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36화 (235/508)

236. 남궁세가가 내 손에 달렸다

콰콰콰콰콰……!

“크억!”

“으아악!”

매서운 기파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자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비명과 함께 추풍낙엽처럼 휩쓸려 날아갔다.

남궁검은 그야말로 검신이 빙의된 듯 싸웠다.

그의 검이 유성처럼 밤공기를 갈랐고, 때론 별 무리처럼 흩어졌다가 어느 순간엔 바람처럼 흔적을 감추곤 했다.

“지독하게 버티는군.”

흑의인 틈에서 흑천마객이 어금니를 까득 갈았다.

남궁검은 이리 떼에 휩싸인 범 같았다.

고독한 범이 잠시나마 주춤거린다 싶을 때면 그가 어김없이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그럼에도 남궁검은 무리 없이 막아냈다. 정말이지 지독하다는 표현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파바밧!

순간 흑천마객이 시커먼 바람이 되어 흑의인들 사이를 누비며 날아갔다.

쉬이이잇, 쩌어엉!

검붉은 도신과 남궁검의 검이 부딪치자 밤공기가 진동하면서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다르르르르……!

주변 전각의 기왓장이 온몸을 떨어댔다.

흑천마객이 입매를 히죽 비틀었다.

“남궁 가주……! 여전하시군.”

“자네는 기력이 많이 떨어졌군.”

남궁검이 무심한 표정으로 뱉는 말에 흑천마객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흥, 이 지경이 되어서도 여유를 부리다니. 곧 죽어도 고개는 빳빳하게 들고 뒈지시겠다는 건가?”

“품위가 없는 건 여전하군.”

“시끄럽다! 생사를 걸고 싸우는 마당에 품위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지!”

슈카아앙!

흑천마객이 공력을 한껏 끌어올려 도신을 휘두르자, 남궁검이 미끄러지듯이 주르륵 물러났다.

마침 그 틈을 타서 흑의인들이 달려들었다.

“죽엿!”

“지금이닷!”

하나 가장 먼저 소리친 자는 입을 딱 벌린 채로 검이 쑤셔 박혔다.

푹!

뒤통수까지 뚫고 튀어나온 검신이 그대로 얼굴을 찢어내며 옆에서 달려드는 상대의 목을 베어냈다.

촤악!

쿠당탕!

‘저런 말도 안 되는!’

순식간에 두 명의 무인이 나자빠지자 그 뒤를 이어 달려들던 흑의인들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가소로운!”

차갑게 중얼거린 남궁검이 그대로 몸을 회전하면서 창궁무애검법의 구륜천도(九輪天道) 초식을 펼쳤다.

아홉 개의 고리가 회전하면서 하늘의 길을 만들어낸다.

단 일 초에 지나지 않지만, 수 초식을 연환식으로 펼쳐내는 것처럼 보인다.

경지에 이른 구륜천도는 사방을 칼날 같은 바람으로 채운다. 겁 없이 뛰어들었다간 누구든 그 바람에 살이 베이고 뼈가 잘려 나갈 수밖에 없다.

촤촤촤촤악!

“크아악!”

“아악!”

비명이 솟구치면서 몇몇 무인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져 갔다. 벌써 남궁검 주위로 쓰러진 자들만 수십 명이었다.

“칫!”

흑천마객이 혀를 차고는 남궁검을 노려보았다.

확실히 남궁검의 실력은 죽지 않았다. 아니, 어째서인지 더 매서워졌다.

뭔가 좀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랄까?

젊은 시절 남궁검의 검초는 교본처럼 정확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완벽한 검로였다.

때문에 그의 검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변초와 허초가 없는 게 아니다.

다만 그 변초와 허초마저 정확히 교본처럼 행해졌다. 그럼에도 막아내기가 어려웠다.

이유는 하나다.

애초에 그게 정답이니까.

교본이 달리 교본인가?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검로로 변초와 허초를 부리니 알고도 막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꽉 막힌 검술에 맥없이 당해 깊은 내상까지 입었던 흑천마객이었다.

