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장계취계(將計就計)
한차례 태풍이 휩쓸고 간 언가장은 그야말로 폐허를 방불케 할 지경이었다.
전각과 담벼락 곳곳이 부서지고 무너졌으며, 몇 군데는 불에 타서 전소되었고, 부상자와 사망자가 넘쳐났다.
여기저기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돌보느라 멀쩡한 사람조차 앓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도 살아남은 이들의 표정은 당당해 보였다.
그 악조건 속에서도 어떻게든 버텨냈다는 자랑스러움이 가슴에 은근하게 배인 듯했다.
팽가와 언가 무인들은 가문의 소속이 무색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부상자가 있으면 출신을 가리지 않고 기꺼이 치료하고 도와주니, 마치 한 가문에 소속된 무인들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던 팽적호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는 중얼거렸다.
“하북을 두고 팽팽하게 대립하던 두 가문을 이렇게 가깝게 붙여놓다니. 남궁천, 너란 녀석은 진짜…….”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마침 언양걸이 곁으로 다가왔다.
“팽가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소. 감사드리오.”
“별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본 가야말로 언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멸문을 면치 못했을 거요.”
“팽 가주. 그간 우리가 서로 반목하면서 지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화합하고 힘이 되어 주었으니 정말이지 뜻깊은 날이 아닌가 싶소. 비록 잃은 것도 많았지만, 팽가라는 인연을 얻어서 더없이 기쁘오.”
언양걸의 말에 팽적호는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팽가도 강호인들 사이에서 교류가 활발한 가문은 아니었다. 은근히 학문과 교양을 중시하는 명문정파들 사이에서는 팽가를 무식하고 단순하다며 폄훼하는 일이 흔했기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언가는 진심으로 팽가를 형제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언양걸의 눈빛에서 절절하게 흘러나오는 진심을 보니 절로 감개가 무량했다.
팽적호는 충동적으로 언양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본 가는 앞으로 언가와 생사고락을 함께할 것이오. 나 역시 언가와 인연을 맺게 되어서 더없이 기쁘오.”
“팽 가주…….”
“언 가주…….”
두 사람이 뜨거운 눈길로 서로를 보는데, 마침 뒤에서 남궁천의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보기 좋으시군요, 두 분.”
“남궁천.”
“어서 오게.”
팽적호와 언양걸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참 우스운 일이지 않은가?
팽가와 언가는 강한 힘과 신체를 과시하는 가문이다. 두 가문 모두 실전을 중시하는 것도 비슷하다.
그런 만큼 이들은 자연스럽게 나이 어린 자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실전이란 무엇보다 경험치가 중요하기에.
한데 눈앞의 이 견습생은 아직 약관도 채우지 못했음에도 든든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가문의 수장이 동시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
팽적호가 피식 웃었다.
‘원수의 자식이라고 눈엣가시처럼 여겼는데. 사람을 이렇게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는구나. 이 녀석은 정말 난놈이다.’
언양걸도 그저 흐뭇한 시선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무공만 강한 게 아니라 대세를 살피는 재능도 뛰어나다.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본 가가 마음 놓고 강시를 풀어놓을 수 있었겠나? 고맙다, 남궁천.’
역시 사람은 자세히 겪어봐야 아는 법이다.
남궁천이 이토록 고마운…….
“확실히 말씀은 전하셨어요?”
“응? 뭘?”
“분타주를 언가에 넘기는 거요.”
“아…….”
흐뭇하게 흐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애매해졌다.
언양걸이 식은땀을 닦았다.
‘아니, 분위기 파악은 좀 하고 말하라고!’
그런데 팽적호가 피식 웃더니 의외로 순순히 말을 꺼냈다.
“한 번 뱉은 말을 되돌릴 생각은 없다. 언가주. 정식으로 말씀드리겠소. 내가 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 하북 분타주는 무조건 언가를 밀어드리겠소!”
“고맙소. 팽 가주.”
언양걸이 진심으로 대꾸했다.
두 가주가 활짝 웃으며 서로를 다독이는 모습을 본 남궁천이 부서진 전각 난간에 기대며 말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일지도 모릅니다.”
순간 두 가주가 움찔거리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흑도인들이 다시 치고 올 거라고 생각 하는가?”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왕 강시까지 부린 데다 곧 개방까지 합류하면…….”
