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14화 (213/508)

214. 협력은 개뿔

묵천악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당장 뭐라도 때려 부수고 싶은 심정이 치밀어 오른다.

일이 한 번씩 틀어질 때마다 남궁천이다.

남궁천! 남궁천! 남궁천!

제 아비가 살아 있을 때도 그리 속을 썩이더니, 이번엔 그 자식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지 않나?

차라리 진천랑은 그나마 맹의 결속을 위해 써먹기라도 했지!

이건 강호신룡이라는 별호를 얻어서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으니 그야말로 처치 곤란이 아닌가?

한데 이번엔 마단곡의 영단까지 가져가?

‘이 빌어먹을 녀석이……!’

까드득.

어금니를 간 묵천악이 창밖의 어둠 속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이번에 도절귀를 심문해서 마단곡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고자 한 건 마교 잔당들과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기관 지도와 무림맹이 입수한 마단곡 지도를 가지고 서로 실리를 취하기로 합의했기 때문.

백도에서 만든 영단은 모두 무림맹이 취하고, 나머지는 마교가 취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절귀를 호송한 것인데…….

‘그걸 날름 처먹어?’

묵천악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백묘를 돌아보았다.

“확실한가?”

“본 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십중팔구예요.”

“하면 나머지 한둘의 가능성은?”

백묘가 정말 모르겠느냐는 표정으로 묵천악을 넌지시 본다.

그 속뜻을 읽은 묵천악이 미간을 팍 구겼다.

“본 맹을 의심한다는 것인가!”

“사실은 그랬어요. 맹주께서 장난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내부에서 나왔죠.”

“어찌 그런!”

“일부러 남궁가를 멸시하면서 뒤로는 그 분위기를 이용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말이 되는 소릴 하게.”

묵천악이 나직하지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백묘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이라면 충분히 말이 될 수도 있겠지. 심중에 구렁이 백만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을 테니.

속내를 삼킨 백묘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닌 것 같군요.”

“일전에 말한 대로 도절귀는 주화입마에 걸려서 제정신이 아닐세. 지금도 심문하지 못할 지경이야. 한데…… 자네 말을 조합해보니 대략의 사정이 짐작되긴 하는군.”

“그날 도절귀를 제일 처음 발견한 게 바로 남궁천이었다고 했죠?”

“그랬지.”

그 당시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낱 생도가 도절귀를 주화입마에 빠트렸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아마 흑도인들이 정보를 알아낸 다음에 도절귀를 바보로 만들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마단곡 영단이 남궁가로 갔다면…….

‘제길!’

묵천악이 입을 꾹 다물고는 집무 책상으로 걸어와 앉았다.

백묘가 창틀에서 일어나 걸어왔다.

“정말 남궁가와 어떠한 얘기도 없었다면…….”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묵천악이 미간을 슬쩍 좁히고 고개를 들었다.

백묘가 희미하게 웃었다.

“본 교가 남궁가를 쳐도 묵과하실 수 있나요?”

“남궁가를?”

묵천악이 눈자위를 살짝 떨었다.

묘한 기류가 실내에 흐른다.

아무리 남궁가가 무림맹과 서먹한 사이라지만, 그래도 무림맹에 속한 가문이다.

비록 지금은 몰락했다지만 한때는 제왕의 가문이라 불리던 곳이었고, 현재는 강호신룡이 속한 가문이다.

그런데 마교가 남궁가를 친다면 세간이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되리라.

“마단곡 영단만 빼올 수는 없을 텐데.”

“저항이 있을 테지요. 하나 맹주께서 묵과하신다면 큰 어려움은 없을 테지요.”

“남궁 가주가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닐세. 한때 적랑단주였던 자야.”

“해서 본 교에서도 혈영신마(血影神魔)가 나설 겁니다.”

“혈영신마가!”

“말씀하신 대로 남궁 가주가 꽤 까다로울 수 있으니까요.”

“혈영신마라.”

묵천악이 신음처럼 그 별호를 중얼거렸다.

혈영신마라는 별호는 조금 특별하다.

현 마교에는 대물림되는 별호가 있는데, 혈영신마도 그중 하나다.

마인들 중에서도 손에 가장 피를 많이 묻힌 자를 두고 혈영신마로 부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대 마인들 중 가장 잔혹한 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역대 혈영신마는 하나같이 손속이 잔인하고 일신에 상당한 무위를 지닌 자들이었다.