당시 죽을 줄만 알았던 그는 가까스로 도망쳐서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얼마나 와신상담하며 칼을 갈았던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남궁검을 떠올리며 도법을 연마했다.

그의 독자무공인 흑천마도(黑天魔刀)를 대성할 때까지 갈고닦았다.

그리고 남궁검의 검초에 대해서만 줄기차게 연구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마객의 복수는 이십 년, 삼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았다.

그 언젠가 남궁검과 대면했을 때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매일 남궁검의 검술을 떠올리며 가상의 비무를 이었다.

수백, 수천 번을 패했다.

어찌나 몰입을 했는지 실제로 검에 찔린 것처럼 내상을 입어 주화입마에 빠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정확히 삼 년 전부터 흑천마객은 남궁검과 쌍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매번 패하던 흑천마객이 가상 비무에서 결판을 내지 못하는 날이 생겼고, 어느 순간 이기기도 했다.

이후에는 남궁검을 수십, 수백 번 죽였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남궁검을 다시 만나면 이렇게 말해줄 참이었다.

‘너는 이미 죽어 있다.’

그런데…….

차차차차창! 까앙!

저 불꽃을 터뜨리며 용트림을 하듯 검을 휘두르는 남궁검은…….

‘제길!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냐!’

빠득.

이가 갈린다.

분명 남궁검은 저런 검초를 펼치지 않았다. 숨도 못 쉴 만큼 꽉 막힌 검초였단 말이다. 부러지면 부러졌지 결코 휘지 않을 검초였다.

그런데 어째서 저리도 자유분방한가?

“어째서어엇!”

흑천마객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면서 바닥을 차고 튀어 나갔다.

쑤아아아앙!

검붉은 기운을 품은 도신이 파공성을 이끌며 그대로 남궁검의 정수리를 쪼갤 듯 떨어져 내렸다.

쩌어어어엉!

츠츠츠츳!

남궁검이 검신을 들어 막자 다시 서너 장이나 미끄러진다.

흑천마객이 눈을 부릅떴다.

또다! 또 막았다!

자신이 그동안 싸웠던 남궁검이라면 결코 막을 수 없는 순간이었는데!

“어째서…… 막을 수 있냐는 말이다!”

이래서야 전혀 다른 상대와 싸우는 것 같지 않은가?

남궁검도 그동안 더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천만에!

자신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감안하지 않았을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성질이…… 성질이 바뀌셨소.”

흑천마객이 신음처럼 씹어뱉었다.

그렇다.

남궁검의 검초는 그 성질이 완전히 바뀌었다.

틀에 박힌 듯 꽉 막힌 검법이 지금은 허공에서 너울대는 광휘 같다고나 할까?

너무나 다르다.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나이가 드니 달라지더군.”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퇴보가 아니라 진보니 그럴 염려는 없네.”

후우우웅!

순간 남궁검의 장삼 자락이 펄럭이더니 이내 그의 신형이 팽이처럼 회전했다.

‘역시!’

이번에도 다르다.

알고도 막기 힘든 정공법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어떻게 흘러나올지 모를 괴검이다.

“이익!”

흑천마객이 이를 갈며 흑천마도를 뿌려댔다.

샤샤샤샤샥!

한 자루의 도가 두 자루가 되고, 다시 네 자루, 여덟 자루…… 이내 수십 자루까지 늘어났다.

도신으로 암흑을 이룬다는 만도흑천(萬刀黑天)이라는 초식이다.

하나 남궁검은 바람이었다.

바람은 암흑 속에서도 유유히 움직인다.

마침내 바람이 흑천마객의 옆구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피츗!

“크읍!”

흑천마객이 신음을 삼키며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파바박!

흑천마객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확실히…… 확실히 다르다!’

기나긴 세월 남궁검 하나를 보고 갈고닦은 시간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기분이다.

남궁검은 매섭게 휘몰아치면서도 내심 남궁천을 떠올리고 있었다.

‘네가 나를 뛰어넘을 수 있겠구나.’

사실 그의 검술이 달라진 것은 오롯이 남궁천 때문이었다.

