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남궁세가가 내 손에 달렸다
남궁검이 심청원 밖으로 뛰어나왔을 때는 이미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마침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무인 하나가 남궁검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가주님! 사방이 적입니다! 우선 밖으로 피하십시오!”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딜 간단 말이더냐?”
차앙!
남궁검이 차갑게 일갈하고는 검을 뽑아냈다.
순간 그의 검에서 시퍼런 검기가 풀풀 휘날렸다.
“하지만 적이 너무 많……!”
푹!
보고하던 무인은 말을 마저 맺지 못했다.
그의 뒤통수로 날아든 화살이 이마를 뚫고 튀어나온 것.
무인이 그대로 고꾸라지자마자 다시 세 대의 화살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쒸쒸쒸에에엑!
따당! 땅!
남궁검이 얼른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화살을 쳐냈다.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내공이 실린 사자후에 장내의 모든 무인들이 움찔거렸다. 그래도 같은 종류의 내공을 익힌 남궁세가 무인들은 피해가 덜한 편.
다음 순간 남궁검이 빛살처럼 몸을 날려 일검에 적을 양단했다.
쉬아아악!
“크악!”
상하반신이 그대로 양단된 흑의인이 끔찍한 모습으로 널브러져서는 경련을 일으켰다.
“여기 가주다!”
“가주를 죽여라!”
한 흑의인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가주님을 보호해라!”
누군가 외치자 남궁검이 다시 소리쳤다.
“필요 없다! 적을 섬멸하는 것에 집중하라!”
남궁검이 동시에 검무를 펼쳤다.
선풍도골의 풍채로 펼치는 검무는 그야말로 신선의 움직임이 연상될 정도였다.
검이 허공을 가르고 장삼이 펄럭이면 핏줄기가 그 뒤를 이었다.
촤악! 쉬익, 촤악! 촤촤아악!
“크악!”
“으아악!”
새까만 우주에 남궁검 홀로 무아지경이 되어 검무에 취한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대단한 것은 그의 몸에 피 한 방울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혈이 난무하는 사투 속에서도 그는 청색 옷자락을 깔끔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적들이 칼에 베인 대나무처럼 픽픽 쓰러져 나가는 사이 남궁화가 달려 나왔다.
“아버지! 살아 있는 시종들은 모두 모았어요!”
“잘했다. 빠진 자는 없느냐?”
남궁검이 연신 검을 휘두르며 묻자, 남궁화도 적을 상대하며 가까스로 대답을 이어갔다.
“복성이 보이지 않아요.”
“복성이라면 천이 시중을 들던 녀석이 아니더냐?”
“맞아요.”
“시체는?”
“시체도 확인하지 못했어요.”
“그럼 됐다. 달아났든 숨었든 목숨이 붙어 있다면 다행이지. 일단 무공을 익히지 않은 식솔들을 데리고 장원을 벗어나도록!”
“제가 이곳을 맡을 테니 아버지가……!”
“내 말 들어라! 화야!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촤아악!
순간 남궁검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흑의인의 목을 일격에 날려 버리고는 휙 돌아섰다.
남궁검이 맹렬한 눈빛으로 남궁화를 보며 말했다.
“네 임무는 지금부터 무공을 익히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든 지키는 것이다! 그들이 안전한 장소에 이르렀거든 그때 다시 와도 아무 말 하지 않겠다.”
“아버지…….”
남궁화가 입술을 꾹 씹고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남궁검의 눈빛은 더 없이 단호했다. 결국 남궁화가 돌아서며 달렸다.
“금방 다시 올게요!”
남궁화가 달려가는 것을 본 남궁검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주변을 슬쩍 훑어보았다.
주춤주춤……!
어느새 남궁검을 에워싼 흑의인들이 반원을 그리면서 완벽하게 포위했다.
하나 남궁검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적들을 훑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거라.”
말 한마디에도 예기가 서린 듯하다.
섬뜩한 기운이 목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
눈빛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살기에 짓이겨져 걸음조차 쉬이 뗄 수 없다.
남궁검이 의식적으로 그 살기를 살짝 거두어들이자 마침내 용기를 낸 흑의인 하나가 도화선이 되었다.
“죽어라아앗!”
“이여업!”
“흐아아앗!”
