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협력은 개뿔
휘이이잉.
언가장 연무장에 한 줄기 바람이 지나쳤다.
아직은 더운 날씨임에도 연무장을 에워싼 사람들은 어딘지 스산한 기분이 들어 팔뚝을 쓰다듬었다.
사람들 틈에 섞인 윤종승 역시 왠지 오싹한 기분에 제 팔뚝을 쓰다듬으며 부르르 떨었다.
아마도 연무장 복판에서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이 뿜어내는 살벌한 기운 때문이리라.
특히 거대한 도를 손에 쥐고 장승처럼 우뚝 선 팽적호.
그의 두 눈은 절제된 분노를 담고 있었고, 경직된 표정과 꽉 다문 입술은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마치 장원 바로 뒤에 버티고 선 암벽의 일부가 된 것처럼, 그는 경직된 자세였다.
그리고 그를 마주 보고 선 남궁천은 짝다리를 짚고 서서 하품을 하며 눈물을 찔끔거리고…….
‘전혀 긴장감이 없잖아!’
윤종승이 경악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지금 팽적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벌한 기운을 느끼지도 못하는 걸까?
거기에 툭 튀어나온 목소리는 불량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요? 지금 이 시국에 싸우자고요?”
그야말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것이리라.
꿈틀!
팽적호의 뺨이 한 차례 흔들린다.
그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는 찰나, 남궁천이 다시 기름을 붓는다.
“이야, 세상 참 야박하네. 아니, 몰인정?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아, 배은망덕! 참 배은망덕하네.”
“뭐라?”
팽적호의 미간에 세로로 주름이 팍 새겨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이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며 푸념하듯 말한다.
“그렇잖아요. 기껏 앙숙으로 지내던 가문을 설득해서 목숨을 구해주었더니 이젠 칼을 들이밀고 있으니까요.”
순간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이 술렁거린다. 남궁천의 말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분위기다.
뺨을 씰룩이던 팽적호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래, 본 가가 자네에게 은혜를 입은 건 인정하지. 그 부분은 본 가를 대표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데 싸우자고요?”
“그 전에!”
팽적호의 목소리가 급격히 커지자, 주변의 기왓장이 다르르 떨리는 소리를 낸다.
몇몇 사람들은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너는 본 가의 원수 집안이다. 그날 그 위기를 겪은 것 또한 대살성에게 입은 피해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거야 모를 일이죠.”
“뭣이?”
“흑도세력이 작정을 하고 쳤으니, 하북팽가가 아무리 대단해도 홀로 막기는 어려웠을 거란 말이죠.”
“자네가 감히 본 가의 옛 명성을 들먹인단 말인가?”
“안 될 것 있나요?”
“자네 아비가 아니었다면, 본 가는 결코……!”
말을 꺼내던 팽적호가 입을 꽉 다문 채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이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구질구질하게 느껴진 탓이다.
결국 팽적호가 희미한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네놈은 그 비극 앞에서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구나.”
“굳이 느낀다면 원수에 대한 악감정은 있죠.”
“뭐라?”
순간 남궁천의 표정이 전에 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가 팽적호를 빤히 보며 물었다.
“아버지가 먼저 팽가를 찾아가서 가주님을 죽이신 건가요?”
“……!”
“그러니까 아버지가 가만히 있는 팽가를 먼저 찾아가서 죽이신 거냐고 묻는 겁니다.”
“전대 가주님은 그저 강호 정의를 위해 대살성을 처단하여 평화를 지키고자…….”
“빙빙 두르지 마시고. 쉽게 말해서 먼저 아버지를 찾아간 것 아닙니까?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대화가 묘하게 흐르자 팽적호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강호 정의를 위해서였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쪽 정의를 위해서 아버지가 얌전히 죽어줬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게 진짜 정의는 확실하고요? 정말로 대살성이 무고한 사람 죽이는 것 본 적은 있고요?”
“내가 본 적은 없다. 하나 세상이 이미…….”
“세상이!”
순간 남궁천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이번만큼은 남궁천도 모종의 분노가 은근히 배어 나온 것이다.