지난날 그는 남궁천과 비무를 했다.

그리고 남궁천이 익힌 창벽검을 처음으로 마주하면서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 깨달음은 남궁검의 검법을 변화시켰다.

결코 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검법이 유연하게 휘기 시작한 것이다.

파앙!

일순 남궁검이 귀신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칫!”

파밧!

흑천마객이 잽싸게 바닥을 차고는 옆의 전각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파파파파팡!

흑천마객이 급한 대로 기왓장을 발로 걷어차며 공격했다.

카차차차창!

하나 남궁검이 일검을 휘두르자 기왓장 수십 장이 산산조각 나며 박살 났다.

흑천마객의 표정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이전의 남궁검의 검은 강직하고 단단했다.

그런데 지금 남궁검의 검은 질기다.

상황에 따라 검로가 제멋대로 흔들리지만 결코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다.

마침 기왓장 파편 사이로 질풍처럼 날아간 남궁검이 회심의 일검을 내질렀다.

쑤아아아앙!

슈카앙!

도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터진다.

하나 남궁검의 검은 결정적인 순간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예전의 남궁검이었다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움직임이다.

이 경우 공력이 손실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세가 흐트러져 역공을 당할 위험도 있기에.

하나 모든 건 변한다.

공간은 변하고, 변화는 흐름을 가져온다. 흐름 속에서는 기회가 파생된다.

남궁천의 창벽검을 상대하면서 그가 깨달은 것이다.

푸욱!

마침내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검신이 흑천마객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크읍!”

흑천마객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돌처럼 굳었다.

그 오랜 세월을 벼른 자로서는 허무하디허무한 순간.

하나 흑천마객은 피를 흘리면서도 웃었다.

“클클. 가주…… 당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나?”

“…….”

남궁검이 눈살을 가늘게 여미자, 흑천마객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흑의인들이 휘몰아치는 심청원 쪽이었다.

과연 심청원에서는 남궁세가가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장원 곳곳에 남궁세가 무인들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고, 장로들과 수뇌인사들만이 겨우 살아남아 심청원에서 마지막까지 고전 중이었다.

또 한쪽에서는 뜻밖에도 황산윤가가 무인들을 끌고 와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흑천마객이 이죽거렸다.

“잡놈들이 도우러 온 모양이지만…… 상황이 달라지진 않을 거요.”

흑천마객이 벌건 핏물이 밴 이를 훤히 드러내며 히죽 웃는다.

만약 누군가 심청원에 벽력탄 하나만 터뜨려도 남궁세가는 멸문의 피해를 입으리라.

하나 마단곡 영단을 노리는 입장에서 그런 무모한 짓은 할 수 없다.

불에 가장 약한 것이 독과 영단이니까.

문제는 굳이 벽력탄 따위를 쓰지 않아도 이대로면 남궁세가가 전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옆구리에 검을 박은 흑천마객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크큭! 크하하하! 이제 아시겠소? 남궁세가는 오늘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푹!

“크억!”

순간 흑천마객의 가슴을 뚫고 짤막한 검신이 튀어나왔다.

얼굴이 일그러진 흑천마객이 천천히 돌아서자 얼굴에 곰보 자국이 가득한 노인 하나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놀라긴 남궁검도 마찬가지였다.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남궁검이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는데,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혹시 몰라 따라왔더니 역시나 일 처리가 깔끔하지 못하군.”

“장, 장로님…… 왜……?”

흑천마객이 더듬거리자, 장로라 불린 노인이 버럭 소리쳤다.

“왜긴 왜냐! 져놓고도 처웃는 네놈이 한심해서 꼴 보기가 싫은 게지!”

“그런…….”

털썩, 쿠웅!

흑천마객이 그대로 무너지자 노인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남궁검을 보았다.

남궁검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시선을 마주했다.

‘마교 장로인가?’

상당한 고수.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을 만큼 강하다. 흑천마객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남궁검이 천천히 검을 앞세웠다.

그는 다시 남궁천을 떠올렸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남궁세가를 이을 사람은 단 한 명.

‘내 너를 믿으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