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남궁세가가 내 손에 달렸다
분타주가 눈을 부라리며 따졌다.
“뭐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날카로운 추궁이었지만 이에 물러설 팽수혁이 아니었다.
“개 같은 소리라고 했소! 빌어먹을 절차를 챙기겠다고 정작 발등에 떨어진 불도 모른 체하는 게 한심하잖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쇼?”
“이……! 내가 이곳 분타주다!”
“아…….”
그제야 견습생들 표정에 낭패감이 서렸다.
지켜보던 수문 무사가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나섰다.
“분타주님. 이들이 방금 말씀드린 견습생들입니다. 여기 이분이 바로 남궁세가 소가주이자 강호신룡으로 이름을 알린…….”
“강호신룡은 무슨. 요즘은 개나 소나 용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니는군.”
“뭐가 어째요?”
뜻밖에도 발끈해서 따지는 사람은 다름 아닌 팽수혁이었다.
다른 견습생들도 팽수혁이 이렇게까지 분에 겨워하는 모습을 이상한 듯 바라보았다.
팽수혁이 어깨까지 들먹이며 씨근거렸다.
“개나 소나 용이라니! 이래 봬도 이 녀석은 무연회 우승한 녀석입니다! 그리고 본 가를 위기에서 구했고! 그런데 지금 위기에 빠진 가문의 소식을 듣고 뒷짐이나 지는 분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읍읍!”
거침없이 쏘아붙이는 팽수혁의 입을 윤종승이 얼른 나서서 막았다.
어쨌든 말을 빌려야 할 상황에서 열쇠를 쥔 사람은 분타주이지 않은가?
그런데 자꾸만 성질만 돋워서 좋을 게 없었다.
분타주가 코웃음을 치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절차를 무시하는 걸 보니 이놈들은 가짜일지도 모르겠군!”
“아니, 아까부터 개소리도 작작…… 읍읍!”
“정 억울하면 내일 동이 튼 후에 다시 와라.”
분타주가 매정하게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이번에는 수문 무사 송명이 얼른 나섰다.
“분타주님! 이들은 가짜가 아닙니다! 여기 남궁천 견습생은 틀림없이 남궁세가 소가주입니다. 그건 저희들이 보장할 수 있습니다!”
“남궁천이라. 하지만 다른 이들도 너희들이 아는가?”
“예? 그건…….”
“만약 저 남궁천이라는 생도가 함께 온 가짜들에게 매수를 당한 것이라면?”
“그런……!”
“아니, 아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데 저게 개소리가 아니면 뭐…… 읍! 읍……!”
이쯤 되자 수문 무사들이 한쪽 무릎까지 꿇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분타주님! 저희들 역시 남궁세가 출신입니다. 남궁세가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모른 척하기가 어렵습니다. 저희들을 믿고서라도 부디 말을…….”
“거참, 왜들 이러나? 누가 빌려주지 않는다고 했나? 절차가 있으니 내일 오라는 것이야.”
“하나 이런 비상시에 절차를 따지다간……!”
“시끄럽다! 비상시니까 절차를 따지는 것이야!”
분타주가 강경하게 나오자 더 이상 수문 무사들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래서야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이지 않은가?
그 와중에도 남궁천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마침내 그가 안으로 들어가려던 분타주의 발길을 붙들었다.
“과연 분타주님은 철두철미한 성격이시군요. 이렇게 엄중한 절차를 지시한 것은 혹시 맹주님이신지요?”
“잘 아는군. 이건 맹에서 직접 내려온 지시다. 그러니 너희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
“예, 알 것 같아요.”
“잘 됐군. 그럼 오늘은 업무가 끝났으니 내일 다시 오도록.”
“저, 저……!”
팽수혁은 이제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때 남궁천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내일 다시 오는 것 말고.”
“응?”
분타주가 미간을 구기며 돌아서자, 남궁천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방법도 있을 것 같네요.”
“뭐라?”
그 순간 남궁천이 벽라검을 검집째로 휘둘러 분타주의 정수리를 정확히 때렸다.
