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23화 (222/508)

223. 그게 뭔데?

언가 정문에서 살육의 현장이 펼쳐졌다. 혈향이 짙게 풍기고 고함과 비명이 어지럽게 뒤섞인다.

수많은 이들의 거친 욕망이 뒤섞이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누군가는 간절함으로, 누군가는 대의로, 누군가는 처절함으로 싸웠다.

먼발치 언덕에서 이를 지켜보던 류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옆에 선 수하에게 말했다.

“아름답지 않은가?”

“예……?”

수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류난이 예의 그 안온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처절함과 간절함은 한 끗 차이다. 잘 보아라. 저건 욕망의 아우성이다. 욕망의 불꽃이며, 욕망의 승화다. 저기서 살아남은 욕망은 신념으로 발전할 것이고, 도태되면 오욕으로 스러진다. 그렇게 모든 이의 욕망이 마지막까지 가장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순간이다.”

“그, 그렇군요.”

수하는 류난의 말뜻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생각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류난이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철나한은?”

“아마 지금쯤 측면부에서 준비를 끝냈을 겁니다. 언가는 곧 무너질 겁니다.”

류난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 단정할 수는 없다. 언가는 강하다. 지금의 언가는 과소평가되어 있지.”

“하면 언가가 끝까지 버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그건 중요하지 않아.”

“예?”

수하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류난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잇는다.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크게 나쁠 건 없어.”

류난의 아리송한 말에 수하는 애매한 표정만 지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다가 류난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데 저건 누구지?”

수하가 움찔거리고는 류난의 시선을 좇았다. 정문을 향해 돌격하던 흑운대 중 일부가 한 곳에 발이 묶여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여미고 자세히 살펴보니 한 명의 무인이 흑운대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설치는 게 아닌가?

그 신위가 실로 놀라울 지경이어서 수하는 입을 딱 벌리고는 류난을 돌아보았다.

류난 역시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는지 나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달빛에 비친 상대의 얼굴을 보고는 흠칫거렸다.

‘청년이라?’

투귀처럼 싸우는 상대는 이제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청년이었다.

저 나이에 저 정도의 무위를 지닌 자가 언가에 있었던가?

그게 아니면…….

’짚이는 게 있는 류난이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혹시 저 아이가 진천랑의 아들인가?’

의구심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거칠고 패도적으로 싸우는 방식이 과거 진천랑의 모습과 꼭 닮았기에.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류난이 피식 웃고는 수하에게 일렀다.

“슬슬 혈검단을 보내도록.”

“복명!”

수하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류난이 몸을 날렸다.

“나는 잠시 다녀오겠다.”

“엇! 어디로……!”

하지만 이미 류난의 신형이 저만치 날아가 점처럼 작아지고 있었다.

* * *

“아으!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팽수혁이 태도를 콱 움켜쥐고는 연신 씨근거렸다.

현재 장원 외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기합성과 비명성이 어우러지고, 짙은 피비린내가 별채까지 풍겨온다.

한데도 팽수혁은 지객당에 발이 묶여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남궁천이 따로 내린 지시 때문이다. 물론 팽수혁은 그걸 지시가 아닌 부탁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마침 유현이 부드럽게 일렀다.

“기다리는 편이 나은 거죠. 그만큼 방어를 잘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쳇, 그걸 누가 몰라? 다른 사람들은 목숨 걸고 싸우는데 난 여기서 죽치고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그렇지!”

팽수혁이 투덜거리자, 윤종승이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남궁천 말대로 지객당을 지켜야지. 안 그러면 팽 가주님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잘 들어. 나는 남궁천 말 듣고 여기 있는 게 아니야!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여기 있는 거지.”

“그래, 그래.”

윤종승이 애써 웃으며 팽수혁을 달랬다.

그랬다.

그들이 이곳에 남은 이유는 마지막 벼락치기에 열중하는 팽적호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남궁천이 팽적호에게 혼원벽력신공을 좀 더 공부하라고 일렀던 것.