부채꼴로 펼쳐졌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남궁검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그와 동시에 남궁검이 검을 횡으로 휘둘러갔다.
그 일련의 동작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이걸 어찌 표현해야 할까?
은은하다고 해야 할까?
그저 부드럽게 검신으로 주변을 훑는 것만 같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경악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연푸른 검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불나방 떼처럼 날아들던 흑의인들이 저마다 몸을 뒤집고 쓰러진 것이다.
“크아악!”
“아악!”
“으아악!”
미명적노(未明赤露).
창궁무애검법의 초식 중 하나.
초식명 그대로 대성의 경지에 오르면 검기가 동틀 무렵 미명처럼 번져나가면서 핏빛 이슬을 맺게 한다.
제아무리 남궁검이라도 이번만큼은 장삼에 몇 방울의 피가 튀었다.
하나 그가 보여준 신위는 아군에겐 사기를 불어넣고, 적에겐 공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흑의인들이 감히 공격은 이어가지 못하고 주춤거릴 때였다.
쉬이이잇!
적들 사이로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남궁검이 재빨리 돌아서며 일검을 후렸다.
따아아앙!
청명한 금속성에 이어 남궁검의 몸이 서너 장이나 주르륵 미끄러졌다.
콰득!
뒤로 뻗은 발에 공력을 싣자 발자국이 깊숙하게 생기면서 가까스로 몸이 멈췄다.
남궁검이 날카로운 눈으로 적을 보다가 미간을 슬쩍 구겼다.
“네놈은……?”
“그간 강녕하셨소? 적랑단주. 아니, 이젠 그냥 남궁 가주라 불러야 하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 한쪽 눈썹에는 쇠고리를 세 개나 박아 넣은 사내.
그가 바로 흑천마객이었다.
오래전 남궁검으로부터 깊은 부상을 입고 목숨까지 위태로웠던 자.
그가 도신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기억을 못할 줄 알았는데 영광이외다.”
“용케도 살아 있었군.”
“덕분에. 한데 남궁 가주께서는 많이 늙으신 것 같소.”
그럴 수밖에.
한창 젊은 나이에 만났다가 일흔이 훌쩍 넘어서 재회한 것이니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흑천마객은 마공으로 젊음을 유지한 것인지 중년의 나이로만 보였다.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지난날의 복수인가?”
“뭐, 겸사겸사. 그쪽이 우리 물건을 가져갔다는 소리를 들어서.”
“흥!”
남궁검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너희들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갔던 게 아니더냐? 너희 논리대로면 이제 우리 것이지.”
“호오! 듣고 보니 그렇네?”
흑천마객이 너스레를 떨더니 눈살을 살짝 여미고는 남궁검을 향해 자박자박 걸어왔다.
“한데 참 묘하군. 어딘지 달라지셨소. 예전에는 앞뒤 꽉 막힌 자였는데, 뭔가 지금은 사람 비위를 건드릴 줄 안달까?”
“헛소리가 길다.”
우우우웅!
남궁검이 검에 공력을 주입하자 검신이 떨면서 우는 소리를 내질렀다.
흑천마객이 피식 웃더니 시뻘건 도를 들어 올렸다.
“뭐, 아무래도 좋소. 어차피 오늘 댁의 가문은 역사에서 사라질 테니까.”
“주둥이부터 터는 버릇은 여전하군.”
“가주도 어디 여전한지 봅시다!”
파앙!
순간 흑천마객이 화살처럼 몸을 던졌다.
* * *
쾅쾅쾅!
야밤에 시끄러운 소리가 황산윤가 정문에서 울렸다.
이제 막 문을 닫고 잠시 쉬려던 수문 무사 둘이 서로를 힐끔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마 지나가던 주정뱅이가 실수로 문을 두드린 것이리라.
그러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황산윤가의 대문을 저리 무식하게 두드려 댈까?
평소라면 당장 문을 열고 나가서 혼쭐을 내줬겠지만 오늘은 둘 다 만사가 귀찮았다.
놔두면 알아서 꺼지겠지.
그렇게 넘어가려는데…….
쾅쾅쾅! 쾅쾅!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빌어먹을 새끼! 도대체 어떤 놈이야?”
결국 수문 무사들이 벌떡 일어나서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웬 놈이냐!”
“술 처먹고 할 짓이 없어서 명을 재촉……!”