“아뇨. 그들도 생각이 있으면 다시 언가를 치진 않겠죠.”
“하면?”
남궁천이 표정을 굳히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가 두 가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문제는 무림맹입니다.”
“무림맹?”
“예, 참고로 흑무련주는 언가에 강시가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흐음.”
언양걸이 침음을 흘리고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
남궁천도 짐작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남궁천은 어찌 짐작했지?’
언양걸의 눈빛을 읽은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언가는 대대로 강시술을 이어온 가문입니다. 그럼에도 강시를 악의적으로 사용하지 않았기에 정사지간의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죠. 그러다가 나중에는 강시술을 폐하고 백도로 들어왔고요.”
남궁천이 언양걸을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명맥을 잇게 한 강시술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버리긴 어려웠을 겁니다. 여차하는 순간을 위해 마련해 뒀겠죠. 언가가 암벽 아래로 터를 옮긴 것도 그 이유에서라고 생각했어요.”
“정말이지 눈썰미가 대단하군.”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그런 이유로 흑무련주도 강시의 존재를 짐작했을 거예요. 그 자의 입장에서는 강시가 없으면 언가를 밀어버릴 수 있지만, 강시가 있어도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오히려 강시가 등장하길 바랐을 수도 있고요.”
“응? 그건 어째서 그렇지?”
이번엔 팽적호와 언양걸이 동시에 물었다.
강시가 있어서 가까스로 물리칠 수 있었는데, 오히려 그걸 바라고 있었다니.
남궁천이 서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분열을 노린 거죠.”
“……!”
팽적호와 언양걸은 바로 이해했다.
백도에서는 강시술을 철저하게 배척한다. 그러니 앞으로 많은 잡음이 잇따를 것이다. 어떤 이는 흑도인들을 물리친 것을 잘했다며 칭찬할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강시를 사용한 것을 두고 맹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논쟁이 격해질수록 갈등은 더욱 심해지리라.
“그렇군. 그래서 무림맹이 문제라는 거였군.”
“맞아요. 최악의 경우에는 무림맹이 언가를 등질 수도 있겠죠. 그리고 팽가도 같은 취급을 할 수 있고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
어디 그뿐이랴?
맹주 그 영감탱이 성격이라면 이 기회에 남궁세가까지 싸잡아서 묻어 버리려고 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게 목적일 수도 있다.
다 밟아놓은 남궁세가가 강호신룡의 등장으로 다시 인지도를 얻어가는 게 영 못마땅할 테니까.
더구나 대살성과 연관된 가문이 아닌가?
그렇게 세 가문을 매도한 직후부터는 위기의식을 고조시켜서 결집을 도모하겠지.
그게 바로 그 못된 맹주 영감탱이의 방식이니까.
“허참! 그럼 이 상황에서 고분고분 죽어줘야 한단 말인가!”
팽적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버럭 소리쳤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원래 사람들은 남의 사정 따위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확실히 듣고 보니 보통 문제는 아니군.”
언양걸이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리고는 저만치 담벼락 아래에 도열한 강시들을 보았다.
수십 구의 강시가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밤중에는 소름 끼치도록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존재들이 한낮이 되니 어쩐지 친근함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언양걸이 문득 묘안이 떠오른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강시를 다 없애 버리면 어떻겠나?”
팽적호가 무릎을 탁 쳤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증거가 없으니 혹여나 말이 새어 나가도 헛소문으로 치부할 거요.”
“그렇지. 그렇지. 좀 아깝긴 하지만 우리가 강시를 가지고 있다는 것보단 나을 것 같소.”
그때 남궁천이 입매를 슬쩍 틀어 올리고는 물었다.
“누가 그럽니까? 저 강시가 우리 거라고.”
“응? 그게 무슨 말인가?”
“강시도 버리지 않고, 분열도 막아낼 묘안이 있긴 합니다.”
“그래? 그게 뭔가?”
“어서 말해보게!”
어느새 언양걸과 팽적호가 눈동자를 빛내며 남궁천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왠지 남궁천이라면 무너진 하늘에 구멍도 뚫어버릴 것 같은 두 사람이었다.
“개방을 이용하면 됩니다.”
“개방을?”
“예. 개방은 강호에 정통한 정보단체이지만, 역으로 소문의 발원지이기도 하죠. 그만큼 여론 조성에 큰 힘을 발휘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개방을 어떻게 이용한단 말인가?”