빠악!
“……!”
“……!”
순간 수문 무사들은 물론 견습생들까지 화들짝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꼬로록……!
분타주의 눈이 허옇게 뒤집히더니 입에 거품을 문 채 털썩 쓰러지는 게 아닌가?
남궁천이 분타주를 어깨에 척 걸치고는 수문 무사들을 보았다.
“다들 들었지? 분타주님은 철저한 검증을 위해 우리와 함께 가신다고 하네.”
“예…… 예?”
어정쩡하게 대꾸하던 수문 무사들이 뒤늦게 속뜻을 눈치채고는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이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부디 남궁세가를 구해주십시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야. 마구간은 어디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송명이 말하자 진소홍이 나서며 두 사람에게 묵직한 돈주머니를 각각 안겨주었다.
무심결에 주머니 안을 들여다 본 두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런 건 주시지 않아도…….”
“에이, 넣어두세요. 정이 있는데.”
진소홍이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하앗!”
깡! 촤악!
어둠 속에서 불꽃이 터지면서 흑의인 하나가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가장을 막 벗어나서 골목길로 접어들던 남궁화가 얼른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다들 이쪽으로!”
그녀의 지시를 받은 시종들이 숨을 죽이고는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시종의 어깨를 붙들고는 말했다.
“우선은 황산객점으로 가서 다들 몸을 돌보도록 해. 저자들이 거기까지 가진 않을 테니까.”
황산객점은 남궁세가가 최근 사업권을 되찾아온 곳이었다. 적들의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무공도 익히지 않은 시종들을 해치기 위해 황산객점까지 치진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내 걱정은 마. 일단 아버지를 도와야 하니까.”
“알겠습니다요.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시종이 굽실거리고는 얼른 다른 이들과 함께 골목을 따라 달려갔다.
그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남궁화가 매서운 눈초리로 돌아섰다.
마음 같아서는 시종들을 객점까지 무사히 인솔하고 싶었지만, 당장 가장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이들이 걱정됐다.
그녀가 후문으로 들어가자 마침 흑의인 하나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죽엇!”
하지만 남궁화는 부드럽게 보법을 밟으면서 적의 검격을 피해냈다. 동시에 금나술을 펼쳐 적의 팔목을 꺾어 버리고는 그대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쿠당!
“크윽!”
남궁화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들고는 쓰러진 자의 심장을 찔렀다.
푹!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던 흑의인이 이내 축 늘어졌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
남궁화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한 가지 특이할 만한 것은 장원이 비교적 멀쩡하다는 것이다.
분명 적의 머릿수만 보자면 멸문시킬 각오로 쳐들어온 것 같은데, 전각이 무너지거나 부서진 곳이 거의 없었다.
‘멸문이 목적이라면 불을 질렀을 거야. 그럼 이자들의 목적이 뭐지? 전각을 불태우면 안 될 이유라면…… 설마?’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남궁화는 곧 확신했다.
‘뭔가를 찾고 있구나!’
그렇다면 그게 뭘까?
역시 뭔가를 떠올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마단곡 영단!’
남궁화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적들이 마단곡 영단의 위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우선은 그곳을 지켜야 하리라.
놈들이 마단곡 영단을 찾고 나면 전각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 테니까.
탓!
생각을 마친 남궁화가 바닥을 차며 빠르게 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몇 장 나아가지도 못한 채 급하게 멈춰 섰다.
쉬이이잇!
어둠을 가르며 날아드는 한 줄기 빛살!
스까아아앙!
청명한 금속성이 울리면서 남궁화가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곧이어 균형을 잡을 틈도 없이 또 다른 흑의인이 품을 파고들었다.
“어딜!”
남궁화가 순간 팽이처럼 휘리릭 돌면서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까강! 깡깡!
순식간에 남궁화를 에워싼 네 명의 흑의인들.
하나 가문 직계인 그녀의 무공은 호락호락한 수준이 아니었다.
