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남궁세가가 내 손에 달렸다
순간 남궁천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가 흠칫거리고는 홍안개를 보았다.
팽적호가 먼저 관심을 두었다.
“흑도인 무리가 황산으로요?”
“그렇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흑무련은 언가를 총공격하고 있었는데요.”
“하면 흑도인이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한 무리의 정체불명 무인들이 황산으로 갔다는 것만은 틀림없소.”
“아무래도 이상하군요. 만약 흑도인들이라면 도대체 왜 황산으로 갔을까요?”
팽적호가 턱을 괴며 생각하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해 봐야 나올 것도 없군.”
그 자조적인 말투에 몇몇 무인들이 툴툴 웃음을 흘렸다.
남궁천이 홍안개를 보며 물었다.
“목격자가 누굽니까?”
개방의 정보 중에서도 장로까지 올라온 것이라면 꽤 신뢰할 만하다. 그들이 흑도인이든 아니든 황산에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건 틀림없으리라.
홍안개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꾸했다.
“목격자는 만취개 장로일세.”
“만취개 장로가!”
“허어! 그렇다면 분명 황산에 변고가 생길 수도 있겠군요!”
팽적호와 언양걸이 동시에 소리쳤다.
홍안개로서는 자신보다 만취개를 더욱 신뢰하는 모습들에 불만이 생길 법도 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만취개는 무림칠성 중 하나로, 무공의 수준이 절대자의 경지에 올라 있는 자였다.
홍안개가 뒷말을 붙였다.
“사실 만취개 장로는 그들이 고의적으로 흑도 행세를 한 것일 수도 있다고 판단하셨네.”
“그렇다면 그 정체불명인들이 일부러 자신들을 노출한 거란 말씀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물론 그들은 목격자가 만취개 장로일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흑도인들 중 정확히 어떤 자인지는 모르고요?”
남궁천의 질문에 홍안개가 망설이는 기색 없이 대꾸했다.
“그들이 흑운대라는 말을 했다더군.”
그 말에 남궁천과 팽적호, 그리고 언양걸도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세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팽적호가 제일 먼저 입 밖으로 냈다.
“그렇다면 그들은 흑도인이 아닐 가능성이 크겠군요.”
“왜 그런가?”
“흑운대는 어제 언가장을 공격했으니까요.”
“과연 그렇군.”
홍안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흑운대주가 남궁천의 손에 죽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황산을 간 거지? 그들은 왜 황산에 가는 거지?”
“자세한 건 나도 알 수 없소. 다만 그런 일이 있으니 황산에 본 가를 둔 강호신룡이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한 것일 뿐이오.”
언양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어쨌든 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그리고 언 가주가 감사할 게 뭐 있소?”
“감사하지요. 남궁 소협은 본 가와 팽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두 가문의 화합을 이끌어냈지요. 그런 만큼 남궁 소협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면, 본 가의 득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언양걸의 말에 팽적호도 동의하고 나섰다.
“옳은 말씀입니다. 팽가 또한 남궁 소협의 기지에 요 며칠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본 가가 멸문할 뻔한 것을 남궁 소협이 막아주었지요. 우리 두 가문은 강호신룡에게 갚기 힘든 은혜를 입은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두 가문의 수장이 이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자 홍안개가 놀란 표정으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은 이렇게 묻는 듯했다.
‘얘가……?’
남궁천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제가 좀 그렇네요. 하하.”
도대체 어딜 봐서 그만한 인재라는 거지?
홍안개가 영 미덥지 못한 시선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천 때문에 강시에게 맞아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하나 그도 알고 있었다.
강호신룡이라는 별호로 쌓은 업적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무연회 우승은 물론이며 탈주를 시도한 도절귀를 잡은 것과 광서성의 활약까지.
개방에 몸을 담은 그는 누구보다도 강호신룡의 명성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다만 오늘 그 좋은 느낌이 많이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아,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려고 하네.’
