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사람 사는 냄새
마차 한 대가 관도를 따라 부지런히 달렸다.
“…….”
“…….”
마차 한 대가 관도를 따라 부지런히 달렸다.
“흐음”
“커흠!”
마차 한 대가 관도를 따라 부지런히…….
‘이런 썅! 언제까지 마차 타고 달릴 거냐고! 도대체 언제 도착이야? 상제야! 신령아! 차라리 날 고문해라! 내 인생 최대의 위기다!’
남궁천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젠 눈을 감아도 남궁검의 그 냉담한 얼굴이 어른거린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하아, 선아. 어쩌면 좋으냐? 예전에는 눈 감으면 너의 얼굴이 떠올랐는데, 지금은 저 영감…… 아니, 네 아버지가 침범했어!’
남궁천이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뜨자, 예의 그 싸늘한 표정을 유지하던 남궁검이 서늘한 목소리를 흘린다.
“어린 녀석이 그리 한숨을 쉬는 게 아니다.”
“아, 예…… 죄송합니다.”
“…….”
“…….”
결국 할 말이 떨어진 남궁검의 입에서 긴 숨이 흘러나온다.
남궁천이 눈자위를 움찔거렸다.
“방금 한숨을…….”
“세월이다.”
“예?”
“나이 들어 내뱉는 숨은 그냥 한숨이 아니라 세월이다.”
“순 어거지…….”
“뭐라 했느냐?”
남궁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난다.
남궁천이 뜨끔하면서도 얼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묘한 희열이 일어난다.
‘오, 차라리 이게 낫다. 숨이 덜 막히는 것 같아.’
그런데…….
“이젠 손자 앞에서 숨도 못 쉬겠구나.”
냉랭한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온다.
남궁천이 뱃속에서부터 거슬러 오는 한숨을 꿀꺽꿀꺽 삼키고는 창밖을 보았다.
‘차라리 살수라도 나타났으면 좋겠네.’
이 어색함을 달래줄 뭔가가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마차가 관도를 달리다가 바퀴가 빠지는 경우는 얼마나 될지 계산하거나, 갑자기 거목이 쓰러져 마차를 덮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 괜한 기대를 하게 된다. 아니면 갑자기 바위만 한 우박이 떨어져서 마차를 박살 내도 괜찮은…….
‘하아, 염병할. 내가 별생각을 다 하네.’
다시 한숨을 내쉬려던 남궁천이 남궁검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입술 사이로 공기를 비실비실 흘려냈다.
“흐으으…….”
긴장 때문인지 잠도 오지 않는다.
그렇게 일각을 일 년같이 보내는데, 마침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객점입니다. 여길 지나면 옥화산 일대를 지날 때까지 머물 곳이 없습니다요. 물론 마차를 타고 밤새 달리면 될 것 같긴 합니다만, 묵고 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뭐? 마차를 타고 밤새 달려?
순간 남궁천과 남궁검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당연히 묵고 가겠네.”
“당연히 묵고 가야지!”
“…….”
“…….”
서로를 뻘쭘하게 바라보던 두 사람이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다시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비슷한 말을 뱉었다.
“가주님이 불편하실 듯하여…….”
“네가 불편할까 봐…….”
“…….”
“……라 부르거라.”
“예?”
“커흠! 둘만 있을 땐 할아비라 부르거라. 이미 한 번 해보지 않았느냐?”
“아…… 예…….”
왜 이래, 이 영감! 더 어색해지게!
제발 그냥 평소대로 하라고, 평소대로. 나를 바위로 만들어 버릴 작정이냐!
통나무처럼 뻣뻣해져 버린 남궁천이 각 잡힌 자세로 굳어 있는데, 마침 신령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다 왔노라, 너에게 숨 쉴 공간을 허락하노라(다 왔습니다요. 내리셔도 됩니다요.).”
그러자 이번에도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며 마차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감사합니다!”
“수고했네!”
파바바밧!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동시에 객점 입구에 멈춰 섰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워진 허름한 객점.
휘이이이잉.
요란하게 내린 두 사람을 보고 피식 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현판이 삐걱 소리를 내며 기운다.
옥석객잔.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낡은 객잔이다.
그럼에도 험악한 산악 지대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 객잔이기 때문인지 안에서는 머무는 손님들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왔다.
