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마교를 책으로 배웠습니다
“끄아아아압!”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던 마교도가 발작처럼 비명을 내지르더니 곧 얼굴이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퍼억!
“……터졌네.”
멀찍이 물러나 있던 남궁천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끔찍한 시체가 되어버린 흑의인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터졌네.”
마지막 포로도 터져 버렸다. 이전의 포로들은 조용히 독단을 깨물어 자결했는데, 유독 이 녀석만 얼굴이 화약처럼 터졌다.
이상한 낌새를 채고 멀찍이 물러서지 않았더라면 그 폭발에 남궁천도 피해를 입었으리라.
“에이, 사람 놀라게. 쯧.”
별로 놀란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남궁천이 투덜거리며 피투성이가 된 시체로 걸어갔다.
이제 남은 포로는 없다.
“아, 내가 이래서 그냥 좋게 끝내려고 했건만.”
남궁천이 영 아쉬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궁세가는 한창 재정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부상당한 사람들을 의원으로 데려가고, 시체를 치우고, 무너진 담벼락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다시 부아가 치민다.
“아니, 왜 말을 안 들어? 내가 그렇게 합리적인 선택을 하라고 했는데!”
남궁천이 흑천마객을 때려 죽였을 때, 흑의인들은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한 놈만 패면서 풍겨댄 살벌한 기운도 그 한 놈이 죽어버리니 별 의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마교도 놈들은 죽을 각오로 싸우기 시작했고, 결국 남궁천을 비롯한 남궁세가 무인들도 맞서 싸웠다.
그 결과 포로 몇 명을 잡았지만 모두 자결.
결국 합리적인 선택은 물 건너가고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사투를 벌여야 했다.
“하아, 내가 착해지도록 세상이 도와주질 않는구나.”
그래도 어울리지 않게 명문정파 흉내를 좀 내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세상이 몰라주다니.
괜히 신경질이 난 남궁천이 혼잣말을 주절거렸다.
“아니, 내가 딱!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그만 떠나시오!’라고 말하면! 사정을 봐주셔서 고맙소! 승부는 다음으로 미룹시다! 하고 가면 얼마나 아름다워? 굳이 이렇게 마지막까지 개싸움을 해서 전부 뒈지면 뭐가 좀 낫나?”
“혼자 뭐 하는 거야?”
문득 들린 청아한 목소리에 남궁천이 흠칫거리고 돌아보자, 어느새 진소홍이 말고삐를 쥔 채 서 있었다.
말안장에는 합비 분타주가 멍한 얼굴로 앉아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와 부상자들이 이곳에 있었던 참상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정, 정말로…… 흑도인들이 남궁가를……?”
그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는데, 남궁천이 그에게 다가가 포권했다.
“합비 분타주께서 말을 빌려줘서 빨리 올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말을 빌려줘? 내가?”
분타주가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정수리에서 통증을 느끼고는 이맛살을 푹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네놈이 나를……!”
“보시다시피 당시엔 워낙 급한 사안이라 달리 방법이…….”
“닥쳐라! 아무리 그래도 감히 무림맹 견습생 주제에 분타주를 쳐? 내 네놈을 반드시 상부에 보고하여…….”
그때였다.
마침 저만치 남궁검이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거기 무슨 소란이냐?”
말을 마저 맺지 못한 분타주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선풍도골의 풍채를 자랑하는 남궁검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남궁검 가주……!’
이미 몇 번을 만난 적이 있지만 역시 볼 때마다 어딘지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다.
남궁검과 시선이 마주친 분타주가 저도 모르게 얼른 말에서 뛰어내려 포권을 취했다.
“남궁검 가주님, 오랜만입니다.”
“자네는 합비 분타주가 아닌가? 오랜만일세. 한데 여긴 어인 일인가?”
“그것이…….”
합비 분타주가 눈알을 굴리는데, 남궁천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분타주께서 저희 견습생들에게 말을 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보다 빨리 돌아와 본 가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 그런 일이 있었군. 고맙네, 분타주.”
“아…… 음…… 그것이…….”
분타주가 당황하면서 얼버무리자, 남궁검의 눈빛이 짐짓 매서워졌다.