“도와주십시오! 남궁세가에서 왔습니다!”
순간 눈앞에서 바닥에 넙죽 엎드리는 사내를 본 수문 무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 앞에서 간절하게 외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복성이었다.
두 수문 무사가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복성이 거듭 외쳤다.
“가주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한시가 급한 문제입니다!”
“뭐? 어디서 왔다고?”
“남궁세가에서 왔습니다!”
“남궁……? 남궁이 여기에 왜 찾아온 거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가주님을 뵙게 해주십시오!”
복성이 다짜고짜 수문 무사들 사이를 파고들려고 하자, 얼른 그 앞을 막아서며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크윽!”
쿠당탕!
수문 무사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복성을 노려보았다.
“아니, 이 미친놈이 뭐 이렇게 대책 없이 들이대? 정신 나갔어?”
“보아하니 시종 같은데 남궁가가 이제 미쳐 돌았나 보군. 그리 급하고 중요한 문제인데 시종 따위를 보내?”
“썩 꺼져라! 중요한 문제면 윗선에서 다시 와야 할 거다.”
수문 무사들이 손을 털고 돌아가려고 하자, 복성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것들아! 우리가 위험해지면 너희들은 멀쩡할 줄 알아? 만약 흑도인들이 본 가를 공격한 거면 다음 차례는 너희들이야! 알긴 알아?”
“뭐? 흑도인?”
그제야 수문 무사가 심상찮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복성이 벌떡 일어나서 삿대질까지 하며 외쳤다.
“그래! 흑도인들이다! 엄청난 수의 흑의인들이 지금 본 가를 기습했단 말이야! 그런데 동향 사람으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문전박대를 해?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어찌 이럴 수가 있냐!”
“나참,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너 지금 흑도인이 어디에 있는 줄 알아? 하북에 있어, 이 새끼야. 그런데 그 흑도인들이 갑자기 황산에 나타났다고? 겨우 남궁가를 치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 병신들은 대화가 안 통하네! 비켜! 나는 너희 가주를 만나야겠으니까!”
복성이 무시하고 들어가려고 하자 수문 무사들이 얼른 그 앞을 막아섰다.
“이 새끼가 진짜 뒈지도록 얻어터져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네.”
“오냐, 너 어디 한 번 죽어보자. 오늘이 제삿날인 줄 알아라!”
퍽! 퍽퍽!
수문 무사들이 아예 작정을 하고 복성을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복성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으아아아아!”
검집이 등과 허리, 허벅지를 아무렇게나 두드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수문 무사의 허리춤을 붙들고 힘으로 밀어붙였다.
“이 새끼가!”
“안 놔? 이 새끼야!”
퍽! 퍽퍽! 빠악!
“크읍! 이 개새끼들아! 날 너희 가주한테 데려가 달라고!”
“이 미친……!”
그때였다.
“이 무슨 소란이냐?”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정문 안에서 들려왔다.
복성은 자신을 향해 신나게 매질을 하던 수문 무사 둘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걸 느꼈다.
그제야 복성이 고개를 들어 보니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황산윤가주 윤첨산이었다.
그가 미간을 푹 찡그리고는 복성을 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그제야 복성이 얼른 그 자리에서 무릎을 털썩 꿇으며 소리쳤다.
“가주님! 남궁세가에서 온 복성이라 합니다! 본 가가 지금 위기에 처했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남궁가에서? 흥! 본 가가 왜 남궁가를 도와야 하지?”
예상대로 윤첨산의 태도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복성은 순간 머리를 굴렸다.
어찌 말해야 하나?
무인 하나가 아쉬운 판국에 황산윤가를 어찌 끌어들이나?
앞서 남궁세가에 문제가 생기면 황산윤가도 무사하기 힘들다고 해야 하나?
하나 그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요? 공자님.’
뜬금없이 남궁천이 보고 싶어졌다.
왠지 남궁천이라면 어떻게든 할 것 같았기에.
‘공자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공자님이라면……!’
복성이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만약 본 가를 도와주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공자님이 윤종승 공자를 평생 공식 호구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요! 아주 개 패듯 패서 반병신으로 만들어 버릴 겁니다!”
“뭐, 뭐 이 새끼야? 저, 저……!”
윤첨산이 뒷목을 움켜잡았다.
어…… 이게 맞나?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