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그게 뭔데?
흑무련 흑운대주 방가혁.
그는 수하들을 이끌고 돌진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천번지복의 때가 왔다.
오랜 시간 흑도 무인들은 얼마나 억압받았던가?
그간 흑도 무인들은 백도 무인들의 기세에 억눌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무림맹은 공공연하게 무림공적이라는 명부를 만들어서 인간 사냥을 해왔다.
개중에는 억울한 죽음이 너무나 많았다.
칼로 사람 한 번 찔러본 적이 없는 자가 어느 순간 살인귀로 바뀌어 있었고, 여인의 옷깃을 스치지도 못한 자가 색마라는 별호로 내몰리기도 했다.
단지 사공을 익혔다는 이유로.
이 세상의 정의는 바로 무림맹이었다.
그들이 세운 잣대를 벗어나면 가차 없이 악의 상징으로 내몰렸다.
이보다 더한 악이 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달리 대항할 수가 없었다.
흑도인들의 성정이 그렇다.
오로지 강한 힘을 추구하기에 서로 뭉치질 않는다.
강한 자를 따르기는 하나 언제 어느 때 뒤통수를 칠지 알 수가 없다.
흑도인들 중 무고한 자들도 많지만, 정말로 심성이 악랄한 자도 많기 때문이다.
서로를 믿고 의지한다는 건 흑도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흑무곡주가 나서주었다.
그는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방가혁은 흑무곡주를 처음 만났을 때, 전율이 일어났다.
‘이자다! 이자라면 강호의 판세를 뒤집을 수 있으리라!’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충성을 맹세하고 그를 따랐다.
류난이 죽으라면 죽을 것이고, 살라면 살 것이었다.
그렇게 세력을 키워왔고, 마침내 봉기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실패는 없었다.
아, 마단곡 영단.
그건 실패라고 할 것도 아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거사를 일으키는 데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 외에는 모두 성공했다.
하북 분타를 쳐서 일시에 무너뜨렸고, 팽가장을 빼앗아 장악했으며, 악가 무인들을 섬멸했다.
그리고 흑무곡은 흑무련으로 다시 태어나 지금도 많은 흑도 무인들을 흡수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언가를 무너뜨릴 차례다!’
보라.
화살을 시위에 걸고 놓지도 못하는 저 겁쟁이들을!
언가를 향해 휘몰아치는 이 죽음의 물결을 감당하기도 힘든 것이리라.
대낮처럼 불을 밝힌 언가장.
그리고 망루에 서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언가주.
“훗! 가소롭군. 저리 쫄아서 활도 못 쏠 줄이야. 이거 정말 실망…… 응?”
그런데 지금 어딜 보는 거야?
언가주의 시선이 조금 다른 곳을 향하지 않았나? 넋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는 곳은 분명 나한대와 흑운대보다 한참 앞쪽이었다.
방가혁이 무심히 언가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거렸다.
“뭐, 뭐야? 저건?”
웬 미친놈 하나가 헤벌쭉 웃으면서 달려오는 게 아닌가? 아니, 날아오는 건가?
‘뭐, 뭐가 저리 빨……!’
생각을 하는 사이, 상대가 벌써 흑의인들 사이로 몸을 던졌다.
“엇!”
촤촤촤아악!
“으아아악!”
“크아악!”
순간 방가혁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흑운대 복판으로 뛰어든 어린 녀석이 살귀처럼 검을 휘둘러대며 종횡무진 설치는 게 아닌가?
살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찢어발긴다.
“크아아악!”
“뭐, 뭐야! 저놈을 막…… 커억!”
흑의인들이 마구 쓰러져 간다.
검은 물결 복판에서 검무를 추는 남궁천은 혈향을 맡으면서 전율했다.
‘아아! 이 얼마 만의 살풀이냐!’
고향에 온 느낌이랄까?
사선을 넘나들며 싸우면서 오히려 평온함을 느끼다니.
‘내가 점점 변태가 되어가는 건가?’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이 순간에 충실하고 싶다.
모처럼 찾아온 살풀이 기회를 생각만 하다가 날리고 싶지 않다.
그렇다.
검을 휘두를 때는 무상무념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분도 풀리고, 운수도 풀리고, 탈출도 가능…… 아, 지금은 도망자가 아니지.
어쨌거나 즐겨야 한다!
촤아아악!