정말이지 강시들을 줄줄이 끌고 달려오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언양걸이 얼른 홍안개를 안내했다.
“자,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먼 길 달려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언 가주도 고생하셨소.”
두 사람은 덕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안채로 걸음을 옮겨갔다.
* * *
난장판이 되었던 언가가 어느 정도 뒷정리를 끝냈을 때는 거의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물론 무너진 담벼락이나 불에 타 버린 전각은 복구될 때까지 꽤 시일이 걸리겠지만, 우선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거기에 개방까지 상주하고 있으니 혹여나 흑무련이 다시 쳐들어온다고 해도 이제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뿐인가?
이제는 당당하게 강시를 사용해도 되는 상황이 되었으니 언가로서는 천군만마를 갖춘 셈이나 마찬가지.
해가 완전히 넘어갔을 때 남궁천은 언양걸이 있는 가주전을 찾아갔다.
“어서 오게. 필요한 게 있는가?”
언양걸은 남궁천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로서는 남궁천이 저절로 굴러 들어온 호박이나 다름없었다.
정말이지 딸이라도 있었더라면 당장 혼례를 추진하고 싶을 정도였다.
강령신공에 대한 깨달음에다가 팽가를 얻게 해주었고, 분타주는 덤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젠 강시까지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됐으니 어찌 남궁천이 곱게 보이지 않을까?
남궁천의 말이라면 이제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축하드릴게요.”
남궁천의 말에 언양걸이 껄껄 웃었다.
“모두 자네 덕분일세.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렇고말고. 자네가 아니었다면 본 가는 지금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을 걸세.”
“흐응.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아. 말만 들으니까 실감이 안 가서요.”
남궁천이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언양걸은 은근히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하여튼 이 녀석은 다 좋은데 가끔 질리는 구석이 있다니까.’
언양걸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내 그,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 성의 표시를 하고 싶었다네.”
“여윽시! 언가주님은 세 치 혀로 은혜를 퉁 칠 분이 아니라는 걸 진작 알았습니다!”
“어…… 그래…….”
“그래서 그 성의는 어디에?”
남궁천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묻자, 언양걸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훔쳤다.
‘너무 노골적이잖아! 이놈아!’
그러다가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긴.
남궁천은 그래도 된다.
언가에게 해준 게 얼마나 많은가?
따지고 보면 팽가보다도 더 많은 혜택을 입지 않았는가?
언양걸이 수납장으로 걸어가더니 미리 준비해 둔 목함을 들고 왔다.
“받으시게.”
“감사합니다!”
남궁천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받고서는 그 자리에서 바로 덮개를 열어보았다.
순간 약향이 실내에 가득 찼다.
다만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맑아질 듯 청아한 향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보통의 영약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단환은 세 개였다.
언양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 붉은색은 초혼단(招魂丹)이고, 흰색은 백령단(白靈丹)일세. 그리고 갈색은 강령신단(殭靈神丹)일세.”
“그렇군요.”
남궁천이 어딘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당황한 언양걸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초혼단은 본 가가 자랑하는 신단일세.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이 초혼단을 사용하면 어떻게든 위기를 넘길 수 있다네. 대환단이나 태청단(太淸丹)처럼 엄청난 내공을 주진 않지만, 위급 시에는 아주 요긴할 것이야.”
“네.”
역시나 별 감흥이 없는 대꾸에 언양걸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그리고 백령단은 복용하는 순간 머리가 맑아져서 일정 시간 내공의 흐름을 쾌속하게 만들어 준다네. 경공을 비롯한 모든 무공의 속도가 향상될 걸세.”
“음. 확실히 강시술을 사용하는 무가답게 신기한 영단이 많네요.”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언양걸이 얼른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렇고말고! 그리고 이 강령신단은 복용한 순간 마치 강령신공을 사용한 것처럼 신체를 도검불침으로 만들어 준다네! 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약효가 떨어지지만 유사시에 요긴하게 사용될 걸세!”
