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마교를 책으로 배웠습니다
무거운 침묵.
하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들.
애꿎은 찻물만 자꾸 들이켜는 사람들을 보면 지금 얼마나 속이 시끄러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남궁세가 무인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은근한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외면한 결과가 얼마나 혹독한지 잘 알고 있다.
이제야 겨우 밑바닥 상황에서 벗어나 조금씩 오름세를 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앞에 까마득한 암벽이 나타난 셈이 아닌가?
무림맹을 상대한다는 건 곧 강호 전체를 상대한다는 것.
그건 다시 말해서 남궁세가가 또 한 번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소리나 진배없다.
이제야 겨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가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다시 세상의 외면과 맞서야 한다?
두렵다.
하나 동시에 치밀어 오는 또 다른 감정은 분노다.
대살성과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남궁세가를 그리 철저하게 외면하고 배척했던 무림맹이 아닌가?
한데 마교와 결탁을 하다니! 그러고도 뻔뻔하게 만인을 속이고 정의와 협의를 운운하다니!
그렇게 공포와 분노가 혼탁하게 섞인 상황에서 남궁설희가 돌연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콰앙!
모두가 움찔거리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 비열한 것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녕 본 가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본 가를 그리도 철저하게 멸시할 땐 언제고! 뒤로는 마교와 손을 잡고 있었다고? 고얀……! 그 늙은 구렁이가 우리를 철저하게 기만하고 있었군요!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그녀의 일갈에 남궁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할멈, 역시 마음에 든다니까.’
남궁천은 남궁설희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원래 품위를 우선으로 따지는 그녀다.
화가 나더라도 냉정하고 차갑게 말을 뱉을 뿐, 흥분해서 소리치는 성품은 결코 아니다.
한데 지금 그녀가 마치 남궁표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나?
다른 이는 모르겠지만, 남궁천은 그녀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두려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는 세가의 사람들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지금은 두려움을 느낄 때가 아니라, 분노할 때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남궁표가 중상을 당해 자리에 없으니 그녀가 대신 그 역할을 하고 나선 것이다.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확실히 그게 사실이라면 맹을 가만히 둘 수는 없겠습니다. 본 가가 어지간히 우습게 보인 게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요. 맹은 본 가를 두려워해서 견제하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드는군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소! 그렇다면 더욱 본 가가 맹에게 굽히고 들어가선 안 된다고 봅니다!”
“옳소! 감히 그딴 짓을 하여 본 가를 짓밟으려고 했다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해줘야 할 거요!”
“이건 본 가와 맹의 문제만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맹은 본 가뿐만 아니라 정도 무림 전체를 기만한 것입니다!”
수뇌인사들이 조금씩 흥분하여 떠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침묵은 공포를 부르지만, 소란은 분노를 불러오는 효과가 있었다.
한동안의 소란을 지켜보던 남궁천이 다소 잠잠해진 틈에 말을 꺼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맹의 인지도가 높아요. 본 가도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는 상황이죠. 괜히 나섰다간 오히려 역풍에 휘말릴 수도 있고요. 그만큼 사람들은 무림맹을 맹신하고 있으니까요.”
“하면 소가주의 생각은 어떠신가?”
장로 한 명이 끼어들어 남궁천에게 묻는다.
지금껏 어린아이 취급만 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다. 오히려 장로가 답을 구하려는 아이의 표정이 되어 쳐다보고 있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회를 봐야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마교에게 당했다고 떠들어도 무림맹이 인정하지 않으면 믿어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굳이 마교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죠. 그편이 우리로서도 좋고요.”
“그건 어째서 그런가?”
“마단곡 영단을 가지고 있다는 걸 떠들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아……!”
“만약 이 모든 판을 맹이 꾸몄다면, 본 가는 그 판에서 한바탕 놀아주면 되죠. 지원금이나 최대한 끌어 쓰면서. 대신 우리의 진짜 적이 누군지 확실히 인식은 해야합니다.”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설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방에 나쁜 놈들 천지구나. 흑도인도 문제인데 무림맹까지 이 난리라니. 거기에 마교도 그렇고.”
“세상이 원래 그렇죠. 이용하는 자와 이용당하는 자만 있을 뿐.”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실 어찌 보면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었다.
꽤나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즐비한 이 자리에서 약관도 채우지 못한 남궁천이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 그 말투와 표정, 그리고 생각들이 보통 사람들과 어딘지 달라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남궁천이 입매를 슬쩍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도 그냥 이용하면 됩니다. 맹주도 이용해 보고, 흑도인도 이용해 보고, 때론 마교도 이용해 보는 거죠.”
“하면 소가주는 앞으로 누굴 이용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가?”
남궁설희의 물음에 남궁천이 잠깐 표정을 굳혔다가 입을 열었다.
“제일 먼저는 마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교?”
남궁설희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뜻밖의 대답이라 여기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마교가 어디에 틀어박혀 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교요.”
“이유가 뭔가?”
“이상해서요.”
“그러니까 뭐가?”
“마단곡 영단 중에서 마교가 제조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아요. 대부분 정마대전에서 소진해 버렸으니까요. 오히려 정공을 익힌 자들에게 유익한 영단이 훨씬 많죠.”