‘아아,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곳이지. 신령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만약 이곳에서도 남궁검과 둘만 남게 되었더라면 밤사이에 객잔을 불태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궁천이 활짝 웃으며 객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옵쇼!”
점소이 하나가 우렁차게 외치며 달려왔다.
‘아, 사람 사는 냄새…… 내가 이렇게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었구나. 그렇구나.’
원래 남궁천은 홀로 지내는 걸 좋아하고,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림공적이었으니까.
여러 명이 있으면 그중 누가 자신을 노리는 놈인지 알 수가 없기에.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한 사람 정도가 아니면 무조건 혼자가 편했다.
한데 이렇게 북적북적한 공간이 소중하게 느껴질 줄이야.
남궁천이 무심결에 창가로 걸음을 옮기는데, 남궁검의 목소리가 발길을 붙든다.
“창가로…… 가려느냐?”
순간 멈칫거린 남궁천이 입을 딱 벌렸다.
‘젠장! 큰 실수 할 뻔했다!’
손님들과 동떨어진 창가에서 남궁검과 단둘이 식사를 한다? 저물어가는 석양을 보며 오붓한 식사를?
“절대 아니 될 말! 이지요…….”
“그렇지. 중앙이 좋겠다.”
남궁검도 같은 생각인지 객잔 한복판에 놓인 탁자로 걸어가서 털썩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손님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창가 자리는 아니더라도 무인이라면 보통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지 않던가?
이유는 간단하다.
혹시 모를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 자리가 좋기 때문이다.
때문에 의외로 무인들은 창가 자리보다도 객잔 구석진 벽 쪽을 선호한다.
창가는 창밖에서 암기가 날아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데 객잔 한가운데에 섬처럼 놓인 탁자에 앉다니.
참 이상한 사람들이 아닌가?
잠깐 모여들었던 시선은 이내 곧 흩어지며 두런거리는 대화 소리로 이어졌다.
“뭘 드릴깝쇼?”
점소이의 말에 남궁천이 남궁검의 눈치를 살폈다.
“고르시지요.”
“흐음. 회과육 한 접시와 소흥주를 내어오게. 그리고 너는 무얼 먹겠느냐?”
“동파육으로…….”
“손님, 죄송합니다만 동파육은 안 됩니다요.”
“아니, 그럼 적어두질 말던가?”
“헤헤, 오늘만 좀 어렵게 됐습니다요. 죄송합니다.”
하나 남궁천은 내심 감사 기도를 올렸다.
‘고맙습니다, 신령님. 이렇게 점소이를 좀 더 제 곁에 머물게 해주시는군요.’
한참이나 고민하던 남궁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백육과 마파두부 주시오.”
간절한 눈빛으로 점소이를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낭랑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곧 준비하겠습니다요!”
“아…… 이건 되는구나…….”
점소이가 자리를 뜨자마자 두 사람은 다시 침묵에 잠겨들었다.
‘그래도 마차보다는 낫다.’
확실히 주변의 소음이 왁자하니 숨은 쉴 수 있었다. 눈길을 둘 곳도 많다.
옆구리에 칼을 찬 무인, 탁자 옆에 검을 둔 무인, 몸매가 빼어난 여인, 할아버지와 여행하는 것인지 해맑게 웃으며 떠드는 아이, 아기를 어르고 달래는 여인.
그렇게 둘러보는데, 남궁검도 여기저기 시선을 옮기며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나마 덜 어색한 시간이 잠시 흐르고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풍미를 가득 품은 향기가 코끝을 스치니 배 속에서 연신 꼬로록 소리가 난다.
“받아라.”
“예, 할…… 할아…….”
“…….”
“……가주님.”
또로로롱.
남궁검이 남궁천의 술잔을 채운다.
이어 남궁천이 남궁검의 술잔을 채우고 두 사람이 술잔을 코끝으로 가져가 향기를 맡았다.
남궁검이 빙그레 웃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딘지 설레는 표정마저 느껴진다. 누군가 보았더라면 손자와 술잔을 기울이는 게 저리도 좋을까 싶을 표정이다.
한데 남궁천도 기쁨이 흘러넘치는 얼굴이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돌처럼 굳었던 그의 표정이 사뭇 다르다.
남궁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흥주가 좋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한데 두 사람이 서로 빙그레 웃을 뿐 술잔을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이 다시 술잔을 탁자에 내려두자 점소이가 얼른 달려와 물었다.
