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감히 본 가를 건드려?
두두두두……!
준마를 탄 견습생들은 쉬지 않고 황산을 향해 달렸다.
그렇게 밤새 달리자 마침내 저만치 황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궁천 뒤를 바짝 따라붙던 윤종승이 좌측을 힐끔 보았다. 어느새 동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늦지 않아야 할 텐데.’
이상하게 불안하다.
황산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린다.
물론 황산윤가보다는 남궁세가가 더 위험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체불명의 적들이 황산윤가를 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강호에서 그리 이름을 떨친 곳도 아니고, 돈이 넘쳐나는 곳도 아니니까.
하지만 남궁세가는 여러모로 상징적인 가문이다. 가세가 기울었다지만 그래도 남궁세가이지 않은가?
게다가 최근에는 남궁천의 활약으로 재도약을 벼르는 곳이다. 그러니 적들이 둘 중 한 곳을 노린다면 남궁세가일 확률이 크다.
그럼에도 윤종승은 이상하게 아버지가 걱정됐다.
평소 아버지 성품이라면 남궁세가에 불이 나든 도둑이 들든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왠지 지금은 마음이 뒤숭숭하다.
‘우선 직접 가서 보는 수밖에! 만약 정말로 남궁세가가 위기에 빠졌다면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아버지를 걱정하면서도 그곳에 아버지가 계시길 바라는 복잡한 마음이다.
윤종승은 앞서 달리는 남궁천의 등을 보았다.
‘동료의 가문을 위기에서 두 번이나 구한 녀석.’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남궁천이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을까?
언뜻 남궁천이 너무 낯설어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남궁천과 함께 있으면 성장한다는 것.
단순히 무공뿐만이 아니라, 생각과 삶을 대하는 자세마저 성장하는 기분이다.
‘남궁천! 너에게 닥친 위기는 나도 함께 겪겠다!’
윤종승이 새삼 다짐을 하면서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달렸을까?
황산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이히히힝!
팽수혁이 탄 말이 갑자기 비명 같은 울음을 내지르더니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쿠당탕탕……!
어찌나 빨리 달렸던 것인지 말은 바닥에 쓰러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미끄러져 가다가 바위에 부딪치면서 멈췄다.
푸르르릉……!
숨을 헐떡이는 준마가 한 차례 투레질을 하며 버둥거렸지만 결국 일어나질 못했다.
한편 말을 타고 있던 팽수혁은 재빨리 몸을 날려 바닥을 부드럽게 구르는 바람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 바람에 다른 견습생들도 말을 멈춰 세우고는 팽수혁 곁으로 몰려왔다.
“제길! 말이 너무 지친 모양이다.”
팽수혁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견습생들의 말도 모두 지쳐서 언제 고꾸라질지 모를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밤새 쉬지도 않고 전속력으로 달려왔으니 지칠 만도 하리라.
남궁천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달려가자. 지금부터는 경공을 펼쳐서 달려가는 게 더 빠를 거야. 그간 내공과 체력도 아꼈으니.”
“그래, 그게 좋겠어.”
진소홍도 곧장 말에서 뛰어내렸다.
윤종승이 말을 몰고 와서 등 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이자는 어떻게 하지?”
윤종승과 함께 허리가 묶여서 말에 타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합비 분타주였다.
윤종승이 허리띠를 풀고 분타주를 말안장에 걸쳐 놓았다.
“우리가 전부 달려가면 말이 알아서 따라올까?”
진소홍이 고개를 저었다.
“제법 똑똑한 녀석들이긴 하지만 혹시나 분타주가 그사이에 깨어나면 골치 아파.”
그러자 유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그냥 죽이죠.”
“…….”
“…….”
팽수혁이 멍한 표정으로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우리 유현 도장을 누가 이렇게 타락시킨 거냐?”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남궁천이 손가락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왜 날 봐? 난 그런 적 없는데.”
“흐음. 넘어가자고. 그보다 분타주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으니 소홍이가 챙기는 게 어때?”
“응? 내가?”
진소홍의 반응에 팽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천과 윤종승은 가문이 엮일 지도 모를 일이니 마음이 급할 테고. 유현 도장에게 맡기기엔 불안하니까.”
“제가 불안한가요?”
유현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돌아보았다.
‘그걸 모르다니. 더 불안해. 역시!’
