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을 포위하며 경계했다.
남궁검이 술잔을 내려두며 말했다.
“내가 아낙을 먼저 지목한 것은 괘씸했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젖먹이를 살행에 이용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인간이기를 거부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하여 인간이 아닌 것을 인간 세상에 둘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냉랭한 남궁검의 말에 남궁천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것들이 인간인 척 살면 안 되죠. 쓰레기는 소각해야지요.”
포위한 살수들이 움찔거리고는 서로 눈치를 살핀다.
‘쓰레기인 줄은 아나 보네.’
남궁천이 싸늘한 비웃음을 짓는 사이, 남궁검이 물었다.
“한데 너는 왜 저 아이를 먼저 골랐을 것이냐?”
“아이라서요.”
“아이라서?”
“예. 말씀드렸다시피 눈빛에 온정이 없었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인간성을 말살시킨 거죠. 아마 삶의 본능만 남아 있었을 겁니다. 머리는 사람 죽이는 방법으로 가득했을 거고요. 갇힌 운명에서 벗어날 방법도 없었을 겁니다. 한 번 속한 이상 염라가 끌고 가지 않는 한 조직에서 찾아내 제거하려고 할 테니까요. 그러니 차라리…….”
“너의 손으로 안식을 주겠다는 것이냐?”
“말하자면 그렇죠.”
“하나 갱생의 여지가 없겠느냐? 혹 본 가가 거둔다면?”
“본 가의 사정상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냉정하게 어렵죠.”
“일리가 있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자 두 사람을 포위한 살수들은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미묘한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지금껏 이런 표적이 있었던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라는 언질은 받았다.
때문에 이렇게 많은 준비를 하고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저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서 태연히 술잔을 기울이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이곳에서 세상 편안한 곳에 머문 것처럼 온기 어린 시선을 주고받으며 담소를 나눈다.
미친놈들인가?
마침 남궁천이 술잔을 들다가 멈칫했다.
잔이 비어 있었다.
남궁천이 탁자를 거칠게 탕탕 내리쳤다. 그 바람에 포위하고 있던 살수들이 움찔거리고는 조금 물러났다.
“이봐! 여기! 술 한 병 더 내와! 이거, 뭐 이래? 손님 술이 떨어졌으면 재깍재깍 달려와야지.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 장사나 하겠어? 점소이 교육을 다시 시켜야겠어!”
“점소이는 죽었다. 방금 네가 죽였지.”
“어? 아, 그렇군요. 그래도 그렇지! 그럼 점소이를 다시 뽑아야 할 것 아냐? 주인장 어디 있어?”
“…….”
“…….”
마침 살수 중 덩치가 큰 대머리가 박도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어린 새끼가 잔재주 좀 부렸다고 눈깔에 뵈는 게 없는……!”
퍼억!
눈 깜빡할 사이에 대머리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쿠우웅!
그대로 대자로 뻗어버리자 살수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대머리와 남궁천을 번갈아 보았다.
“끄음. 술잔으로……!”
남궁천이 술잔을 던졌는데, 깨진 것은 술잔이 아니라 대머리의 머리통이었다.
뇌수까지 흘려내며 즉사한 대머리를 보고 있자니 지금의 상황이 비현실처럼 느껴진다.
남궁천이 남궁검을 보면서 말했다.
“손님에 대한 예의가 없네요.”
“그렇구나. 그럼 가르쳐야겠지.”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 움찔거리며 다시 우르르 멀어졌다.
그만큼 남궁천이 전신에서 풍겨내는 기운은 소름 끼치도록 살 떨리는 공포심을 유발했다.
남궁천이 객잔 출입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자 살수들이 저도 모르게 물러서며 길을 열어주었다.
남궁천이 출입문을 잠그고는 돌아섰다.
“예절이. 사람을. 만든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 돌아온 남궁천이 소리쳤다.
“주인장! 나오라고! 여기 소흥주 가져와! 확 불 질러 버리기 전에!”
“불을 지르면 안 된다. 우리가 묵을 곳이 있어야지.”
“아, 그렇군요. 큰 실수 할 뻔했네요. 까딱하다간 또 그 마차에서…….”
남궁천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잠시 후 늙수그레한 노인이 소흥주를 한 병 들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가 탁자에 소흥주를 내려두자 남궁천이 힐끔 보고는 물었다.
“주인장이야?”
“아니오.”
“그럼?”
“…….”
“됐고. 이 소흥주는 품질이 어때?”
“일품이오.”
“증명해 봐.”
노인의 안면근육이 꿈틀거린다.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며 묻는다.
“증명해 보라니까?”
“다시 내어오겠소.”
“어딜.”