남궁천이 돌아서며 일검을 후려치자, 등 뒤를 노리고 달려들던 흑의인 하나가 단말마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우으으……!”
“뭔 괴물 같은 놈이……!”
“저놈 도대체 뭐지? 어째서 혼자……?”
정말이 삼국시대의 여포가 환생한 것만 같지 않은가?
도대체 몇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가?
남궁천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우두둑 꺾었다.
“왜들 그래? 주춤거리면 안 되지. 불나방이 망설이는 것 봤어? 자자, 본능에 충실하자고. 너희들은 불나방이다. 어서 덤벼라.”
주춤주춤.
남궁천을 둘러싼 흑의인들이 움찔거리며 물러난다.
그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무언의 대화를 이어간다.
‘뭐지? 미친놈인가?’
‘저놈도 언가 무인인가? 아니면 팽가?’
‘저렇게 무식하게 싸우는 걸로 보면 팽가 같기도 하고.’
남궁천이 순간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안 덤벼? 빨리 오라고!”
“이익! 어디서 허세를 부리느냐!”
결국 흑의인 중 하나가 쌍도를 휘두르며 매섭게 달려들었다.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며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 바로 그런 정신이지!”
휘리리릭!
촤아악!
순간 허공에서 팽이처럼 몸을 회전한 남궁천이 바닥에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검을 후렸다.
쩌어어억! 쿠궁!
놀랍게도 호기롭게 달려들던 흑의인은 상반신이 반으로 쪼개지며 쓰러지고 말았다.
“헉!”
“우욱!”
몇몇 무인들이 헛구역질까지 했다. 그들 모두 흑도 무인으로 어지간히 잔인한 싸움도 겪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저렇게 산 채로 양분되는 걸 보는 경험은 흔치 않은 법이다.
한데 저 미친놈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사람을 일검양단 했을 테지.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웃을 것까진 없잖아?
광기가 서린 웃음.
“으흐흐흐! 좋아, 좋아! 자, 덤비라고! 어서어어엇!”
“우으으으!”
다시 한번 흑의인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난다. 미친 살인귀가 눈을 번뜩이며 괴소를 짓고 있으니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는다.
남궁천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뭐 해? 아름답게 달려들란 말이다.”
남궁천은 정말 간절했다.
버릇이라는 게 참 무섭다.
평생을 전장에서 구른 군졸들은 평화를 참지 못하는 법이다.
오히려 평화로운 집안에서 잠을 잘 때 원귀들에게 시달리는 악몽을 꾸거나, 조그마한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곤 한다.
그런 자들이 결국 다시 찾는 곳이 바로 전장이다.
생사를 오가는 전선에서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는 거다.
지금 남궁천이 딱 그랬다.
하나의 목숨을 끊을 때마다 묘한 희열에 전율하게 된다.
끊을 수 없는 쾌감이랄까?
남궁천이 그렇게 피에 굶주려 있을 때, 흑의인들 사이로 방가혁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이 멍청이들! 한 놈을 잡지 못해서 이러고 있어? 어서 쳐라!”
말을 뱉은 방가혁이 솔선수범 앞으로 나섰다.
타닷!
그가 밤바람처럼 은밀하고도 빠르게 남궁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쒸이이이잇!
그의 애병인 언월도가 밤공기를 찢으며 떨어졌다.
따아아앙!
촤르르르르륵!
도기를 그대로 받아낸 남궁천이 뒤로 한참이나 미끄러졌다.
“오오, 과연! 네놈은 누구냐?”
어쩐지 남궁천의 목소리도 묘하게 바뀌었다.
조금 더 탁한 느낌이랄까?
지금 남궁천은 전생의 진천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흑운대주 방가혁이다. 너는?”
“나도 모르느냐? 나는 천하대…….”
무심코 말하려던 남궁천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쳇, 너무 분위기에 취했네.’
하마터면 ‘천하대살성 진천랑’이라고 말할 뻔했다.
물론 자신은 천하대살성이 아니지만 전생의 말미에는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스스로를 소개하고 다니기도 했으니까.
남궁천이 입매를 치켜올리고는 말했다.
“천하 대 남궁세가 소가주 남궁천이다!”
“남궁천? 네놈이……?”
“그렇다.”
방가혁이 눈살을 가만히 찌푸렸다.
류난이 생포하라던 그 아이가 아닌가? 대살성 진천랑의 아들!