그 순간 주변의 기왓장이 또 한 번 다르르 떠는 소리를 내지른다.
장내가 놀라움과 침묵으로 휩싸여 있을 때, 남궁천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세상이 팽가더러 죽으라면 죽을 겁니까?”
“…….”
팽적호가 침묵하고 다른 이들도 입을 다물었다. 묘하게 마음을 울리는 말이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면서도 세상이 이율배반적인 정의를 내리면 그에 반하는 심리.
모두가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남궁천…….’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던 팽수혁은 괜히 마음이 숙연해졌다.
한 번 만나지도 못한 아비가 대살성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멸시와 무시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남궁천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자신 역시 작년까지는 그 세상의 시선과 별로 다를 바 없이 남궁천을 대하지 않았던가?
‘아버지, 저게 남궁천입니다. 궁금하다고 하셨지요? 저 녀석은 저렇게 자신만의 정의로 세상과 맞서는 놈이더라고요.’
팽수혁이 아버지의 등을 가만히 보았다.
문득 툴툴 웃는 소리가 들렸다.
팽적호였다.
“그렇군. 자네 입장에서는 본 가가 원수로군.”
“뭐, 전대 팽 가주가 아버지의 손에 죽은 후 더욱 무림공적으로 쫓겨 다니셨으니까요.”
“어찌 됐든 우리는 악연이로군.”
“반갑다고 웃고 떠들 사이는 아니죠.”
그렇다.
각자의 아버지가 상대로 인해 결국 목숨을 잃었다.
결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웃고 떠들 수 없는 관계.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정리해야만 한다.
이 껄끄러운 관계를.
그건 남궁천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남궁천은 팽적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단지 원수 가문에 대한 복수심인지.
아니면 관계를 재정립할 의도가 있는 것인지.
팽가는 예로부터 직설적이고 패도적이지만, 협의를 지키는 마음과 의리만은 투철한 가문이었다.
적이 되면 까다롭되 아군이 되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곳.
팽적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대부터 악연의 고리를 이젠 끊을 때도 되었겠지. 하나 자네도 알다시피 말 한마디로 풀기는 어려운 관계일세. 배분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부모와 관련된 일에 그런 걸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어떤가? 무인답게 비무로 풀어보는 것이.”
“그렇다면 좋아요. 받아들이죠.”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찌 보면 거만이 하늘을 찌르는 태도다.
하나 팽적호는 그런 남궁천을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
배분 차이를 뛰어넘는 저 자신감과 당돌함에 그저 어이없는 감탄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배짱인지 자만인지…… 거참.’
그때였다.
“팽 가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헐레벌떡 달려온 언양걸이 팽적호 앞을 가로막으며 섰다.
팽적호가 언양걸에게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는 말했다.
“언 가주께 미리 양해를 구하겠소. 이건 본 가와 강호신룡 사이의 문제요.”
“아니, 왜 하필 이 중요한 시국에…….”
“중요한 시국인 만큼 더욱 빨리 정리할 필요가 있소.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뒤숭숭해서 흑도와의 싸움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것 같소.”
“허어! 팽 가주, 그러지 마시고…….”
“부탁드리겠소. 이번만은 참견하지 마시오.”
팽적호가 짐짓 강한 어조로 말하자, 언양걸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팽적호의 표정에서 말려도 소용없다는 의지가 읽힌 탓이다.
그때 남궁천이 늘어지도록 기지개를 켜더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으읏차! 어쨌든 한 번 싸우셔야 속이 풀리신다는 거잖아요. 뭐, 이해해요.”
팽적호가 돌아보고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팽적호는 지금 당장 남궁천을 때려죽일 생각은 없었다.
대화를 섞으면 섞을수록 남궁천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아버지, 남궁천과 있으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아들 팽수혁이 이런 말을 했을 때,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흘려들었다.
한데 지금 보니 대충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다.
‘나이도 어린데 과연 강호신룡이라 불릴 만하군.’
단지 무공뿐만이 아니라, 생각의 깊이와 상대의 감정을 끌어내는 방식이 노련하달까?
그래서 더욱 알고 싶어진다.