결국 진소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내가 분타주를 데리고 뒤따라갈게.”
“좋아, 그럼 우린 어서 가자고.”
팽수혁의 말에 남궁천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견습생들에게 두 개씩 던져주었다.
“이게 뭐야?”
“우리 주는 거야?”
남궁천이 그중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백령단과 강령신단이야. 흰색이 백령단. 공력의 흐름을 빠르게 가져갈 수 있지.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강령신단의 효능은 다들 알 테고.”
“어…… 고맙다.”
“자, 그럼 가자고. 어떤 새끼들이 뒈지려고 본 가를 건드리는지 봐야지.”
남궁천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닥을 찼다.
파아아앙!
순간 강풍이 훅 불면서 견습생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세차게 휘날렸다.
남궁천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멀어지더니 이내 점처럼 작아졌다.
서로를 바라보던 견습생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령단을 삼켰다.
팽수혁이 히죽 웃었다.
“좋아, 피가 끓는군! 어디 한번 가볼까?”
파아앙!
곧이어 다른 견습생들도 바닥을 차며 화살처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 *
“헉, 헉, 헉……!”
“후우. 후우……!”
남궁표와 남궁설희가 나란히 선 채로 어깨를 들먹였다.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다.
적은 아무리 베어도 끝이 없었다.
반면 아군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창응대도 대주를 비롯한 몇 명이 아직까지 악착같이 버티며 싸우고 있었지만, 상당수의 사상자가 생겨 버렸다.
정말이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게다가 저만치 떨어진 연무실 지붕에서 벌어지는 사투.
모르긴 해도 어마어마한 고수가 남궁검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대결로 보였다.
문제는 밤새 혈투를 벌인 남궁검이 꽤나 지친 상태였다는 것이다.
‘형님……!’
남궁표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제는 체력도, 공력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의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는 심청원을 포위한 흑의인들을 노려보았다.
“이 개 같은 것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대가리를 처밀고……!”
“표야, 말에 품위가 없…….”
“누님! 지금 품위가 문젭니까? 이 쓰레기들이 지금 본 가를 몰락시키려고 작정을 한 마당에!”
“그래도 이놈들이 화공을 쓰진 않는구나. 본 가에 노리는 게 있다는 뜻이겠지. 우린 그걸 끝까지 지킨다.”
“아무렴요! 우리 소가주가 힘들게 구한 것 아닙니까?”
남궁설희가 피식 웃었다.
‘우리 소가주라.’
저 고집스러운 동생을 저렇게 바꾼 남궁천이 다시 한번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감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뒈져라, 할망구!”
흑의인 하나가 거친 말을 쏟아내며 날아들자, 남궁표가 그 앞을 막아서며 검기를 터뜨려냈다.
쑤아아앙!
“이 개새끼가 감히 우리 누님보고 뭐라는 거냐? 아가리를 찢어주마!”
“표야, 품위를…….”
“거, 누님도 잔소리 좀 그만하쇼! 다 죽을 마당에 품위는 얼어 죽을…….”
“쯧…….”
남궁설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차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생은 지금 자신을 욕한 흑의인들에게 분개하는 것이 아닌가?
남궁표가 원래 저렇다.
경박하고 단순하며 다혈질이지만 생각보다 속정이 깊달까?
까가가강! 땅! 촤악!
“크악!”
금속성과 기합성이 어우러지고 비명이 튀어나온다.
거침없이 적을 베어내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등을 맞대고 호흡을 골랐다.
“헉, 헉……! 누님.”
“뭐냐?”
“정말 웃긴 게 뭔지 압니까?”
“……?”
“그 녀석이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 이상하게 그 녀석이 보고 싶다는 겁니다.”
“……!”
남궁설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나도 그렇구나.”
“어……? 누님도 그렇습니까?”
“그 아이가 보여준 것이 있지 않더냐? 왠지 그 아이라면 뭔가 이 위기를 넘길 방도가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가 드는구나.”
남궁설희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스스로도 놀랐다.
‘내가 그 아이를 진정 소가주로 인정하는 모양이구나. 한낱 견습생에 지나지 않은 아이의 존재감이 이렇게나 컸던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소가주가 어딘가에 살아남는다면 남궁세가의 명맥을 이어갈 거라는 믿음이다.
남궁설희가 뭐라고 중얼거리려는 때였다.
