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남궁세가가 내 손에 달렸다
“너 이 새끼…… 다시 씨불여보아라. 지금 뭐라고 했어?”
윤첨산이 뺨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정문 계단을 완전히 내려온 윤첨산이 복성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눈을 부라렸다.
심지어 은은한 살기까지 내뿜고 있으니 복성은 오금이 저려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안 돼! 남, 남궁세가가 내 손에 달렸어!’
복성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윤첨산의 사나운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냈다.
“묻지 않느냐? 뭐라고 했냔 말이다!”
다시 윤첨산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수문 무사 두 명도 어깨를 움찔거리고는 물러났다.
그럼에도 복성은 두 눈을 부릅뜨고는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만 떠올렸다.
‘공자님이라면……! 공자님이라면……!’
마침내 복성이 뭐가 쓰인 것처럼 짝다리를 짚더니 어깨를 딱 펼치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남궁천처럼, 어딘지 이죽거리듯 말을 뱉었다.
“듣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당장 남궁세가를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공자님께서 윤종승 공자를 천하의 무림 호구로 만들어 버릴 거라고요! 그뿐만 아니라 뒈지도록 패서 반병신으로 만들어 인간 구실도 못하게 만들걸요? 멀쩡한 손으로 밥을 먹고, 멀쩡하게 앉아서 똥을 싸게 하려면 본 가를 도와주시죠? 누워서 똥 싸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요!”
“…….”
“…….”
이제는 윤첨산뿐만 아니라 수문 무사들까지 입을 딱 벌리고는 미동도 하지 못했다.
‘저, 저 미친놈이 어쩌자고 저런……?’
‘아이고, 저 시종이 오늘 정말 죽겠구나!’
수문 무사들이 이젠 연민마저 담은 눈길로 복성을 바라보았다.
윤첨산은 분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는지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있었다.
그럼에도 복성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네놈이 정녕 뒈지고 싶어서 환장을…….”
“하지만!”
“……?”
복성이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니 이젠 이판사판이라는 심정뿐이었다.
“본 가를 돕는다면 분명히 사례할 것입니다! 우리 공자님은 은원을 분명히 가리시는 분! 윤 공자님께도 적절한 사례할 것입니다!”
“하! 이젠 살다 살다 별 거지 같은 시종 새끼한테 희한한 말을 다 들어보는구나! 네까짓 시종 놈이 그런 약조를 어찌할 수 있단 말이냐?”
“……!”
복성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서렸다.
‘통했어……?’
윤첨산은 여전히 활화산 같은 얼굴을 하고는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르다.
처음 자신을 대할 때와 지금의 태도가 미약하나마 달라졌다.
복성은 확신했다.
‘이게 먹히고 있어!’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소리였다면 지금쯤 윤첨산은 대답 대신 주먹을 날렸을 거다.
한데 윤첨산이 약조를 보장하라고 윽박지르는 게 아닌가?
“저는 공자님이 태어난 순간부터 평생을 바로 곁에서 모신 시종입니다. 공자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만약 제가 틀렸을 경우에는…… 가주님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자결하겠습니다!”
복성의 표정에서 진심이 뚝뚝 묻어난다.
윤첨산이 다소 복잡한 시선으로 복성을 노려보았다.
그는 남궁천이 지금 남궁세가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아들 윤종승이 남궁천과 함께 하북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왔으니까.
문제는…….
‘저놈 말대로 남궁천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는 거지.’
그래도 황산에서 윤가를 이만큼 키워낸 윤첨산이었다.
그는 가주로서 남궁가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확실히 최근 남궁가는 급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단연 남궁천이 있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녀석이 갑자기 무연회에서 우승을 하고, 금왕의 딸을 구하더니, 광서성에서 공을 세우고, 칠대세가를 급습한 흑도인들까지 막아냈다.
게다가 이번에는 팽가와 언가의 몰락까지 막아내서 입소문이 자자하지 않은가?