류난이 경계를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네 아버지는 우리와 같은 흑도였는데, 너는 어찌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위해 싸우느냐?”
“아버지는 흑도였던 적도 없고, 백도였던 적도 없어.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일 뿐이야. 아버지를 멋대로 규정하지 마. 아버지를 규정하는 건 아버지다.”
“뭐라는 거야? 이놈이.”
“못 알아듣겠으면 꺼지시고!”
파밧!
남궁천이 빛살처럼 몸을 날렸다.
“흡!”
순간 방가혁이 눈을 부릅뜨고는 언월도를 앞세웠다.
정말이지 가공할 정도로 빠른 속도가 아닌가?
슈욱, 꽈아아아앙!
촤르르르륵!
간신히 검격을 막아냈더니 전신이 찢어져 나갈 듯 고통스럽다.
“저, 저놈이! 다들 쳐라앗!”
“우와아앗!”
방가혁의 등장은 주춤거리던 무인들에게 나름의 사기를 불어넣었다.
그들은 다시 불나방이 되어 남궁천을 향해 몸을 던져갔다.
남궁천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야지! 그래야 불나방이지! 안 그러냐? 이 아름답고 멍청한 것들아!”
촤촤촤촤아악!
모처럼 묘한 향수에 젖은 남궁천이 다시 광기에 휩싸여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 * *
“저, 저게 뭐야?”
언양걸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망루에 선 모든 무인들이 입을 딱 벌린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방어전을 펼치라고 했더니 왜 갑자기 적진으로 뛰어들어 저 난리를…….
아니, 뭐 그래도 좋은 건가?
정말이지 남궁천은 투귀처럼 싸우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당백의 기세가 아닌가?
남궁천 때문에 전력으로 달려오던 흑의인들이 주춤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 흑의인들 숫자는 많다.
남궁천이 설치는 곳의 수십 명은 발이 묶였지만, 다른 쪽 무인들은 그대로 지나치며 언가장을 향해 돌격해 오고 있었다.
제아무리 암벽 아래에 성처럼 지어진 언가장이라지만, 담벼락이 정말로 성벽처럼 높진 않았다.
누구라도 무공을 익힌 자라면 단숨에 뛰어오를 수 있는 거리였다.
“가, 가주님! 적이 코앞입니다!”
마침 옆에서 소리친 수하의 목소리에 언양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아뿔싸! 남궁천의 신위에 잠시 넋을 놓았구나!’
언양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언가를 지키기 위해 남궁천이 저리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싸우다니! 정말이지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남궁천! 본 가를 위해 그렇게까지……! 천하가 네게 등을 돌려도 본 가만큼은 반드시 너의 손을 잡겠다!’
뭔가 단단히 오해한 언양걸이 마음을 굳히고는 입을 열었다.
“보아라, 강호신룡이 저렇듯 본 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고 있다! 이제는 본 가의 결의를 보여줄 차례다!”
“옛, 가주님!”
언가 무인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마침내 코앞까지 당도한 적을 보며 언양걸이 날카롭게 명을 내렸다.
“쏴랏!”
패패패패애앵!
쒜쒜쒜에에엑!
새카만 화살이 밤하늘을 빼곡하게 채웠다.
몇몇 흑도인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고, 어떤 이들은 피하거나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며 그대로 몸을 날려왔다.
개중에서도 민첩한 무인들이 담벼락 위로 오르자, 언양걸이 언가권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어딜!”
꽈아앙!
강령신공에 기반한 언가권이 작렬하자, 흑의인이 포탄처럼 튕기며 날아갔다.
“강호신룡의 정신을 이어라!”
“강호신룡이 본 가를 위해 싸운다! 우리도 목숨 걸고 싸우자!”
“우와아아아!”
순간 함성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어지럽게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 * *
“끄어억……!”
방가혁은 두 눈을 찢을 듯 부릅뜨고는 입을 쩍 벌렸다. 벌어진 입에서 진득한 핏물이 뚝뚝 떨어진다.
촤아아악!
남궁천이 검을 뽑아내자, 방가혁이 맥없이 쓰러졌다.
단 일격.
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완전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궁천이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내고는 담벼락 쪽을 보았다. 유달리 언가 무인들의 기세가 드높아 보였다.
“왜들 저렇게 흥분한 거야? 쟤들도 나랑 같은 기질인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남궁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