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장계취계(將計就計)
혈검단주 혈검추혼 백시랑.
오늘 그가 할 일은 언가를 완전히 장악하고 뒷정리까지 끝내는 것이었다.
전투 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혈검단이 투입된 직후 죽음도 불사한 항전의 의지를 다지던 언가 무인들은 사기가 급격히 추락하고 말았다. 팽가 역시 본원을 버리고 진주까지 와서 전멸을 각오하게 됐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손발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혈검추혼은 유유히 언가장을 누비고 다녔다.
아까부터 언가주는 어딜 간 것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 그는 자신을 향해 겁 없이 달려드는 언가의 무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일도양단해 버렸다.
촤아아악!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상하반신이 그대로 갈라져 버린 무인이 눈을 부릅뜬 채 절명했다.
그야말로 힘과 기술이 정교하게 어울리는 쾌도였다.
뭣도 모르고 달려들던 언가 무인들이 주춤거리며 그를 에워싸기만 하고는 감히 공격을 감행하진 못했다.
“흥!”
혈검추혼은 코웃음을 치고는 시체를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
“언가주와 팽 가주가 꽁무니를 숨기고 달아났다! 너희들도 항전을 멈추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두 가주가 사라졌다는 말에 무인들이 술렁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가, 가주님이 달아나셨다니?”
“무슨 소리야? 가주님은 분명 정문 망루에서 싸우시고…… 어?”
“가주님이 안 보이잖아?”
“팽 가주는 어디에 있는 거야?”
“이런 젠장! 정말 우리를 버리신 건가?”
무인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을 이끌어줄 통솔자가 사라졌으니, 머리를 잃은 뱀 꼬리처럼 갈팡질팡할 수밖에.
혈검추혼이 차갑게 웃었다.
“이제 알았나? 너희들은 본 련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니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투항해.”
“으으……!”
무인들이 마지막까지 갈등하면서 손에 힘을 풀려고 할 때였다.
“허튼소리!”
갑자기 우렁찬 소리와 함께 팽적호가 무리를 비집으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를 견습생들이 뒤따랐다.
팽적호가 동요하는 무인들을 둘러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동요하지 마시오! 언가주님은 지금 비장의 수를 준비하고 있소!”
공력을 담은 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리자 사기가 떨어지 던 언가 무인들이 다시 도검을 고쳐잡기 시작했다.
팽가 무인들 역시 다시 전의를 불태우며 몸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혈검추혼은 냉랭한 비소를 지우지 않았다.
“최후의 발악이라도 준비하시나?”
“닥쳐라! 내 네놈을 이 자리에서 죽이고 본 가의 원수를 갚겠다!”
파밧!
팽적호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몸을 날렸다.
그로서는 혈검추혼 때문에 가장을 버리고 달아난 뼈아픈 기억이 있었다. 때문에 혈검추혼의 얼굴만 봐도 욕지기가 치밀 지경이었다.
“흐아아압!”
팽적호가 대도를 내려찍으며 기합성을 터뜨렸다.
앞서 철나한을 단 일격으로 보내버렸던 혼원벽력도의 일도단천 초식이었다.
하나 혈검추혼은 노련한 강호고수였다.
그는 팽적호의 기세가 전에 없이 매섭다는 것을 깨닫고는 맞대응하기 보단 뒤로 슬쩍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꽈아아앙!
아니나 다를까, 팽적호의 대도가 강맹한 기세로 떨어지면서 바닥을 내려찍는 게 아닌가?
바닥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따다당!
혈검추혼이 가볍게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파편을 쳐냈다.
“그사이 깨달음이라도 있었소?”
혈검추혼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린다.
팽적호가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혼원벽력공에 대한 깨달음을 얻긴 했으나, 시간이 짧았다.
아직은 효율적으로 내공을 운기하고 도법을 구사하기 어려운 수준.
더구나 앞서 철나한을 상대할 때 너무 많은 공력을 과소비해 버린 탓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팽수혁이 버럭 소리치며 달려 나갔다.
“너 같은 놈 상대하는 데 깨달음 같은 건 없어도 된다, 이 새끼야!”
팽수혁을 필두로 다른 견습생들도 동시에 혈검추혼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네 명의 견습생들이 치고 빠지면서 차륜전을 펼치자, 혈검추혼이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막았다.