남궁천이 얼마나 강한지.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자식은 어떤 녀석인지.
도대체 어쩌다가 저 녀석에 대한 아들의 평가가 백팔십도로 바뀌게 된 건지!
“그럼 시작할까?”
팽적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묻자, 남궁천이 씨익 웃는다.
“저는 언제든 준비됐어요. 아까부터 시작하지 않고 계속 떠들기만 한 건 팽 대협이시죠.”
상황을 지켜보던 언양걸은 가슴이 바짝 조여왔다.
‘아니, 왜 굳이 말을 저렇게 도발적으로! 이거 참 야단났구나! 자칫하다간 강호신룡이 우리 집에서 죽게 생겼어!’
제아무리 강호신룡이라도 한 가문의 수장을 상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하북팽가를 상대로!
특히 하북팽가는 실전형 무예를 익힌 집안으로, 싸움이 거칠어지면 점점 더 강하게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지 않던가?
자칫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지나치게 몰아붙였다간 강호신룡이 죽는다는 건 망상에 그칠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보다 못한 언양걸이 팽수혁을 발견하고는 얼른 말을 걸었다.
“자네가 어찌 좀 말려보게!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네!”
“저 두 사람을요? 제가요?”
팽수혁이 오히려 눈살을 잔뜩 구기며 묻는다.
그 표정만 봤을 뿐인데도 언양걸은 ‘아, 무리한 부탁이지’ 하고 인정할 뻔했다.
“그럼 저렇게 내버려 둘 참인가? 저러다가 강호신룡이 죽기라도 하면…….”
“그럼 강호신룡도 거기까지인 거죠.”
“뭐, 뭣?”
아니, 약관도 채우지 않은 애가 뭐 이렇게 냉정해?
팽수혁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죽을 녀석이 아니에요. 강호신룡은 그렇게 죽을 수 있을지라도 남궁천은 안 죽어요. 저 녀석이 여기서 아버지 칼에 맞아 죽는 것? 솔직히 저는 상상이 안 갑니다.”
“허어.”
언양걸이 입을 딱 벌리고 팽수혁을 보았다.
도대체 저 강인한 믿음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너무나 태연한 표정으로 저렇게 말하고 있으니 정말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꺼낸 것 같지 않은가?
‘강호신룡은 죽을 수 있어도 남궁천은 그러지 않을 거라니.’
한마디로 그 별호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뜻이 아닌가?
세상의 시선과 완전히 반대로 생각하지 않나?
아니, 남궁천하고 어울리는 놈들은 다들 이렇게 별종인가?
“아무리 그래도 시국이 좋지 않네. 어서 자네가 좀 말려서…….”
“지켜보시죠, 어르신.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땅이 굳기도 전에 풍비박산 날까 봐 그러지!”
“하하하! 저는 저 두 사람을 믿습니다. 아버지도, 남궁천도.”
팽수혁이 시원하게 웃으며 대꾸한다.
언양걸이 혀를 내둘렀다.
‘미쳤군. 다들 미쳤어.’
만약 저 둘이 싸우다가 사고라도 나는 날에는 흑도 세력을 막기는커녕 내부 분열로 사달이 일어날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이랴?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겠지.
집주인이 싸움을 말리지도 않고 부추겼다고.
‘왜 하필 우리 집에서냐고!’
게다가 자신을 설득해서 팽가를 구해달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는 팽 가주와 싸우겠다는 남궁천도 이해가 안 된다.
그때 남궁천이 손을 척 내밀더니 말한다.
“그 전에 잠깐.”
“무엇인가?”
팽적호의 물음에 남궁천이 언양걸을 보며 싱긋 웃는다.
웃어? 날 보고 왜?
“조건을 하나 걸죠.”
“조건이라?”
팽적호의 물음에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말한다.
“제가 이기면 하북 분타 자리를 언가장에 양보하시죠.”
“하북 분타를?”
팽적호가 이맛살을 슬쩍 구기더니 무심코 언양걸을 돌아보았다.
언양걸도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지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됐다.
‘하북 분타라니…… 남궁천, 저 녀석 생각보다 좋은 놈이구나……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