“왜 그러나? 사실이 다른가? 설마하니 자네가 본 가의 위급한 사실을 알고도 망설이진 않았을 테고. 그래, 그러진 않았을 것이야.”
기분 탓일까?
남궁검의 목소리에 왠지 은근한 노기마저 깔린 것만 같다.
히꾹.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한 분타주가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대꾸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주님. 합비 분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일 뿐인데 감사 인사를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혹시 합비 분타가 더 도울 일은 없으신지요?”
“도울 일이라. 자네 눈에는 어떤가? 본 가의 상태가.”
분타주가 남궁검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한 차례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부서지고 무너진 부분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내 얼마 전에 무림맹이 진주언가와 하북팽가를 특별 재난 문파로 선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네.”
“그, 그렇습지요.”
분타주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사실 그 부분은 무림맹으로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진행한 일이었다.
하필이면 개방이 진주언가에 일찍 도착하면서 두 가문의 업적을 만천하에 떠벌리는 데다 피해 정도까지 소상히 알려대고 있으니, 무림맹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여론을 중시하고 명분을 앞세우는 맹주 묵천악이었기에 그는 사람들이 보라는 듯 두 가문을 특별 재난 문파로 지정했다.
특별 재난 문파로 지정되면 거액의 지원금을 비롯하여 다양한 혜택을 받게 된다.
이에 하북팽가와 진주언가는 훨씬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던 셈.
남궁검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이곳의 피해가 그곳과 비교하자면?”
“글, 글쎄요. 제가 진주언가의 피해 규모를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닌지라…….”
그러자 남궁천이 불쑥 나섰다.
“제가 잘 알죠. 거기서 왔으니까요.”
“그렇구나. 하면 네가 보기엔 어떠냐?”
“거의 비슷합니다. 아니, 본 가가 더 피해를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러자 분타주가 얼른 나섰다.
“가주님. 이런 사안은 한 사람의 말만 듣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더구나 남궁세가의 소가주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
“저도 남궁천과 같은 생각이에요.”
듣고만 있던 진소홍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주위로 몰려든 팽수혁과 윤종승, 그리고 유현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우리도 비슷한 규모라고 생각합니다.”
“……라는군.”
남궁검이 냉엄한 시선을 분타주에게 던졌다.
‘잘못 걸렸구나!’
분타주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남궁검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님. 특별 재난 문파는 제 선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저는 그저…….”
“물론 내가 그리 염치없는 사람은 아닐세. 나는 그저 분타주 생각을 묻는 것일세. 내 알기로 ‘특별’이 아닌 경우에는 분타주가 선정할 권한이 있는 것으로 아네만.”
“그, 그렇긴 합니다만.”
“자, 어떤가? 자네가 보기에 본 가가 나름의 큰 위기를 넘긴 것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뭐…… 별것도 아닌 일에 내가 호들갑을 떨며 엄살을 부리는 것 같은가?”
아니, 왜 선택지가 극과 극이냐고요!
분타주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생각을 차마 뱉지는 못하고 끙끙 앓다가 겨우 대답했다.
“재난 문파로 선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남궁검이 언제 살기 어린 시선을 보냈냐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 자네 생각이 정 그렇다니 본 가도 분타의 도움을 외면하지 않겠네. 금정각주!”
“예, 가주님.”
남궁효가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달려왔다.
“여기 분타주가 본 가를 돕고 싶다는군. 본 가와 황산윤가를 재난 문파로 선정하여 지원하겠다고 하네.”
“예? 황산윤가요?”
분타주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묻자 남궁검이 이맛살을 슬쩍 구긴다.
“왜 그러나? 뺄까?”
“아니, 그…….”
“본 가를 위해 달려와서 꽤나 큰 피해를 입었는데. 정 자네가 불만이라면 빼겠네. 본 가더러 따로 알아서 보상하라면 어쩔 수 없으니.”
아니, 또 왜 말을 그렇게까지.
결국 분타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응당 합비 분타가 해야 할 일이지요.”
“고맙군.”
얘기가 마무리되자 남궁효가 환하게 웃으며 안내했다.
“자, 이쪽으로 오시오. 우선 계약서도 작성해야 할 테니 조용한 곳으로 모시겠소.”
