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마교를 책으로 배웠습니다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올랐다.
하루 동안 대략의 정비를 끝낸 남궁검은 심청원 후원 한쪽에 간단히 다과를 차리게 하고는 가회를 열었다.
원래라면 어제 오후부터 열렸던 정회를 이어가야겠지만, 당장 더 큰 문제가 갑자기 산더미처럼 생긴 상황.
때문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벌써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어제저녁에만 해도 함께 둘러앉아 회의하던 수뇌인사들 중 상당수를 더는 볼 수 없게 됐다는 점이었다.
중상을 입어 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나 장로원의 중심이라 할 수 있었던 남궁헌상은 마단곡 영단을 지키려다가 마교도에게 목숨마저 잃지 않았던가?
때문에 장원 한쪽에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를 치르느라 또 여념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살아남은 자들도 온전히 기쁨을 누릴 수 없었고, 마냥 슬퍼하기에는 닥친 문제가 시급했다.
그나마 수뇌인사들이 빠진 자리를 황산윤가와 견습생들이 메우고 있었기에 허전함은 덜했다.
어쨌든 그렇게 장례 등에 대한 절차와 세가 재정비에 관한 토론을 마친 남궁검은 가까이에 앉은 합비 분타주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래도 이렇게 먼저 본 가를 찾아주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줘서 고맙네. 자네 덕분에 막막했을 일이 조금은 풀렸네.”
“끄음.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단단히 코가 꿰인 합비 분타주가 세상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식은땀을 닦았다.
그는 저만치 앉아서 싱글벙글 웃는 남궁천을 보자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게 다 저 녀석 때문에!’
뭐 따지고 보면 문제 될 건 없다. 실제로 남궁가에 와 보니 흑도인들이 기습을 감행한 상황이었고, 자신은 적절하게 도움을 준 셈이니까.
다만 남궁천이 자신의 정수리를 박살 낼 듯 후려친 것에 대한 분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오래 앉아 있어 봐야 기분만 더러워질 것 같아서 눈치껏 일어났다.
“하면 말씀 더 나누십시오. 저는 시간이 늦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어디로 가시려고? 지객당이 조금 부서지긴 했지만 하루 정도는 묵을 만할 걸세.”
“아닙니다. 정비하실 일도 많으실 텐데, 저는 근처 객점에서 머물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분타에서 다양한 지원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금정각주님과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살펴 가시게.”
“예, 그럼.”
분타주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떠나고 나자 수뇌인사들이 이번만큼은 밝은 표정으로 말을 쏟아냈다.
“분타주가 본 가를 돕겠다니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재난 지원금이 생각보다 넉넉하더군요.”
“사실 인명 피해는 억만금으로도 돌이키기 어렵겠지만, 물질적 피해는 대부분 복구하고도 남을 듯합니다.”
그러자 윤첨산도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본 가도 이번엔 남궁 가주님의 덕을 보게 됐습니다.”
“별말을. 당연한 일일세.”
남궁검의 무뚝뚝한 말투에 윤첨산이 쓴웃음을 지었다.
대신 남궁효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실 윤 가주께서 오셨을 때는 놀랐습니다. 외면할 수도 있을 일인데, 이리 도움을 주실 줄이야. 어찌 그런 용단을 내리셨습니까?”
“그야 안 그러면 내 아들이 호구…….”
“으음?”
“커흠! 다 이웃 된 도리가 아니겠소? 마땅히 할 일이었을 뿐이오.”
“하하하! 오늘 윤 가주님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대체 그간 날 어찌 봤기에…….”
윤첨산이 짐짓 기분 상한 표정을 짓자, 남궁효가 손사래를 쳤다.
“별 뜻 없는 말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하나 남궁세가 사람들은 그 속뜻을 이미 아는지라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래도 남궁효의 말대로 윤첨산을 이번 기회에 다시 보긴 했다. 그는 진짜로 지원을 왔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남아서 싸워주지 않았던가?
그게 다…….
‘소가주 덕분일 터.’
모두의 시선이 잠깐 남궁천에게 머물렀다.
남궁천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술이라도 부리는 걸까?