“한데?”
“그런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본 가를 쳤을까요? 실패하면 마교의 잔당이 남았다는 사실을 들킬 수도 있는데. 물론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만큼 많은 인원으로 기습을 감행했다는 건 무조건 물건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보이잖아요? 그게 좀 이상합니다.”
듣고 보니 그렇다.
마인들의 머릿수는 남궁세가 무인들의 머릿수보다 훨씬 더 많았다.
게다가 마교 장로까지 직접 왔다.
마교 장로의 경우는 남궁천이 처음부터 맞서 싸웠다면 그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자였다.
다만 남궁검과 공력 대결을 펼치면서 상당히 지친 상태였기에 손쉽게 상대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남궁천이 가져온 강령신단과 백령단이 있었기에 마지막에는 마인들을 섬멸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마교가 단단히 마음먹고 찾아왔다는 말이다.
몇 알 안 되는 그 영단을 훔치겠다고. 그 많은 인원이?
확실히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마단곡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꼼꼼히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거기에 단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예, 합리적인 의심이죠. 혹시 마단곡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대단한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과연. 마교를 이용하겠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군.”
남궁설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말단에 앉아 있던 창응대주 손우곤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창응대가 당장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애초에 영단을 옮긴 것도 창응대였다. 이 일에 가장 적합하기도 했다.
남궁천과 시선을 주고받은 남궁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남궁천을 다시 돌아보았다.
“만약 뭔가를 찾는다면 어찌할 생각이냐?”
“좋은 것이라면 취하고, 나쁜 것이라면 떠넘겨야겠죠.”
“흐음.”
남궁검이 침음을 흘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말은 쉽다.
하나 세상이 어디 그리 단순하게만 흐르던가?
그럼에도…….
‘내 너를 믿어보마.’
남궁검의 눈빛에 신뢰가 들어찼다.
* * *
다음날.
지객당에서 하룻밤을 묵은 견습생들은 이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고 남궁세가를 나섰다.
이미 아버지를 따라 황산윤가로 돌아갔던 윤종승도 동기들을 배웅하기 위해 마을 어귀의 야트막한 언덕으로 나와 있었다.
“나는 혹시 모를 일이니 언가로 돌아가 있겠다. 본 가와 언가는 남궁세가와 뜻을 함께할 거다.”
팽수혁의 말에 유현도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어제 들은 이야기는 너무 놀라운 것이라 저 혼자 화산의 결정을 말씀드리긴 어렵겠습니다. 하나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게 됐군요. 저는 남궁 소협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만 화산의 입장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가 남궁 소협과 뜻을 함께할 거라는 겁니다.”
“그러다 파문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그렇게까지 화산의 도가 저와 다르다면…….”
유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남궁천은 그 뒤에 숨은 뜻을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껏 봐온 유현은 자신의 결단을 믿고 추진하는 성격이다. 그게 때론 좀 과해서 문제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진소홍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야 뭐, 알지? 투자를 시작한 이상 뒤는 돌아보지 않아. 위험이 높을수록 보상도 큰 법. 점점 더 기대되는데?”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진소홍은 상인의 딸이다.
“그럼 다들 잘 돌아가라. 나와 종승이는 가문의 문제로 맹으로 복귀하기 어려워졌다고 전해줘.”
“맡겨주십시오.”
“물론이지.”
유현과 진소홍이 동시에 대답했다.
남궁천이 팽수혁을 돌아보다가 옆구리에 차고 있는 칼로 시선을 옮겼다.
바로 혈영신마가 사용하던 혈염도였다.
“그건 또 언제 훔쳤냐?”
“훔, 훔치다니! 엄연히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웠을 뿐이다!”
“호오, 먼저 주운 사람이 임자다?”
“안 될 것이 뭐냐? 어차피 주인이 죽은 마당에. 그리고 너도 마단곡 영단을 먼저 주웠다는 것만으로 주인 노릇을 하고 있잖아!”
남궁천이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팽수혁을 보았다. 생각보다 팽수혁의 반박이 꽤 논리적이었기에.
“그렇군. 돌 같은 네 머리도 자라기는 하는구나. 한순간 똑똑했다.”
“뭐? 그거 어째 날 욕하는 소리 같다만?”
“머리가 똑똑하다는데 그게 어째서 욕이냐?”
“그런가?”
팽수혁이 아리송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다들 다음에 또 보자고.”
그렇게 견습생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남궁천은 곧장 가장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인 데다 증축 공사도 계속되고 있어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거기에 한쪽에서는 장례식으로 정신이 없는 상황.
마침 복성이 헐레벌떡 달려와 남궁천을 맞이했다.
“공자님, 오셨군요.”
“그래, 복성아. 이번엔 황산윤가를 잘 설득했다더라.”
“아, 그거야 뭐…… 헤헤.”
복성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는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자신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복성이 얼른 말을 붙였다.
“아, 공자님! 어서 가주전으로 가보셔야겠습니다. 다들 공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요.”
“가주전에서?”
“예! 마단곡 영단의 상자에서 뭔가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