그 순간 남궁검 앞에 놓인 술잔이 휙 날아가더니 노인의 이마에 부딪쳤다.
따앙! 퍼억!
그대로 머리가 터져 나간 노인이 소흥주를 든 채로 픽 쓰러졌다.
카차앙!
깨진 술병에서 독을 탄 소흥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새끼들이 얕은 수작을 쓰네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 바로 살수 아니더냐?”
“처음에 들어설 때만 해도 설마 했는데. 정말로 여기 있는 놈들 전체가 살수일 줄이야. 신선한데요.”
“그만큼 우리를 벼르고 있다는 뜻이겠지.”
“누구 짓일까요?”
“너는 누구 짓이라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구성원과 조직력을 보면 역시 살곡이 아닐까 싶네요.”
추측하다시피 말했지만, 남궁천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 죽은 노인은 전생에 살곡에 들렀다가 한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자였기에.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것도 책으로 배웠느냐?”
“예. 책이야말로 지식의 보고더군요.”
“요즘 책에는 많은 것들이 나오는 모양이구나.”
“음…… 알아두면 쓸데없는 잡다한 지식이 꽤 있더라고요.”
“살곡에게 의뢰를 할 정도면 돈이 꽤 들 텐데. 흑무련 쪽은 아니겠느냐?”
남궁천이 재빨리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사실 남궁검이 흑무련을 꺼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적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
남궁천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흑무련보다는 무림맹이 아닐까요?”
역시나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얼른 주변을 살폈다.
눈칫밥으로 수십 년을 살아남은 자신이다.
어느 정도만 반응이 있어도 대략 유추할 수 있다.
한데 영 반응이 시원찮다.
무림맹이라는 명칭이 나왔을 때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자가 있긴 했지만, 배후를 들켰다는 반응은 아니다.
‘이놈들…… 모르는구나.’
오히려 살곡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더 놀란 눈치였다.
한마디로 이놈들은 의뢰자가 누군지 알 정도의 위치에 있는 것들이 아니다.
‘허! 이것들 봐라. 감히 남궁세가 가주와 소가주를 노리는데 이런 잔챙이들을 써?’
물론 잔챙이라고 하더라도 살곡의 경우에는 살수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절정고수를 제거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지니고 있다.
하나 초견파공안을 지닌 남궁천의 경우에는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려고 마음먹는 순간 이미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상당한 수준의 살수가 아니면 암살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전생에서 살아남은 남궁천이니까.
아무튼 노인마저 죽고 나자 살수들은 모두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공포심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거대한 벽을 앞에 둔 기분.
도대체 어떻게 접근해서 죽여야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니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뭔가 틈을 만들려면 상황의 변화를 주어야 하는 법.
“여기 소흥주요.”
옆구리에 칼을 찬 무인이 소흥주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와 거칠게 내려둔다.
타악!
“독은 없소.”
“이젠 네가 주인장이구나.”
“그렇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시오.”
“품질은?”
칼 찬 무인이 술병을 들더니 벌컥벌컥 마시고는 거칠게 탁자에 내려두었다.
탕!
“이제 됐소?”
“되긴 됐는데 누가 그렇게 많이 마시래? 이 새끼야.”
“그 정도는 해야 믿을 것 같아서.”
“반 모금만 마셔도 믿어.”
“진작 말을 하시지. 꺼억.”
“너 이리 와 봐.”
“뭐요?”
칼 찬 무인이 허리를 숙이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동시에 그는 여차하면 기회를 봐서 발도술로 남궁천을 제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전에,
짜아악!
뺨이 휙 돌아갔다.
냅다 귀싸대기를 올려붙인 남궁천이 냉랭하게 말했다.
“손님 앞에서 더럽게 트림을 해? 콱 뒈질라고.”
“이익……!”
이성을 잃은 무인이 옆구리에 찬 칼을 뽑아 들려는 순간, 남궁천이 얼른 발을 내질러 칼을 도집에 넣어버렸다.
철컥!
동시에 남궁천이 소흥주가 든 술병을 휘둘러 상대의 머리를 후려쳤다.
카차아앙!
쿠당탕!
소흥주가 든 술병이 박살 나면서 쓰러진 무인의 머리를 흠뻑 적셨다. 머리가 깨져 피범벅이 된 무인이 몇 차례 꿈틀거리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새끼가 기본부터 다시 배워야겠네. 술잔도 안 갖다주고 말이야. 하여튼 이럴 때 보면 귀왕채만 한 놈들이 없다니까.”
툴툴거리며 중얼거린 남궁천이 주변을 둘러보며 차가운 눈빛으로 으르렁거렸다.
“다음 주인장 누구냐? 소흥주랑 술잔도 내와라.”
얼어붙은 살수들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냄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