“뭐든 때가 있는 법이죠. 지금 잡힐 듯 말 듯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있다면 공부하세요. 그때를 놓치면 다시 감이 멀어질 수 있으니까요.”

한참이나 어린 견습생에게 그런 소리를 듣는 게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지만, 팽적호는 순순히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서 지금 팽적호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견습생들이 이곳에 남아 지키는 중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초조한 시간을 보냈을까?

갑자기 서쪽에서 난잡한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언호량이 달려 들어왔다.

“서쪽 벽이 뚫렸어! 곧 놈들이 들이닥칠 거다!”

“이 개 같은 것들이 결국은 왔구나!”

팽수혁이 태도를 뽑아 들고는 성큼성큼 나섰다.

정문에 모든 인력이 투입되어 방어전을 펼치고 있을 때, 철나한이 이끄는 나한대가 서쪽 벽을 친 것이다.

견습생들이 저마다 긴장을 다진 채 경계 태세를 갖추는 순간,

콰아앙!

지객당 문짝이 뜯겨 날아가며 한 무리의 철갑 무인들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와라앗!”

팽수혁이 고함을 내지르며 맹수처럼 달려 나갔다.

쒸아아아앙!

태도가 파공성을 터뜨리면서 파도처럼 도기를 품고 날아갔다. 그간 쌓인 울분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듯했다.

따다다다앙!

금속성이 요란하게 터지면서 한 무리의 철갑 무인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그들은 어린 견습생들만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우습게 여기던 차였다.

한데 아직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어른 키만 한 태도를 휘두르면서 엄청난 무위를 펼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저놈부터 죽엿!”

“팽가 놈이다! 죽여라!”

철갑 무인들이 팽수혁을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하지만 다른 견습생들과 언호량이 막아섰다.

“어딜! 우리는 손발이 없는 줄 아느냐!”

언호량이 소리치며 언가권을 내질러 갔고, 진소홍은 유성추를 날렸으며, 윤종승은 혁련장을 펼쳤다.

퍽! 퍼억!

쉬이익, 차카앙!

지객당 안마당이 순식간에 난투가 벌어지면서 아수라장이 됐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유현은 차분하게 검을 휘두르며 적을 제압해 갔다.

의외로 견습생들이 선전하자 철갑 무인들은 크게 당황하며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견습생들은 더욱 기세를 끌어 올리며 철갑 무인들을 제압해 갔다.

특히 팽수혁은 온몸이 근질거리던 차였기에 물 만난 고기처럼 설쳐댔다.

“하북팽가를 우습게 보지 마라! 이 쓰레기들아!”

일갈을 터뜨린 팽수혁이 분노의 칼을 휘둘러댔다.

그는 일도를 휘두를 때마다 팽가장을 버리고 달아나던 때의 설움을 토해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어가던 가신들. 어떻게든 소가주를 지키겠다며 몸을 던져가며 탈출로를 뚫어주던 충복들.

그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칼을 휘두르니 살기가 절로 피어올랐다.

“뭔, 뭔 놈의 애새끼가 이렇게까지……!”

“방심하지 마라! 보통 녀석들이 아니……!”

퍼억!

동료에게 주의를 주던 철갑 무인 하나가 가슴에 혁련장을 얻어맞고 날아갔다.

한참이나 나뒹굴던 그가 지객당 벽에 처박히더니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렸다.

철갑 무인들이 뜻밖의 전력에 우왕좌왕하자 견습생들은 더욱 기세가 끓어올랐다.

‘뭐야? 이것들! 이제 보니 머릿수만 믿고 설치는 놈들이잖아? 이런 놈들에게 분타와 가장을 빼앗기다니! 이런 수치가 또 없다!’

팽수혁이 이를 빠득 갈고는 무아지경 속에서 태도를 휘둘렀다.

그렇게 얼마나 종횡무진 설쳤을까?

도신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감각에 취해가고 있을 때쯤 문득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는 휙 돌아섰다.

“웬 놈이……!”