“네에, 네.”
남궁천이 어쩐지 이번에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 뭐가 마음에 안 드나?”
“뭐, 마음에 들긴 하네요.”
“어째…… 아닌 것 같은데?”
“마음에 든다니까요.”
“정, 정말인가?”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표정이 영…….”
“아,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언양걸이 잠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초혼단과 백령단, 강령신단을 앞에 두고 딴생각이라니.
어지간해서는 생도 주제에 구경도 못할 영단이 아닌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아, 뭐 별건 아니고요. 그냥 수십 구의 강시를 다 폐기했더라면 지금쯤 언가가 어떤 상황이었을까? 내가 강령신공에 대한 실마리를 주지 않았다면? 내가 팽가를 구하러 가자고 설득하지 않았다면? 이 내가 뭐 그런 것들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설들?”
“끄응…….”
“그럼 분타주고 나발이고 지금쯤 여기 허허벌판이 되어 있겠지? 그거 참 쓸쓸했겠다. 뭐, 언 가주님 묘비를 세우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이런 생각들을…….”
“알았네! 알았어! 거참, 사람하고는! 나는 그저 이런 걸 자네에게 줄 수 있다는 뜻으로 예시를 보여준 걸세.”
“역시 그렇죠?”
남궁천이 속없는 사람처럼 헤실헤실 웃어 보인다.
다시 불길한 예감이 음습하는 언양걸이었다.
“크흠!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그럼 사양하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잠, 잠깐!”
“왜요?”
“그, 그러니까…… 저어 전각도 좀 부서지고, 담벼락도 무너지고…… 본 가가 앞으로 할 일이 많다네.”
언양걸은 도대체 왜 이런 말을 남궁천에게 하면서 사정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런 말들이 튀어나왔다.
남궁천이 손을 저었다.
“그럼요. 제가 언가 사정을 잘 알죠. 아무튼 제가 필요한 건…….”
“필요한 건?”
“초혼단 열 개. 백령단은 있는 대로. 그리고 강령신단 서른 개 정도?”
“뭐, 뭐라고?”
언양걸이 눈을 찢을 듯 부릅뜨고는 입을 딱 벌렸다.
강령신단 서른 개를 주게 되면 남는 건 세 개밖에 없다.
만약 간밤의 전투가 아니었다면 훨씬 많이 남아 있었겠지만, 이미 상당수의 강령신단을 써버린 것이다.
게다가 초혼단 열 개라니.
“초혼단은 지금 겨우 열한 개만 남았는데…….”
언양걸이 난색을 드러내자, 남궁천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만약 언가가 멸문지화를 당했더라면 여기도 천장 대신 하늘이 보였겠네요. 그럼 저는 또 쓸쓸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언가주님 묘비에 술이나 뿌리고…….”
“허허! 은인에게 초혼단이 대수겠는가? 얼마든지 줌세.”
“역시 언 가주님은 화끈하십니다.”
“자네는 화끈한 개새…….”
“예?”
“……개선장군 같군.”
언양걸이 더없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뺨을 부들거렸다.
‘그래, 그래도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다.’
언양걸이 애써 아쉬움을 달래며 물었다.
“그런데 그 많은 신단을 한꺼번에 뭐에 쓰려고 그러나?”
“만약을 대비해서요.”
“만약을?”
“예, 여긴 이제 안전할 거예요. 개방이 상주할 테니까요. 게다가 강시도 있고.”
“하면 자네는 이제 떠날 생각인가?”
“예, 황산으로 가려고요. 본 가에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긴.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하겠지.”
언양걸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남궁천이 이렇게 서둘러 떠나려는 이유는 비단 홍안개가 전한 정보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서 맹주가 합비 분타의 무인을 대거 차출했다는 소식도 들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냄새가 난단 말이지. 맹주 그 영감탱이의 구린 방귀 냄새가…….’
남궁천의 눈이 일순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