어두운 밤중에도 그녀가 휘두르는 검신만은 푸르게 빛을 뿜었다. 그녀가 휘두르는 검로가 마치 은하수를 뿌린 듯 반짝인다.
어둠 속에서 남궁세가의 검기가 뿌려지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낮의 싸움에서 화산파의 검술이 가장 화려한 편에 속한다면, 밤중의 싸움에서 남궁세가의 검술만큼 화려한 것도 없다.
화산은 낮에 꽃잎을 휘날린다.
하나 남궁세가는 밤에 별빛을 뿌린다.
마침 주변의 흑의인들이 하나둘 몰려오면서 점점 남궁화를 압박했다.
그 와중에도 남궁화는 균형 잡힌 자세로 적들을 차례로 상대해갔다.
따다당! 까앙! 깡! 촤악! 촤아악!
“크악!”
“아악!”
금속성과 비명이 어우러진다.
검신에서 별빛이 뿌려질 때마다 핏줄기가 튀어 오르면서 검기마저 붉게 물들인다.
남궁화는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주위로 상처 입은 흑의인들이 털썩털썩 쓰러졌다.
하지만 흑의인들이 점점 늘어나자 남궁화도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계집년!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
“저 지독한 년을 족쳐라!”
남궁화는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적이 너무 많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쉬이이잇!
아뿔싸! 쓰러져 있던 흑의인 중 하나가 시커먼 묵도를 위로 휘둘러 오는 게 아닌가?
“헛!”
남궁화가 헛바람을 삼키며 얼른 물러났지만, 기습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촤아악!
“으윽!”
도신이 옆구리를 베며 지나치자 남궁화가 뒤로 미끄러지면서 가까스로 멈췄다.
츠츠츳!
그제야 흑의인들이 눈빛을 새파랗게 빛내면서 다가왔다.
“개 같은 년…….”
“곱게 뒈질 것이지.”
“흥! 네놈들 손엔 안 죽어.”
남궁화가 검을 콱 움켜잡으며 표독스럽게 일갈했다.
그 매서운 반응에 흑의인들이 조금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디 안 죽는지 보자!”
마침 흑의인 하나가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자, 남궁화가 이를 악물고 몸을 회전하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촤아아악!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그 일련의 과정이 무척이나 매끄럽고 신속했다.
결국 검을 든 채로 달려오던 흑의인이 그대로 배가 갈려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저 병신…….”
흑의인 하나가 혀를 차며 쓰러진 동료를 나무랐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명령처럼 말했다.
“한꺼번에 덤벼!”
“이여업!”
순간 흑의인들이 앞다투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남궁화가 지혈도 하지 못한 채 검을 들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후우우웅!
검은 바람이 곁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나 흑의인에게 일장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뻐어어엉!
살가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흑의인이 비명을 내지르며 날아갔다.
“끄아아악!”
쿠당탕탕!
흑의인과 부딪쳐서 쓰러지는 흑의인도 다수였다.
“누구……?”
남궁화가 멍한 시선으로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림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황산윤가가 남궁가를 돕기 위해 왔네. 이미 본 가 무인들이 장원 곳곳에 투입되어서 싸우는 중일세.”
“아…… 윤 가주님!”
“감사 인사는 나중에.”
입매를 비틀며 대꾸한 윤첨산이 흑의인들을 돌아보고는 냉소를 지었다.
“비열하구나. 머릿수를 믿고 여인을 괴롭히다니. 그렇다면 우리도 머릿수로 밀어붙여 볼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윤첨산 뒤로 열 명의 무인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듯 내려섰다.
윤첨산에게 달려들려고 하던 흑의인들이 멈칫거리더니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때, 마침 전각 모퉁이를 돌아서 한 무리의 흑의인들이 달려왔다.
인원은 대략…….
“다섯, 열, 열다…… 스물이…… 넘네?”
윤첨산의 입에서 다소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슬금슬금 남궁화 곁으로 오더니 애매하게 웃었다.
“어…… 생각보다 좀…… 많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