하지만 실전에서 구르고 구른 강호고수는 확실히 달랐다.
그는 처음에 조금 밀리는 듯하더니 나중에는 네 명의 생도들을 무리 없이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혈검단원들은 계속해서 불어나 장원 곳곳을 누볐다.
곳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펼치고는 있었지만 머릿수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혈검추혼을 돕기 위해 대주급 무인 두 명이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가소로운 것들이 날파리처럼 달려드는구나!”
“감히 단주님 앞길을 막으려느냐!”
두 명의 대주가 달려오자 이제는 견습생들도 치고받는 난전을 피할 수가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팽적호가 공력을 실어서 버럭 외쳤다.
“가주전으로! 가주전까지 후퇴한다!”
가문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내린 명령.
다행히 언가와 팽가 무인 모두가 그의 명령에 충실히 따라주었다.
어느새 그들은 운명 공동체로서 확실히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가주전까지 후퇴!”
“후퇴!”
팽가와 언가 무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가주전 안마당까지 물러났다.
그렇게 살아남은 무인들이 가주전에 빽빽하게 모여들자 묘하게 서로를 의지하게 됐다.
마침내 혈검추혼과 대주들을 힘겹게 상대하던 견습생들도 가주전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하하하! 이제 보니 팽가가 멍청하다는 건 단순히 헛소문이 아니었군! 기껏 머리를 짜낸 것이 가주전 안마당에 모여 몰살당하는 것이었소?”
어느새 가주전 대문 위로 우뚝 올라 선 혈검추혼이 낭랑한 웃음을 흘렸다.
이쯤 되자 팽 가주를 믿고 후퇴한 언가 무인들도 낭패한 표정이 됐다.
“팽 가주님! 이래서는 오히려 적에게 포위당한 꼴입니다! 무슨 대책이라도 있습니까?”
“전술 실패 아닌가?”
몇몇 언가 무인들은 팽 가주의 말을 들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팽적호는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혈검추혼을 빤히 노려보았다.
“나를 못 믿겠다면! 여러분의 가주를 믿으시오!”
그러는 사이 언가 무인들의 우려처럼 흑도인들이 속속 모여들어 가주전을 완전히 포위하기 시작했다.
가주전 안마당은 언가장에서 가장 넓었다.
때문에 흑도인들은 안마당까지 들어서서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야말로 물샐틈도 없을 포위망이었다.
정문으로 뚜벅뚜벅 걸어온 혈검추혼이 입매를 비틀었다.
“팽 가주. 그러게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시오. 이럴 거면 차라리 집에서 편히 가실 것을.”
“흥! 시끄럽다. 네놈은 북경에서도 그랬듯, 여기서도 실패할 것이다.”
“운 좋게 도망치시더니 또 그런 요행이 통할 줄 아시나 보군. 그대들도 참 안됐소. 무림맹조차 신경 쓰지 않으니.”
“……!”
“뭐, 더 이상 잡담이 길어질 필요는 없을 터. 이쯤에서 인연을 정리하도록 합시다.”
혈검추혼의 말이 떨어지자 가주전으로 모여든 무인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혈검추혼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쳐라.”
“복명!”
우렁찬 대답과 함께 흑도인들이 노도처럼 밀려들려는 찰나.
딸랑딸랑.
난데없이 맑은 종소리가 장내에 울리는 게 아닌가?
그 종소리가 몹시 기이하고 오싹한 기운이 있어 흑도인들도 멈칫거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혈검추혼 역시 평범한 종소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미간을 잔뜩 구기고는 고개를 들었다.
딸랑딸랑!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에서 울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여섯 방위에서 동시에 목소리를 울리는 육합전성을 펼친 것처럼, 지금의 종소리도 사방에서 동시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뭐야? 이건…….”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건 흑도인만이 아니었다.
언가와 팽가 무인들 역시 난데없는 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주변을 살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종소리가 너무나 또렷하게 귀에 달라붙지 않는가?
다음 순간.
딸랑딸랑!
또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참지 못한 흑도인 하나가 목청껏 소리쳤다.
“웬 놈이 장난질이냐! 목숨이 아깝거든 당장……!”
쉬이이이잇!
쿠웅!
흑도인은 말을 마저 맺지 못했다.