남궁천이 죽음에서 돌아오고 나서 모든 게 변했다.
참 희한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남궁세가의 몰락은 대살성 때문이었고, 재기의 발판은 그 아들 때문에 이뤄지는 중이었다.
남궁검도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네가 모든 걸 바꾸고 있구나.’
오늘 이렇게 시끄러운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가문이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이 든다.
그동안 자신의 방식이 옳기만 했던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문이 쓰러지지 않게끔 든든한 기둥은 되었을지 몰라도, 바닥을 딛고 다시 성장하진 못했다.
한데 남궁천이 그걸 해내고 있다.
마침 남궁천이 이쪽을 돌아보면서 남궁검과 시선을 마주쳤다.
남궁검은 무언의 시선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간 나의 방식이 틀린 것이더냐?’
‘영감은 틀리지 않았소. 가장 어려운 시기를 영감이 버텨주었기에 오늘 내가 용트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버티고, 버텨주어 진심으로 고맙소.’
남궁천은 다시 한번 그런 마음을 담아 슬쩍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는 사이 남궁효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자, 그럼 상황이 다소 애매해지긴 했지만, 어젯밤에 회의하던 것을 마무리 짓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가주에게 포상을 내리는 것에 관해서요.”
그러자 이번엔 누구 하나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멸문의 위기에 처했던 세가가 남궁천의 등장으로 완전히 전세를 뒤집지 않았나?
그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오히려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일 뿐이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더니, 지금 남궁세가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똘똘 뭉쳐진 마음이었다.
하나 남궁천이 다른 말을 꺼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지금은 그걸 논의할 때는 아닌 것 같네요. 그리고 전 이미 가질 만큼 가져서요. 대신 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문제?”
남궁효가 돌아보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모두가 침묵한 채 남궁천의 말을 경청했다. 어느샌가 그들 모두 남궁천을 남궁검만큼이나 세가의 기둥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일단 우리의 적이 누군지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네요. 합비 분타주는 흑도인의 소행으로 알고 돌아가긴 했지만, 여러분은 직접 손을 섞어보았을 테니 이들의 진짜 정체를 눈치채셨을 겁니다.”
많은 이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첨산이 묵직한 음성을 흘렸다.
“마교.”
“맞아요. 마교죠.”
“마교 잔당들이 아직도 남아 있단 말인가?”
“하루살이처럼 가벼운 것도 무인의 목숨이지만, 바퀴벌레보다도 질긴 게 또 무인의 목숨이죠.”
“좋아, 그렇다고 치세. 뭐, 내 손으로 직접 겪었으니 부정할 수도 없지만. 한데 지금껏 숨죽인 채로 지내던 마교가 왜 갑자기 남궁세가를 친 건가?”
윤첨산이 이맛살을 푹 찡그리며 묻는다. 그는 방금 ‘남궁세가’라고 표현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남궁천이 중심이 된 남궁세가는 더 이상 추락하는 가문으로 보이지 않았다.
남궁천의 입에서 예상 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건 본 가가 마단곡 영단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마단곡 영…… 뭐, 뭣? 마, 마단곡 영단!”
윤첨산이 눈을 크게 부릅뜨고는 입을 딱 벌렸다. 놀란 사람은 또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지금 마교의 보고라는 그 마단곡을 말하는 게 맞아?”
남궁천에게 소리치는 또 한 명은 바로 윤종승이었다.
“맞아.”
“그게 왜 여기에 있는 건데?”
“내가 가져왔어.”
“어엉? 언제?”
윤종승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단곡 영단이 무슨 마실 내려가서 봇짐장수에게 사 오는 노리개도 아니고.
아니, 다른 것보다도 지금껏 황산에서만 머물다가 견습 생활도 거의 함께했는데 도대체 어느 틈에 마단곡 영단을 챙겼단 말인가?
잠깐만…….
‘근데 이것들은 왜 아무렇지도 않아?’
윤종승이 고개를 돌려서 다른 견습생들을 보았다. 세 사람 모두 너무나 태연한 모습이 아닌가?