“손님, 혹시 불편하신 점이 있으신지요?”
그러자 남궁검이 남궁천을 보며 물었다.
“네가 하겠느냐?”
“가주님이 하시지요.”
“할아비라고 부르면 하마.”
“제가 하겠습니다.”
“정 없는 녀석.”
허! 신령이 들으면 대노하실 말씀을 하시네. 지금 누가 누구에게.
남궁천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관두자, 관둬.’
그러더니 젓가락을 집어 들고는 곧장 옆으로 휙 뿌리는 게 아닌가?
쉬쉭!
그의 손을 떠난 젓가락이 점소이의 목으로 날아가 그대로 틀어박혔다.
푸푹!
점소이가 두 눈을 부릅뜨더니 목을 움켜쥐며 그 자리에 무릎을 쿵 꿇었다.
“커컥……! 이익……!”
점소이가 입을 딱 벌린 채 넘어가질 않자, 남궁천이 그제야 술잔을 들고는 점소이의 입에 술을 부었다.
쪼르르르르.
“커컥……! 컥!”
점소이가 울컥거리며 피를 토하면서도 몇 모금의 술을 삼켰다.
이내 남궁천이 웃으며 남궁검을 보았다.
“다행히 술은 멀쩡한가 보네요.”
“그렇구나. 그래도 오래 살진 못하겠다.”
“동맥이 파열됐으니까요.”
놀랍게도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화하는 게 아닌가?
도저히 이제 막 점소이를 죽인 사람들 같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마차에 있을 때보다도 훨씬 편안한 표정이었다.
남궁천은 남궁검이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편안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 신령님, 감사합니다!’
주변의 경악한 시선을 무시한 채 남궁검이 술잔을 들며 태연히 묻는다.
“어찌 알았느냐?”
“검지와 소지에 박힌 굳은살을 보고 알았습니다. 엄지 안쪽에도 마찬가지고요.”
“호오, 제법 눈썰미가 있구나.”
당연하지.
내가 전생에 이 눈썰미 하나로 수십 년을 살아남았는데.
남궁천이 그런 생각을 삼키며 희미하게 웃었다.
“보통 쌍도를 사용하는 자들의 파지법이죠. 점소이라면 오히려 손가락 끝이나 손바닥에 굳은살이 있어야 할 테고.”
“네 말이 옳다. 썩 괜찮다.”
“감사합니다.”
남궁천이 씨익 웃고는 술잔을 들이켰다.
이렇게 즐거울 수가.
너무 즐겁다.
마차 타고 올 때와 달리 할 얘기거리가 너무나 많지 않은가?
이젠 웅성거리는 사람들마저 무시한 채 남궁천이 물었다.
“할아…… 할아…… 젠장, 가주님은 누가 좋습니까?”
“저 아이를 품은 아낙이 좋구나.”
“과연. 어째섭니까?”
“아이를 보는 눈에 온기가 없다.”
“역시 연륜이라는 건 때론 논리보다 무서울 때가 있군요.”
“하면 너의 논리는 무엇이냐?”
“젖먹이를 안고 있으면서도 언제든 먹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 허름한 옷차림에도 가슴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천으로 가슴을 동여맸다는 뜻이죠. 이는 활동성을 위해 무인이나 하는 것이고요.”
“어째 여인의 몸에 대해 잘 아는 것 같구나?”
남궁검의 눈매가 짐짓 매서워졌다.
“어어……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십쇼. 그저 눈썰미가 좋을 뿐입니다.”
“그래, 믿어주마.”
남궁검의 말이 떨어질 때만 해도 아이를 품은 여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순간,
“경거망동 말도록.”
피융!
순간 남궁검의 손짓에 탁자에 놓인 젓가락이 화살처럼 날아가 여인의 이마 중앙에 틀어박혔다.
푹!
털썩!
여인이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댄 채 눕자 품에 안겼던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려 댔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손님이 약속이나 한 듯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 들며 소리쳤다.
“이 개 같은 놈들이!”
“죽여 버려엇!”
순간 벌떼처럼 날아드는 적들 복판에서 남궁천이 술잔을 든 채 활짝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 사는 냄새가 나니까 좋네요.”
“그렇구나.”
모처럼 숨통이 트인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