매섭게 태도를 휘둘렀는데, 다음 순간 금속성이 울리면서 도신이 튕겼다.

따아아앙!

한 차례 휘청거린 팽수혁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고개를 들었다.

팽수혁도 어지간히 덩치가 큰 편이지만, 눈앞의 거구는 팽수혁보다도 훨씬 컸다.

바로 철나한이었다.

시커먼 갑주를 입은 철나한이 기광을 번뜩이며 노려보자, 팽수혁이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재차 도신을 휘둘렀다.

“뭐야? 이 덩치만 큰 새끼는!”

“어린 녀석이 겁을 상실했구나.”

묵직한 음성을 흘린 철나한이 낭아봉을 들어 가볍게 휘둘렀다.

뚜까아앙!

순간 불꽃이 터지면서 팽수혁이 대여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크윽!”

전신을 짜르르 울리는 통증에 팽수혁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견습생들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팽수혁!”

“괜찮아?”

팽수혁이 태도를 콱 틀어쥐고는 씹어뱉듯 말했다.

“전투 중에 뭘 구경하고 자빠진 거야? 너희들 싸움에나 집중해!”

자존심이 상한 그가 다시 바닥을 차며 달려갔다.

“하아아앗!”

팽수혁이 뇌성 같은 기합성을 울리며 태도를 횡으로 휩쓸어갔다. 시커먼 도기가 기다랗게 꼬리를 끌며 철혈적성도의 철혈회풍 초식이 펼쳐졌다.

“호오,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철나한이 호쾌하게 소리치더니 낭아봉을 거꾸로 쥐고 태도를 막아냈다.

쩌어어엉!

츠즈즈즈즛!

두어 장을 미끄러진 철나한이 히죽 입매를 비튼다.

“과연. 본 련의 공격을 받고도 쥐새끼처럼 달아날 만한 실력은 되는군.”

“뭐? 이…… 개 같은 멧돼지 새끼야아악!”

눈이 뒤집힌 팽수혁이 광분에 휩싸여 몸을 날렸다.

타다닷!

순간 용천혈로 공력을 발출한 팽수혁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이어서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며 태도에 무게를 잔뜩 실었다.

쑤아아아아앙!

시커먼 도기가 벽력처럼 내리친다.

언젠가 남궁천이 조언해 주었던 바로 그 철혈파벽 초식이었다.

철나한이 눈살을 여미더니 이내 오른발을 뒤로 빼며 낭아봉을 가로로 눕혀 막아냈다.

쩌어어어엉!

투두둑!

어찌나 강맹한 공격인지 안마당 바닥이 깨지면서 철나한이 발목까지 파묻혔다.

철나한은 진심으로 놀란 눈치였다.

“대단하군. 대단한 만큼…… 반드시 싹을 뽑아야겠다!”

섬뜩한 목소리를 흘려낸 그가 낭아봉을 사선으로 휘둘러왔다.

정말이지 커다란 덩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움직임.

쒸아아아앙!

“헉!”

급하게 태도를 들어 올린 팽수혁이 온몸으로 낭아봉의 충격을 받아냈다.

꽈아아앙!

“크아아악!”

마치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팽수혁이 날아갔다.

꽈다아앙!

팽수혁이 지객당 벽을 부수며 쓰러지자, 모든 생도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경직됐다.

동시에 그들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자리에 남궁천이 있었더라면……!’

어째서 남궁천이 먼저 떠오른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이상하게 남궁천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렇다고 이대로 맥없이 당할 수도 없는 노릇.

유현이 재빨리 달려 나가며 철나한에게 검격을 펼쳤다.

‘이자는 강하다! 선공을 펼치지 않으면 가망이 없겠어!’

강맹일변도인 철혈적성도와 달리 그의 검은 부드럽고 화려하며 유연했다.

휘리리리릭!

“이제 보니 무림맹에 인재가 많았군! 뽑아야 할 싹이 많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

히죽 웃은 철나한이 그대로 유현에게 마주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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