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협력은 개뿔
하북 분타 자리를 보장하겠다는 남궁천의 의도가 여기에 있었던 건가?
언양걸이 남궁천을 보며 입을 벌렸다.
‘그럼 저 녀석, 처음부터 팽 가주와 비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하긴.
원수의 가문이니 그 정도는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비무에서 이길 수 있긴 한 건가? 비무에서 지게 되면 언가는 분타주는커녕 강호신룡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비난의 화살을 받진 않을까?
아니, 그 전에 흑도 세력의 공격을 막아내지도 못할 터.
생각이 거듭될수록 언양걸의 표정이 해쓱해져 간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군.’
언양걸이 혼란한 마음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팽적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분타주를 임명하는 권한은 맹에 있는데 그걸 왜 나에게?”
“에이, 다 아는 사이에 그러지 마시고요. 하북에서는 하북팽가가 그래도 실권을 잡고 있잖아요. 이번에 또 한 번 휘청거리긴 했지만, 여전히 방계 쪽까지 동원한다면 분타주 자리를 쉽게 빼앗기지 않겠죠.”
사실이었다.
이게 바로 세상이 등을 돌린 가문과 홀로 약해져서 기울어 버린 가문의 차이다.
남궁세가는 세상이 등을 돌리면서 철저하게 고립되어 급격히 쇠락했지만, 팽가의 경우는 다르다.
강호칠대세가에서는 제외되었을지언정 하북에서만큼은 아직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다.
물론 흑도세력을 무사히 몰아냈을 때의 얘기겠지만.
“네가 왜 그런 걸 신경 쓰는 거지?”
“약속했거든요. 언 가주님하고.”
남궁천이 언양걸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한다.
‘이 상황에 찡긋하지 마! 미친놈아!’
팽적호의 시선이 언양걸에게 힐끔 향한다.
언양걸이 애매한 표정으로 웃어넘기려고 하자, 팽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런 연유로 팽가를 도왔구려.”
“허허, 딱히 그런 이유보단…….”
언양걸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걸 느꼈다.
이제는 자신이 남궁천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 왜 좋은 분위기 다 깨냐고!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화합과 평화는 개뿔!
이 애매한 분위기 어쩔 거냐고!
팽적호가 곧 냉소를 지었다.
“뭐, 그 정도가 아니면 언가가 쉬이 움직이진 않았을 터. 하나 그걸 왜 자네가 마음대로 약속하지?”
“말씀하신 대로 언가를 움직이려면 그 정도 대가는 있어야 하니까요. 팽가로서는 멸문지화를 피한 대가치고 그리 나쁜 것도 아니잖아요?”
“만약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한다면?”
“왜요? 질 것 같으세요? 나한테?”
남궁천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묘한 눈길로 쳐다본다.
명백한 도발이다.
팽적호가 이마를 꿈틀거리자,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곤 말을 이었다.
“뭐 쫄았으면 저도 설득하기 힘들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건이 있든 말든 상관없잖아요?”
구오오오오.
팽적호의 전신에서 살벌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물론 살기까지 섞여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허공으로 솟자 지켜보는 이들마저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언양걸이 손에 땀을 쥐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옆에 선 팽수혁이 가만히 입매를 비틀었다.
‘하여튼 저 새끼는 입이 제일 문제라니까.’
기껏 아버지가 남궁천에게 호감을 느꼈는데, 이젠 다시 모종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남궁천을 상대하다 보면 자연히 거쳐야 할 관문 같은 것이랄까?
팽적호가 입매를 비틀더니 대도를 척 내밀었다.
“좋다, 그 조건. 받아들이지. 단, 이 비무에서 네가 죽더라도 그 어떠한 원망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내 조건이다.”
“받아들이죠.”
언양걸은 이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됐다.
그는 이제 거무죽죽하게 물든 표정으로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다 끝났구나. 이렇게 된 이상 남궁천이 이기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가?’
