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이건 아니잖아!
콰앙!
무림맹주 묵천악이 집무 책상을 거칠게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앞에서 보고를 올리던 총관이 어깨를 움찔거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묵천악이 수염을 푸들푸들 떨면서 말을 흘려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저어…… 맹주님 일단 고정하시고…….”
“고정하게 생겼나, 지금!”
“…….”
총관이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묵천악이 한참이나 씨근거리다가 창가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찬바람이 실내로 훅 들어온다.
조금은 머리가 맑아진 묵천악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봉문이라니. 소림이 봉문이라니!”
거듭 곱씹어도 분한 모양인지 묵천악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흑도인들이 하남으로 진출하기가 무섭게 소림이 봉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애초에 소림과 무당은 무림맹과 그리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를 적당히 견제하면서도 일절 간섭하지 않는 사이였다.
묵천악은 그런 소림과 무당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결국 그 둘도 무림의 일원이면서 마치 강호에서 일어나는 대소사에 대해서는 일절 모르쇠하며 뒷짐만 지고 고상한 척하니까.
정마대전에서도 소림과 무당은 마지막에서야 참여하지 않았던가?
당시 무림맹이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마교를 토벌했지만, 마지막에 소림과 무당이 개입하면서 모든 공을 가로챈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를 익히고 경을 읊는 것들이 속내는 무림인만큼이나 시커멓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에도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지금 소림의 봉문은 진짜 봉문이 아니다.
그야말로 무늬만 봉문.
내실은 단단히 다지면서 그저 강호의 일에 일절 개입하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이나 다름없다.
흑무련 입장에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강호의 태산북두 중 하나가 발을 빼겠다니 이보다 수월한 일이 어디 있을까?
“나를 무시하는군.”
묵천악이 쫙 깔린 음성을 흘리자, 총관이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맹주님, 다소 과민하신…….”
“과민이라? 아니지. 그게 아니지.”
묵천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림과 무당은 강호에서도 첫 손에 꼽는 대문파다.
한데 맹주가 족보도 없는 문파 출신이라는 게 영 못마땅했으리라.
“그들은 예전부터 그랬다. 내가 맹주가 되기 전부터 맹의 일에 개입을 했지. 내가 맹주가 될 때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자들이었고!”
물론 맹원도 아닌 두 문파가 반대해 봐야 실효성은 없다.
하나 이 또한 정치이고 외교다.
강호의 태산북두가 반대하는 자를 맹주로 만드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
우여곡절 끝에 맹주 자리에 올랐더니, 그 이후로는 사사건건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다.
“흥! 언제는 그들의 도움을 받고 강호를 지켰던가? 이참에 아예 영원히 봉문하는 게 낫겠군.”
묵천악이 차갑게 일갈하고는 돌아섰다.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아까보다는 나아진 얼굴이었다. 총관을 스쳐 지나간 맹주가 다시 집무 책상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하면 이제 흑무련이 북쪽을 완전히 장악한 셈이 됐군.”
“그렇습니다. 하남이 뚫려 이대로 남하하면 본 맹이 직격탄을 받게 됩니다.”
“총군사는 뭐라던가?”
“그럴 경우 아직은 세가 약한 흑무련이 피해를 많이 입게 되므로 당장 내려오진 않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하면?”
총관이 집무 책상에 펼쳐진 지도 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더니 옆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이렇게.”
“섬서로 가겠다는 말인가?”
“예, 하나씩 장악해 가려는 생각인 듯합니다.”
“섬서에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버티고 있을 터인데.”
“본 맹으로 바로 들어오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총군사의 의견입니다. 하여 그쪽도 그렇게 움직일 거라고 하더군요.”
“하면 적랑단을 파견해서 두 문파를 돕도록 해야겠군. 우선은 하남에서 더 가까운 화산이 위험하겠어.”
“그렇습니다. 화산과 종남이 먼 거리는 아니지만, 두 문파의 특성상 서로 힘을 합쳐서 싸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흑무련도 그걸 이용하려는 것이겠지.”