“아…… 예…….”
남궁천에게 정수리를 얻어맞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분타주가 얼떨결에 끌려갔다.
남궁검이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남궁천에게 나직이 읊조렸다.
“되었느냐?”
“예, 가주님.”
“내 너의 말대로 했다만, 썩 내키진 않는구나.”
남궁천이 말없이 웃었다.
분명 그럴 것이다.
남궁검은 곧 죽을지언정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성품이 아니었으니까.
하나 남궁검은 이제 세대교체를 준비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남궁세가의 기둥은 남궁천이 될 것이기에.
그 방식에 미리 조금씩 발을 맞춰주는 것이다.
그리고 남궁천의 방식은 이런 것이다.
최대한 주변 환경을 이용하는 것.
특히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인간들은 뼛속까지 발라먹는 것!
“오늘 저녁 가회를 열 것이다. 참석하도록 해라.”
“예, 가주님.”
남궁검이 자리를 뜨자, 진소홍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런데 어차피 돈은 넘쳐날 텐데. 우리 아버지가 준 명패만으로도 자금 조달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그야…… 얻어먹는 것보다 뺏어 먹는 게 더 맛있으니까.”
“아아…….”
진소홍이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곁에 있던 팽수혁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해하는 건데? 너도 저 녀석에게 물든 거냐!’
팽수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은 뭔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흑의인들의 시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저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정말이지 남궁천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떨 때는 지극히 단순한데, 또 어떨 때는 혜지가 넘치는 인간처럼 보이지 않나?
지난번, 진주언가에서만 해도 그렇다.
붉은 주머니와 파란 주머니라니.
‘재수 없는 군사처럼 굴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때 파란 주머니에는 뭐가 들었던 걸까?’
* * *
“그런데 그때 파란 주머니에는 뭐가 들었던 겁니까?”
언양걸의 물음에 팽적호는 차를 마시다 말고 멈칫 거렸다. 무슨 소리냐는 듯 묻는 눈치였다.
언양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거, 왜 있지 않습니까? 남궁천 소협이 준 거요. 본 가장이 위급할 때는 붉은 주머니를, 팽 가주께서 오의를 깨우치지 못했을 때는 푸른 주머니를 풀어보라고 했다던.”
“아!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군요!”
팽적호가 품을 뒤져 얼른 푸른 주머니를 꺼내 보았다.
당시에는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풀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일이 모두 해결한 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아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남궁천이 남겨 준 파란 주머니!
‘내가 오의를 깨우치지 못하면 이걸 풀어보라고 했다지?’
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곳에 어떤 울림이 들어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래, 남궁천 그 아이는 언제나 예상을 깨는 녀석이었지.’
과연 여기에는 어떤 말이 적혀 있을까?
팽적호가 기대를 품고 천천히 파란색 주머니를 풀어보았다.
지켜보던 언양걸도 덩달아 기대를 품은 기색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침내 작게 접힌 종이를 꺼내 읽은 팽적호.
다음 순간 그의 눈동자가 격심하게 흔들렸다. 곧이어 그가 부처 같은 웃음을 그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아아. 이건…….”
“이건……?”
“……풀어보지 말 걸 그랬소.”
“아니, 왜 그러오? 대체 무슨 깊은 뜻이 담겨 있기에 그리 감동의 눈물까지 흘리시는 거요?”
답답한 언양걸이 무례를 무릅쓰고 팽적호의 손에 들린 종이를 얼른 채갔다.
그가 종이를 펼쳐 들고는 읽어 내려갔다.
“팽 가주님. 결국 오의를 깨우치지 못하셨군요…… 그렇게 시간을 드렸는데…… 밖에서는 가신들과 자식이 목숨 걸고 싸우는 동안…… 그깟 무공도 익히지 못하다니…… 그런 돌대가리로 어찌 무인이 되려고 하신 거요…… 에라이…… 똥멍청이야…… 차라리 밭이나 갈지…… 왜 무공 따위를 익힌다고…… 설레발 치고 삽질을 해서…… 개똥도 당신보다는 쓸모 있겠…… 커흠, 험험!”
언양걸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풀어보지 말 걸 그랬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