옆을 슬쩍 돌아보니 팽수혁은 어딘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남궁천을 본다.
다른 생도들은?
그들 역시 긴장한 낯빛이긴 하지만 어딘지 신뢰를 담은 눈이다.
‘도대체 이 녀석들은 어찌 된 게…….’
세상을 몰라서일까?
아니면 정말 강호신룡에게 자신도 놀랄 만한 한 수가 있는 것일까?
물론 강호신룡이 강령신공을 깨우쳐줬을 때를 떠올린다면 무한한 신뢰가 샘솟긴 한다.
하나 내공심법을 깨우쳐주는 것과 실제로 비무를 치르는 건 천양지차가 아닌가?
그것도 실전에서 구르고 구른 하북팽가주를 상대로!
그럼에도 저렇게 믿는 표정이라면…….
‘그래, 믿는 것 말고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뭔가?’
엎질러진 물이다.
비무는 시작됐다.
이렇게 된 이상 믿어볼 수밖에!
‘제발 부탁한다, 강호신룡!’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입술을 콱 깨무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진소홍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너무 걱정 마세요. 남궁천을 믿고 투자하신 만큼 소득이 분명 있을 테니까요.”
금왕의 딸.
분명 상재(商才)가 있는 아이렷다.
그래, 이 아이들의 안목이라도 믿어보자.
지금은 그의 마음을 지탱해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우우우웅!
마침내 팽적호를 중심으로 기파가 사방으로 훅 불어 나갔다.
그 후끈한 열기에 모여든 사람들이 긴장을 다지며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스슥!
팽적호가 천천히 왼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기수식을 취했다.
원수의 아들.
무공에 전심전력을 쏟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그렇게 떠올린다.
팍!
미간이 구겨지는 것과 동시에 팽적호가 바닥을 차며 쏘아지듯 달려갔다.
배분 차이도 있는 만큼 선공을 양보할 수도 있지만, 지금 팽적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실전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여어어업!”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대도가 허공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철혈적성도의 철혈섬패 초식이었다.
쉬이잇, 꽈앙!
남궁천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대도가 그대로 바닥을 내려찍으면서 파편이 튀어 올랐다. 동시에 팽적호가 흠칫 눈을 치떴다.
‘피해? 어디 이번에도!’
그가 남궁천을 향해 두 번째 초식을 연환식으로 펼쳤다.
쒸아아아앙!
묵직한 도기가 횡으로 길게 이어지면서 붉은 꼬리를 이어간다.
철혈적성도의 혈성미원(血星尾圓)이라는 초식이다.
팽적호가 휘두르는 도는 시종 묵직한 기운을 머금지만 결코 둔한 느낌이 없다. 오히려 연검을 든 무인처럼 가볍게 움직인다.
따앙!
이번만큼은 남궁천도 피하지 못하고 벽라검을 들어 막았다.
촤르르륵!
그가 뒤로 미끄러지는 순간, 팽적호의 안광이 매섭게 빛나면서 다음 초식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숨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받아랏!”
파바밧!
순간 팽적호의 신형이 선 자세 그대로 귀신처럼 이동하는 듯하다.
순식간에 앞에 다다른 팽적호가 대도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듯 그어 내렸다.
쒸이이이잇!
“으악!”
“위험!”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윤종승과 유현도 흠칫거렸고, 시종 담담하게 지켜보던 진소홍도 두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팽적호가 휘두른 것은 철혈적성도법 중 유성탐화(流星探花)라는 초식이었다.
허공을 가르며 유성처럼 떨어지는 대도가 반드시 심장을 가르고 혈화를 찾게 된다는 강맹한 초식이다.
마침내 대도는 남궁천을 가르고 바닥에 처박혔다.
슈꽈아앙!
대도가 한 뼘 정도나 바닥에 박히면서 땅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떨렸다. 동시에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어어…….”
사람들이 침음을 흘리면서 흙먼지를 바라보았다. 언양걸도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끝, 끝장이구나.’