이 정도 되면 솔직히 남궁천이 맹물을 술로 바꿀 줄 안다고 해도 그러려나 싶을 정도다.
게다가 윤종승이 이상하게 남궁천을 떠받드는 듯한 태도까지 보이고 있으니…….
‘젠장…….’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섣불리 내칠 일이 아니다.
황산윤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던가?
바로 큰 힘에 빌붙어서…… 아니, 시류를 잘 읽어내는 능력 때문이지 않은가?
황산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꿈틀대는 남궁세가에 빌붙어서…… 아니, 남궁세가를 도와서 돈독한 관계를 가져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지도?
윤첨산의 마음이 복잡하게 움직인다는 걸 눈치챈 복성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본 가를 친 적들의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대로 본 가가 무너진다면 황산 인근에는 이제 귀 가문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럼 윤가도 안심할 수 없게 됩니다.”
“네놈이 지금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아까부터 지금까지 저는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돌처럼 굳어 있던 윤첨산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적은 몇 명이나 되느냐?”
복성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드디어 윤첨산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하나 적의 머릿수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수문 무사로부터 들은 말을 응용해서 대충 둘러댔다.
“확실하진 않습니다. 다만 본 가의 두 배는 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나…….”
윤첨산이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적이 많다.
황산윤가 무인들을 모두 끌고 간다면 그래도 머릿수 균형은 맞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적의 인원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
만약 적이 너무 많으면 황산윤가도 위험해진다.
괜히 불난 옆집에 뛰어드는 꼴이 될 수도 있다.
하나…….
“윤 공자님을 생각해서라도 용단을 내려주십시오!”
저 개 같은 놈이 아들을 인질처럼 써먹고 있다.
“끄음.”
한 차례 침음을 흘린 윤첨산이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본 가가 남궁가를 도와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웃의 불행을 지켜볼 수 없기에 나서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복성이 바닥에 머리를 찧어가며 소리쳤다.
* * *
“헉, 헉, 헉……! 우웩!”
어찌나 쉬지 않고 달렸는지 윤종승이 무릎을 짚더니 헛구역질까지 했다.
먼발치 장엄한 성벽이 보였다.
안휘 성도인 합비였다.
남궁천 일행은 지난날 진주에서 출발한 후로 밤낮없이 달려서 합비까지 온 것이다.
하나 아직도 갈 길은 먼 상황.
황산의 남궁세가까지 달려가려면, 만 하루 가까이 꼬박 경공을 펼치며 달려야 하리라.
문제는 지금도 체력이 바닥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비록 윤종승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헉, 헉, 헉……! 합비다. 조금 쉬었다가 가자! 헉, 헉, 웁……!”
팽수혁이 치미는 구역질을 얼른 삼키고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콧김만 식식 뿜어댔다.
유현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나마 팽수혁보다는 안정적이었는데, 어쩌면 남궁천이 주었던 소환단을 복용한 덕을 본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앞으로가 문제다. 이런 식으로 대책 없이 달리다간 황산에 도착해선 싸울 기력이 남아나지 않을 터.
“후우, 후우. 팽 소협 말대로 조금 쉬었다가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게 어떻습니까?”
“안 돼. 늦어.”
남궁천의 단호한 대답에 견습생들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팽수혁이 발끈해서 외쳤다.
“야! 늦는지 안 늦는지 네가 어찌 알아? 안 늦을 수도 있지!”
“그러다가 늦으면? 네 가문의 존폐가 걸려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나?”
남궁천이 무심한 눈길을 던지며 묻자, 팽수혁이 입을 흠칫거리다가 곧 뒤통수를 긁적였다.
“미안하다. 실언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아무리 네가 미친 괴물 같은 놈이어도 문제가 된다. 공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가문을 위해 싸울 수나 있겠어?”
“팽수혁 말이 일리는 있어. 방법을 생각해 보자.”