“그런 듯합니다.”
묵천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흑무련의 움직임은 영악하다.
문득 흑무련이 소림과 무림맹의 관계도 이해하고 이렇게 움직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면…….
‘흑무련에도 잔머리를 쓰는 자가 있다는 뜻이렷다.’
잔챙이들이 갑자기 설쳐서 한 방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마교 놈들은 일을 그딴 식으로……!’
묵천악이 이를 빠득 갈고는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떠올랐다.
‘그 멍청한 것들이……!’
다 된 밥을 퍼 먹지도 못하고 게워 내다니!
남궁세가의 일을 잠시 떠올린 묵천악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물었다.
“하북 쪽은 어찌 되었나?”
“진주언가와 팽가가 우선 가장을 버리고 합비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산동악가 역시 피해를 크게 입은 관계로 안휘성으로 향했습니다.”
“무림 평판이 말이 아니겠군.”
묵천악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총관이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썩 좋지 않습니다.”
총관이 이 정도로 말할 정도면 역대 최악이라는 소리다.
늘 긍정적으로 말하던 그였으니까.
묵천악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분 탓일까?
무연회를 치른 이후로 뭐 하나 뜻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하대살성 진천랑을 죽인 이후로 그렇다.
망자의 기운이라도 받은 것인지 그 아들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서 모든 일을 다 망치고 있다.
남궁천…… 남궁천……!
그 아비는 그래도 무림맹을 결집시키기 위해서 요긴하게 잘 써먹었는데, 그 아들놈은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이번 남궁세가를 습격했던 일도 그렇고!
이렇게 무림맹의 평판이 떨어지고 있을 때, 남궁천을 잘 이용하면 좋겠건만.
마교는 그 습격에서 실패한 후로 바짝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백묘가 찾아와 따지는 바람에 한차례 엄포를 놓았더니 이젠 찾아오지도 않는다.
‘쓸모없는 것들…… 그러니 토벌이나 당하지!’
길게 한숨을 내쉰 묵천악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남궁세가는 어떤 상태인가?”
“가주와 소가주가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목적지는 사천당가로 파악됩니다.”
“사천당가라.”
묵천악이 미간을 좁혔다.
‘마신단의 단서를 찾은 모양이군.’
애초에 백묘가 자신을 찾아와 남궁세가를 치겠다고 했을 때, 묵천악은 마신단이나 마검이 관계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교가 저렇게도 마단곡 영단에 집착하겠나?
한데 남궁 가주가 사천당가를 찾아간다면 마신단의 단서가 나온 것이리라.
총관이 말을 이어갔다.
“합비 분타에서 재난 문파로 선정하여 지원까지 받는 바람에 재건 속도가 빠른 상황입니다.”
묵천악이 혀를 찼다.
합비 분타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찾아서 하는 바람에 짜증이 일어났지만 어쩔 수 없다.
너무 깊이 개입하면 오해를 사기 쉬울 테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궁천 때문에 약이 오른 건 자신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흑무련 역시 팽가와 진주언가를 밀어버리려다가 실패하지 않았던가? 자신만큼이나 남궁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남궁천…… 영웅으로 만들어주겠다는데 자꾸 거부하는군.’
묵천악이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물었다.
“손님은?”
“부르겠습니다.”
총관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가 지팡이를 짚으며 들어왔다.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노파였는데,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노파가 그러잖아도 굽은 허리를 더욱 숙이며 말하자, 묵천악이 냉소를 지었다.
“새삼스럽게 예를 차릴 것 없네. 자네 주인은?”
“잘 지내고 계십니다.”
“그렇겠지. 내가 지금 관심을 두지 않으니.”
맹주의 말에 노파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묵천악이 그런 노파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싸늘한 음성을 흘렸다.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여태 숨을 쉬고 있는 것은 본 맹의 아량 덕분이라는 걸 명심해야 할 터.”