“뭐, 뭐야? 너희들 알고 있었던 거냐! 어떻게? 왜? 어째서 나만 빼고! 가, 가만…… 설마 나만 빼고 너희들 벌써 영단 맛을 봤다거나……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나진 않았겠지? 우, 우리 친구잖아? 그치?”
이제는 윤종승이 애처롭게 보일 지경이었다.
진소홍은 그런 윤종승을 보며 진심으로 살짝 미안한 마음까지 일어났다.
“미안해…….”
“사과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런 일은…… 그런 일은 상상하고 싶지도…… 크흑…….”
윤종승이 눈시울까지 붉히자,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마교 놈들이 이곳에 쳐들어온 거죠.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마교 본거지를 찾아서 헤매기는 어렵고요.”
“하면 무림맹에 알리면 되지 않겠나?”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남궁천이 윤첨산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윤첨산이 이맛살을 구겼다.
“무슨 문제?”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본 가가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개방에서 전한 소식도 그랬지만, 하필 그 시점에 합비 분타의 무인들을 대거 차출한 것도 마음에 걸렸죠. 남궁세가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모르쇠하기 딱 좋으니까요. 그리고 합비 분타에서 무력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말도 빌릴 수 없었고요.”
“그럼 자네 말은 무림맹이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란 말인가?”
“그 정도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맹이 마인들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라면…….”
“가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설마 자네 지금 맹을 의심하는 것이야?”
윤첨산이 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짓자,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정황이 그렇다는 겁니다. 사실 마단곡의 위치를 알게 된 것도 맹과 무관하지 않거든요. 또 무연회에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맹은 본 가를 탐탁지 않게 여기죠.”
“그거야 잠시나마 그런 적은 있을지라도 자네를 강호신룡으로 추대한 것 또한 맹주님이 아니시던가?”
맹주는 무슨.
다 내가 쟁취한 거지.
남궁천은 내심 차갑게 조소하면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 강호신룡이 추락하길 가장 바라는 사람도 맹주일지도 모릅니다. 무림맹 입장에서는 천하대살성의 사생아가 강호의 상징이 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길 테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맹주님이 마교와 손을 잡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 보기에 자네는 피해망상이 심하네!”
윤첨산이 남궁검을 보며 말했다.
“남궁 가주님께서도 한 말씀 해주시지요? 저 아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소가주일세.”
“예?”
“저 아이가 아니라 본 가의 소가주일세.”
“아…… 커흠…… 저 소가주가 당최 말도 안 되는…….”
“말이 된다면?”
“예에?”
윤첨산이 다시 눈을 퉁방울처럼 부릅떴다.
“아니, 가주님! 맹주님에 대해서는 가주님이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한데 어찌 그런 말씀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걸세. 맹주는 그럴 수 있는 자야.”
“……!”
순간 좌중의 사람들이 얼음을 삼킨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됐다. 특히 견습생들은 갑자기 뜻밖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남궁검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래, 묵천악 그 친구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자다.’
그 오래전 묵천악이 마교의 잔당을 살려주지 않았던가? 남궁검은 그걸 직접 보았다. 그때의 대립으로 자신이 맹을 조금 더 일찍 떠났던 것이기도 하고.
‘묵천악, 자네 정녕 이렇게까지 나온단 말인가?’
확실히 남궁천의 말대로 일련의 과정들이 자연스럽지 않다.
도절귀가 맹과 엮인 게 단순히 우연이라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많다.
또 대규모의 마교도가 은둔지에서 나와 본 가를 칠 때까지 무림맹의 눈귀가 이렇게 어두울 수 있나?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지 않는 이상에야.
개방도 그 움직임을 눈치챘을 마당인데.
하나 개방도 마교도인 줄은 몰랐다.
흑도인들로 착각했다.
아주 치밀하게 잘 짜인 극본이지 않은가?
이 모든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이다.
무림맹주 묵천악.
숨 막힐 듯한 침묵 끝에 진소홍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정말로 무림맹이 마교도와 손을 잡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알 수 없다. 하나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런……!”
진소홍도 적지 않게 놀란 듯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견습생들 모두가 경악하고 있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너무 무서운 소리를 들어서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이대로면 무림맹을 적으로 돌릴 상황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