“다행히 지금 언가로 지원 오는 곳이 개방 아닙니까? 아마 오늘쯤 도착한다죠?”
“그랬지.”
“직접 겪게 해주면 됩니다. 말로 설득할 바에는 직접 경험하는 게 최고죠. 뭐, 강시 몇 구를 손해 봐야겠지만 그래도 다 없애 버리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요?”
언양걸과 팽적호가 서로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뭘 경험하게 해준다는 거지?”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말을 조곤조곤 이어갔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두 가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마침내 팽적호가 크게 감탄을 터뜨렸다.
“오오! 이렇게 약아빠진…… 아니, 훌륭한 전략이라니.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 * *
언덕 위로 한 무리의 거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먼발치에서 시커먼 연기를 토해내는 언가장을 보았다.
아스라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도 들려오고 있었다.
거지들을 이끌고 온 홍안개(紅顔丐)가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을 더욱 벌겋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거지들아! 목적지가 코앞이다! 다행히 아직 언가가 버티는 중이다. 빌어먹을 거지들의 힘을 보여주자!”
“예, 장로님!”
거지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들이 곧 경공을 펼쳐 달려가려고 할 때였다.
“살, 살려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는 달려오는 게 아닌가?
그들은 바로 유현과 진소홍, 그리고 윤종승이었다.
홍안개가 한달음에 그들 앞까지 날아가서는 물었다.
“무슨 일이냐? 너희들은 누구냐?”
“아! 혹시 개방도이십니까?”
윤종승이 숨을 헐떡이며 묻자, 홍안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나는 개방 장로 홍안개다! 지금 개방도를 이끌고 언가에 지원을 가는 중이었다. 너희들은 언가에서 오는 길이더냐?”
“그, 그렇습니다! 제발 언가를 도와주십시오! 지금 언가와 팽가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흑도인들이 사악한 것을 이용해서……!”
“사악한 것? 일단 알았다. 자네들은 잠시 쉬게. 거지들아! 언가로 달려라!”
“예, 장로님!”
홍안개가 견습생들을 두고는 재빨리 경공을 펼쳐 내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언가장에 다다른 홍안개가 부서진 정문 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쉬이이익!
느닷없이 측면에서 강맹한 기운이 짓쳐 드는 게 아닌가?
“어딜!”
홍안개가 몸을 뒤집으며 팽이처럼 휘돌았다.
파파앙!
덮쳐오던 사내의 어깨를 발로 걷어찬 다음 곧바로 타구봉을 꺼내 휘둘렀다.
빠아악!
지체 없이 날아간 타구봉이 정수리를 강타했다.
당연히 머리가 깨지고 피가 터져야 할 것인데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홍안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강시……!’
놀랍게도 자신을 공격한 것은 핏기라곤 전혀 없는 강시가 아닌가?
붉은 눈을 끔뻑인 강시가 재차 홍안개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뻐어억!
언제 날아든 것인지 언양걸이 언가권으로 강시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동시에 포탄처럼 날아간 강시가 담벼락에 처박히면서 종잇조각처럼 구겨졌다.
“언 가주!”
“아! 개방의 홍안개 어른이 아니십니까? 마침내 도착하셨군요!”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요?”
홍안개가 주변을 둘러보며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장원 곳곳에서 무인들이 강시들과 싸우는 게 아닌가?
언양걸이 남궁천에게 들었던 대로 준비된 대사를 읊었다.
“그 비열한 흑도 놈들이 강시를 사용했습니다! 본 가가 강시술에 능하다는 것을 알고서요!”
“아니, 그걸 알면서도 오히려 강시를 사용하다니. 대체 이유가 뭐요?”
“아무래도 놈들의 강시술이 완벽하지 않다 보니 본 가의 비서를 탐한 것 같습니다!”
“허어! 언가에서 강시를 제어하기 위해 그 비서부터 찾아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홍안개가 알아서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러는 사이 거지들이 우르르 장내로 달려 들어왔다. 그 바람에 강시들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다시 난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런!”
“큰일이군요. 저놈들은 죽지도 않는 마물인데…… 물론 본 가 비서에 나오는 방식으로 부적을 만들면 제어가 가능할 것도 같지만…….”
순간 홍안개의 귀가 번뜩 뜨였다.
“지금 제어가 가능하다고 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