콰아아앙!
문득 연무실 전각 위에서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그곳 기왓장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면서 파편이 자욱하게 흩어졌다.
“누님, 형님이……!”
“나도 보았다!”
남궁설희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남궁검을 궁지로 몰아넣는 게 분명했다.
‘저만한 충돌이라면 혹시 내공 대결이라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오라버니는 밤새 싸워서 공력 소모가 심했을 터인데…… 응? 가만……!’
생각을 이어가던 남궁설희가 흠칫거리고는 연무실 쪽을 보았다.
이따금씩 처절한 비명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고 보니 저긴……! 설마!’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친 남궁설희가 남궁표를 휙 돌아보았다.
“표야!”
“왜요?”
남궁표가 적에게 검을 휘두르며 겨우 대답했다.
“아무래도 놈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뭘요?”
“마단곡 영단이 있는 곳을!”
“아……!”
그제야 남궁표가 흠칫거리고는 연무실 쪽을 바라보았다. 마단곡 영단은 이곳 가주전과 연무실 지하에 나눠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각 지붕에서는 남궁검이 내공 대결을 하는 중인지 한 노인과 검을 한 일자로 맞댄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공 대결이라면 형님의 발이 묶이게 된다!’
생각을 마친 남궁표가 버럭 소리쳤다.
“누님, 제가 가겠습니다!”
“너 혼자서는 무리야!”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끄음.”
남궁설희가 침음을 삼키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남궁표의 말대로 다른 방법이 없다.
결국 그녀가 내공을 끌어 올리며 당부했다.
“부디 조심해라.”
“걱정 마세요!”
“그럼 길을 뚫으마! 오라버니와 함께 연무실을 지켜라!”
말을 마친 그녀가 공력을 폭발시키며 일순간 창궁무애검법의 창천일시를 펼쳤다.
쑤아아아아앙!
화살처럼 날아간 검신이 그대로 흑의인들을 좌우로 갈라 버렸다.
“크아악!”
“우아악!”
빽빽하게 밀집했던 흑의인들 사이로 길이 열리자, 남궁표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파바밧!
남궁표가 가전무공인 천풍신법(天風身法)을 펼치면서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마침 앞을 가로막는 흑의인이 나타나자 그대로 훌쩍 뛰어올라 상대의 정수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야말로 표홀한 신법이었다.
남궁설희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남궁표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표야, 부탁하마!’
남궁표는 그대로 담벼락을 넘어서 연무실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흑의인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는데, 굳게 잠긴 연무실 입구에서는 장로원주 남궁헌상이 각종 병기에 몸이 꿰뚫린 채 죽어가고 있었다.
“쿨럭, 쿠웨에엑!”
결국 피를 한 바가지 토한 남궁헌상이 쓰러지자, 눈이 뒤집힌 남궁표가 사자후로 일갈을 터뜨렸다.
“원주님! 이익……! 이 개 같은 새끼들아아아!”
쑤아아아앙!
순간 한 자루 화살처럼 날아간 남궁표가 그대로 흑의인들을 베고 찌르며 연무실 입구까지 다다랐다.
그제야 남궁표의 시야에 주변에 가득 널브러진 남궁세가 무인들의 시신이 보였다.
‘모두 이곳을 지키려다가……!’
눈에 핏발이 선 남궁표가 불덩이도 삼켜 버릴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 표정이 어찌나 흉흉한지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움찔거리며 한 걸음씩 물러설 정도였다.
“이 찢어죽일 놈들. 내가 여기 서 있는 한 네놈들은 단 한 발자국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흠칫거리는 흑의인들 사이에서 누군가 냉소를 지었다.
“영감이 미친 모양이군. 혼자서 우리를 상대하시겠다?”
“어디 미친개에게 물려보아라. 지금부터 그 생생한 고통을 알려주마!”
“흥! 미친개는 매가 약이지! 쳐랏!”
순간 흑의인들이 일제히 몸을 날리며 남궁표에게 날아들었다.
시퍼런 예기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며 남궁표가 광기 서린 얼굴로 외쳤다.
“오냐! 오너라! 본 가의 진정한 무서움을 일깨워 주리라!”
파아아앙!
미명을 마주한 남궁표의 신형이 일순 광휘를 뿜으며 날아올랐다.
피 튀기는 사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