“그런 쓰레기도 이리 불러주시니 감개무량합니다.”
말에 뼈가 있었지만, 묵천악은 냉소를 지었다.
“재활용이라는 거지. 먼 훗날 쓰레기가 넘쳐나는 시대가 오면 진짜 재활용이라는 개념이 생길지도.”
“재활용이라. 하면 그건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닌 듯합니다만.”
“쓰레기다. 버리면 쓰레기. 다시 사용해 주면 재활용. 그러니 너희들은 내게 감사해야겠지.”
“감사 인사나 듣자고 부르신 것은 아니실 테고.”
“살곡주(殺谷主)에게 전해라. 남궁천과 남궁검을 제거한다면 무림공적 명단에서 영구 제외시키겠다고.”
“……!”
노파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가 잠시 후 길게 숨을 토해내고는 확인하듯 물었다.
“남궁세가입니까?”
“그렇다.”
“어째서 다 쓰러져 간 남궁세가를…….”
“늙은이가 호기심이 많군.”
“영구 제외. 확실한 겁니까?”
“약속하지.”
묵천악이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노파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지금은 쓰레기를 이용해서 영웅을 만들어야 할 시기니까.”
“하나 그럼에도 보수를 받지 않고선…….”
“착수금 이십만 냥. 성공하면 다섯 배를 더 주지.”
“백만이라…….”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던 노파가 허리를 숙였다.
“곡주께 전하지요.”
“그만 꺼지시게.”
“그럼.”
다음 순간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방구석 그늘진 어둠 속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홀로 남은 묵천악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남궁천. 어디 버틸 때까지 버텨보아라. 끝내 버틴다면 네 아비의 길을 안내해주마.’
* * *
마차 한 대가 관도를 따라 부지런히 달렸다.
남궁천은 열린 창을 통해 하늘에 뜬 구름을 보았다.
‘구름 하나, 나 하나…… 구름 둘, 영감 둘…… 구름 셋…… 아오! 진짜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는 거야?’
남궁천이 머리를 벅벅 긁다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남궁검이 조금은 편해지나 싶었는데, 이렇게 둘만 남게 되니 그 어색함에 손발이 오그라들면서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숨 막힌 정적이 흘렀을까?
“요즘 어떠냐?”
남궁검이 불쑥 묻는 질문에 남궁천이 흠칫거렸다.
요즘 어떠냐니?
무슨 질문이 그래?
뭐라고 대답해야 해, 이거?
“어…… 뭐…… 좋습니다?”
“그렇군.”
“…….”
“…….”
어색하다.
이 어색함이 몸서리치게 싫다.
뭔가 적당한 말이 없을까?
눈동자가 여기저기 헤매다가 남궁검과 딱 마주쳤다.
“아…… 저어…….”
“말해라.”
“요즘 좀…… 어떠신지요?”
“…….”
“…….”
“썩 괜찮다.”
“그렇…… 군요.”
“…….”
“…….”
결국 참다못한 남궁천이 창밖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프하!”
진짜 못할 짓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여행을 떠나면 돌처럼 굳어서 돌아온다더니.
외조부와 손자도 이럴 줄이야.
아니지. 장인어른과 사위라고 봐야 하나?
그러고 보니 이 어색함이 또 이해가 되네.
아니, 그런데 자신은 그렇다고 쳐도 손자를 대하는 저 영감의 태도는 뭐란 말인가!
마침 남궁검이 또 묻는다.
“창밖으로 고개 내밀고 뭐 하는 것이냐?”
“아…… 공기 좀 쐬었습니다.”
“그래…….”
얼른 자리로 돌아온 남궁천이 다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눈알 구르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가을도 저무는군요.”
“그렇구나.”
“…….”
“…….”
“배는 고프지 않으냐?”
“밥 먹은 지 아직 반시진도 지나지 않아서요.”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
“…….”
“요즘 취미는…….”
“……?”
“됐다. 관두자.”
“…….”
“…….”
아, 나 이제 그만 내릴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