대신 하늘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뚝 떨어지더니 소리치던 흑도인 바로 앞으로 내려서는 게 아닌가?
“어……?”
고함을 내지르던 흑도인이 눈앞에 나타난 존재를 힐끔 보더니 그대로 몸이 세로로 갈라지면서 쓰러졌다.
츄아아아아!
철퍼덕!
피범벅이 된 시체가 쓰러지자 주변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흐이익!”
“뭐, 뭐야? 저게! 사, 사람인가?”
놀랍게도 하늘에서 떨어진 그림자는 핏기라고는 하나 없는 창백한 피부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딘지 눈동자에 초점이 없고 스산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진다고나 할까?
“웬 개뼈다귀 같은 놈이냐!”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흑도인 하나가 버럭 소리치며 달려 나왔다.
“멈춰!”
눈치 빠른 혈검추혼이 재빨리 소리쳤지만, 이미 흑도인은 핏기 없는 사내에게 달려든 직후였다.
쉬이이잇! 퍼엉!
놀랍게도 핏기 없는 사내가 수도를 휘두르자 흑도인의 몸이 폭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그제야 흑도인들은 핏기 없는 사내의 정체를 알아챈 듯 경악을 하며 물러났다.
“강, 강시다!”
“언가 놈들이 강시를 사용했다!”
당황하기는 언가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언가가 아직까지 강시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주와 몇 장로들만 알고 있는 극비 사항.
때문에 대부분의 가신들은 강시를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흑도인들이 대경실색하면서 소리치는데, 사방의 전각 지붕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빼곡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 지붕 위의 강시들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헉! 강, 강시들이닷!”
“으억! 죽은 자들이……!”
핏기 하나 없는 시체들이 붉은 눈을 부릅뜨고 장원을 내려다보는 모습은 가히 공포스러웠다.
하나 오랜 정체성을 되찾은 언가 무인들은 하나같이 고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팽적호 역시 마침내 나타난 구원의 손길을 보며 대도를 와락 움켜쥐었다.
“언가주께서 비장의 한 수를 꺼내 보이셨다! 이제 보복의 시간이다!”
“우와아아아앗!”
순식간에 전의가 들끓기 시작했다.
“으하하! 죽은 자가 이렇게 든든해질 줄이야!”
팽수혁이 호탕하게 웃으며 태도를 휘두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유현과 윤종승, 진소홍이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며 휘몰아쳐 갔다.
다른 무인들도 함성을 터뜨리며 노도처럼 밀고 나아갔다.
“우와아아악! 강시들이 떨어져 내린다!”
“살, 살려줘엇!”
졸지에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흑도인들은 비명과 절규를 터뜨리기 시작했고, 팽가와 언가 무인들은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휘둘러갔다.
견습생들 역시 쾌재를 부르며 흑도인들을 휩쓸어갔다.
“어떠냐! 이 개 같은 것들아아아!”
특히나 윤종승이 목이 쉬도록 소리치며 달려들자, 팽수혁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저놈, 강시 믿고 너무 설치는 것 아니냐?”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힌 실전을 겪고 있으니 누구라도 흥분될 테지.”
진소홍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녀의 시선이 장원 바깥으로 향했다.
‘남궁천, 너는 정말 대단해.’
* * *
남궁천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류난은 언가장에서 들려오는 함성을 들으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렇군. 언가가 결국 그걸 사용한 거군.”
“내가 열심히 부추겼거든요.”
남궁천이 어깨를 쭉 펴고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걸로 전세는 확실히 뒤집힐 것이다.
마침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것인지 언덕에 대기하고 있던 흑도인들이 류난 뒤로 우르르 몰려왔다.
류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언가 쪽을 보았다.
마침 그곳에서는 언호량이 강시 수십 구를 이끌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마침내 남궁천 뒤로 스산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강시 수십 구가 오와 열을 맞춰 척척 도열했다.
남궁천은 마치 병사를 이끈 대장군처럼 다시 한 번 어깨를 쭉 펴며 말했다.
“어때요? 한번 목숨 걸고 싸워볼까요? 아, 목숨은 그쪽만 걸어야 하나?”
“…….”
류난이 묵묵부답으로 눈만 가늘게 뜨자, 남궁천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가랏! 강시!”
뒤에 선 언호량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아니, 내 건데 왜 자기 것처럼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