진소홍까지 나서서 남궁천을 말렸다.
남궁천 역시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침 팽수혁이 다시 말했다.
“정 쉴 수 없다면 합비에 무림맹 분타가 있으니, 거기에서 말을 빌리도록 하자.”
“오, 그거 좋은 생각이야! 말을 타고 가면 공력도 아낄 수 있을 테니까!”
윤종승을 비롯한 다른 견습생들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남궁천도 그것까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궁천 일행은 곧바로 합비로 들어가서 무림맹 분타를 찾아갔다.
정문을 지키고 선 무인 두 사람이 견습생들을 보고는 물었다.
“멈춰라. 너희들은 누구냐?”
“무림맹 견습생입니다.”
견습생들이 한 명씩 나서서 신분을 밝히고 용무를 말하자, 수문 무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어딘지 감격에 겨운 것 같기도 하고, 반가운 이를 보는 것 같은 얼굴이기도 했다.
견습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수문 무사 하나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하는 게 아닌가?
“남궁 공자! 남궁 공자가 맞군요! 이리 훌륭하게 성장하시다니!”
“응?”
“아는 사이?”
견습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았지만 남궁천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천의 기억은 죽음에서 깨어난 이후부터였기에.
수문 무사들이 앞다투어 나섰다.
“저는 남궁세가 창궁단 소속이었던 오형위입니다! 소가주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도 남궁세가 창궁단 소속이었던 송명입니다! 이렇게 공자님을 다시 만나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아…….”
남궁천이 그제야 애매하게 대꾸했다.
이들 모두 남궁세가 소속이던 무인들인 모양이었다.
가세가 기울고 나서 뿔뿔이 흩어진 무인들 중, 이곳 합비 분타로 와서 근무하는 자들도 꽤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그러잖아도 최근 남궁세가가 재건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환을 고려 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 남궁세가를 다시 일으키고 있는 소가주가 나타났으니 감격에 겨울 수밖에.
“가주님은 잘 지내시지요?”
“다른 식구들도 보고 싶습니다!”
수문 무사들이 들뜬 마음으로 말을 건네던 중, 남궁천이 서둘러 용건을 꺼냈다.
이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잡담이나 나눌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용건을 들은 수문 무사들의 표정이 대번 굳어졌다.
“그런 일이 있군요! 지금 당장 분타주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수문 무사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가자 팽수혁이 씨익 웃으며 남궁천에게 말했다.
“봤지?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한다니까. 그래야 손발이 편한 법이야. 덤으로 그리운 사람도 만나고.”
그런데 안으로 들어갔던 수문 무사가 돌아왔을 때는 꽤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자님. 상황이 좀 어렵게 됐습니다.”
“무슨 일이지?”
“최근 본 맹이 흑도인들과 전쟁 중이라 절차가 까다로워졌답니다. 정확한 신분을 파악하기 전에는 말을 빌려줄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팽수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불쑥 나섰다.
“아니, 남궁천 안다면서요? 두 분이 신분 보장을 해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해봤소. 하지만 분타주께서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뭐라고요?”
이쯤 되자 팽수혁이 발끈해서 나섰다.
“지금 상황을 제대로 전한 게 맞습니까? 황산으로 흑도인들이 몰려갔다는 정보를 받고 지금 가는 중이라니까요! 한시가 급한데 내일 오라니요?”
“나도 그리 말했지만 분타주께서 워낙 절차를 중히 여기시는 분이라서…….”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립니까? 당장 가문이 위험한데 절차는 무슨 빌어먹을 절차……!”
그때였다.
“이노옴! 무엄하다!”
순간 정문 안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더니 팔자수염의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족제비처럼 찢어진 눈에 꽤나 신경질적으로 생긴 인상이었는데, 그가 바로 안휘성 합비 분타주였다.
분타주가 도끼눈을 뜨고는 견습생들을 노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