몇몇 이들은 이토록 빨리 결판이 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고, 몇몇 이들은 예상했다는 듯 혀를 찼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될 수밖에.’
‘그래도 하북팽가주인데 강호신룡이 너무 안일했어.’
언양걸이 기겁을 해서 달려 나가려고 할 때였다. 팽수혁이 얼른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것 놔라!”
“아직입니다.”
“무슨 소리냐? 지금 팽 가주의 일격에 강호신룡이……!”
“지켜보세요.”
팽수혁이 눈에 힘을 주며 말하자, 언양걸이 다시 고개를 돌려 팽적호를 보았다.
팽적호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제법…… 한 수가 있다는 것이냐?”
팽적호의 입에서 씹어 뱉듯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시야가 확보되자 사람들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앗! 남궁천이 멀쩡하잖아?”
“피, 피했어? 분명 몸을 가르지 않았나?”
사람들이 내뱉는 말은 언양걸이 생각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나 그는 자신이 흥분한 상태여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빨라서 잔상이 남은 것이었구나.’
그런데 팽수혁이 그걸 알고 있었다는 게 놀랍다. 그가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고 있자, 팽수혁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원래 믿는 만큼 보이는 것도 많아지더라고요. 저 녀석도 같은 경우일 거고요.”
팽수혁이 한옆에 서서 지켜보는 유현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확실히 유현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 옆에 선 윤종승은 눈물을 찔끔거리는데도.
언양걸의 표정이 굳었다.
‘이 아이들은 확실히 다르다. 특히 유현과 팽수혁은 다른 경지에 있구나.’
믿는 만큼 보인다고?
그 말도 일리는 있다.
그만큼 심중이 차분할 테니 자신처럼 허둥대지 않을 테니까.
하나, 거기에는 반드시 실력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아들은 과연 이 정도의 실력이 될까?
마침 저만치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보는 언호량이 보인다. 눈을 부릅뜨고 꽤 놀란 표정이다.
언양걸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 녀석을 용천관으로 보낼 걸 그랬어.’
한편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남궁천이 숨을 훅 내쉬었다. 그러자 그의 앞섶이 길게 잘려 나가더니 상의가 풀럭 풀어졌다.
단단한 상체가 훤히 드러나자 사람들이 나직한 탄성을 내질렀다.
“말도 안 돼. 그걸 간발의 차로 피하다니.”
“운이 좋아도 너무 좋군.”
하나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남궁천이 대도를 피한 것이 절대 운이 아님을.
그러다 보니 이어지는 남궁천의 도발성 발언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언제쯤 제대로 하실 거예요? 이런 식이면 그만두고요.”
“……!”
심지어 벽라검을 검집에 갈무리하는 게 아닌가?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게 무슨 말이야?”
“팽 가주가 손속에 사정을 두기라도 했단 거야?”
“설마, 그럴 리가. 저런 박력이 전력이 아니면 뭐라는 거야?”
이 순간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팽적호였다.
‘저놈이……!’
확실히 보통이 아니다.
남궁천의 말대로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손속에 사정을 둔 건 아니다.
충분하리라 여긴 것이다.
굳이 온 힘을 다하지 않아도.
그런데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확실히……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더 이상 시험해 본다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이제는 정말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싸워야 한다. 팽가의 무공은 실전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에!
‘다행이군. 그 정도의 가치는 있는 녀석이라서.’
팽적호가 대도를 움켜쥐고는 입매를 비틀었다.
“좋다, 지금부터는 전심전력을 다해주마.”
후우우우우웅!
다시 한번 기파가 사방으로 불어나간다.
“훅!”
“윽!”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이 저마다 얼굴을 가리며 몸을 돌렸다.
살갗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강한 기운이 온몸을 덮쳐오는 듯하다.
팽적호의 장삼도 극심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펑!’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곧이어 팽적호의 몸이 탄탄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팽가의 최고 절기라고 할 수 있는 내공심법.
혼원벽력신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