게다가 혈영신마라는 별호를 받는 자는 혈영대와 혈우대라는 정예 수하들을 거느릴 수 있고, 그 수는 이백 명에 달한다.

백묘가 말을 덧붙였다.

“혹시 몰라서 흑천마객(黑天魔客)도 갈 거예요.”

“흑천마객? 그자가 아직 살아 있는가?”

“네, 덕분에 정정하십니다.”

백묘가 상큼하게 웃으며 ‘덕분에’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했다.

묵천악이 헛기침했다.

흑천마객.

과거 마교 잔당들을 소탕할 때 그가 살려준 마인 중 한 명이었다.

당시에도 제법 고강한 무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무림맹의 정예 조직에 의해 죽음의 위기까지 처했었다.

‘당시 남궁검에게 내상을 심하게 입었었지.’

묵천악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 백묘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흑천마객이 이끄는 흑천대가 백 명이니 그 정도면 남궁가를 치는데 무리가 없을 거예요.”

“확실히 지금의 남궁가라면…….”

묵천악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젠 과거의 남궁세가가 아니다.

가장에 남은 가신들이 백 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급하게 끌어모은다고 해도 이백 명 남짓이 아닐까?

“더구나 흑천마객께서는 지금 남궁검 가주에게 빚을 갚기 위해 잔뜩 벼르고 계시죠.”

묵천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묵과하면 깔끔하게 끝낼 수는 있고?”

“어떠한 계획도 완벽할 수는 없겠죠. 다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실행하는 거죠.”

“약아빠진 대답이군.”

“맹주님만 할까요?”

“건방진.”

“이런, 너무 열 내지는 마세요. 제대로 배우는 중이라고 생각해 주시길.”

“만약 일이 잘못되면 본 맹은…….”

“흑도 세력으로 만드시면 되죠. 처음부터 우리가 그렇게 위장도 하겠지만. 어느 정도 고의적인 노출도 있을 거고요.”

“흑도라?”

“마침 딱 좋은 시기 아닌가요? 하북에서 흑도인들이 봉기했다고 들었어요. 흑무곡이라죠? 게다가 얼마 전에는 황학루를 습격했다던데?”

“과연. 사파 놈들을 이용하겠다? 영악하군.”

“맹주님의 가르침 덕분이죠.”

백묘가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가볍게 목례까지 해 보이자, 묵천악이 웃음을 터뜨렸다.

“제대로 배웠군. 과연 말이 돼.”

“성공하든 실패하든 맹주께서 원하시는 방식이죠. 내부 결속을 위한 발판이 될 겁니다. 게다가 성공해도 강호신룡은 살아남겠죠.”

“그럼 내부 결속은 더욱 다져질 테지.”

“이후 고립된 남궁천을 제거하기도 수월할 것이고요.”

“과연. 나쁘지 않군.”

“그럼 진행할까요?”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

“영단 중 백도 무림에서 제조한 것은 맹에 내놓게.”

“호호. 욕심이 많으시네요.”

“나이가 드니 욕심도 많아지더군.”

“그럼 추한 법인데.”

“맹랑한 것. 해서? 싫은가?”

묵천악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백묘를 물끄러미 보았다.

한동안 그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던 백묘가 피식 웃었다.

“좋아요, 그러죠. 아직은 본 교가 어찌 귀 맹을 상대하겠어요?”

“주제를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물론이죠. 어디까지나 본 교가 지금껏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맹주의 배려 덕분인걸요.”

“알면 처신을 잘하게. 너무 설치지 말란 뜻이네. 힘을 키우든, 세력을 키우든 마음대로 하되, 내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얌전히 지내란 말이야.”

“맹주께서 돌아가시면?”

“클클. 그땐 내가 알 게 뭔가?”

“역시 화통하시네요. 그럼 거래는 끝난 걸로 알고.”

“가보게.”

백묘가 부드럽게 웃고는 창가로 걸어갔다.

다음 순간 그녀의 신형이 밤바람처럼 창밖으로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맹주가 깍지 낀 손을 턱에 받치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번만큼은 남궁가가 멸문을 당할지도 모르겠군.”

물론 하북에서 운이 좋다면 소가주 남궁천이 살아남겠지만 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골칫거리가 하북으로 간 게 기회일지도 모른다.

묵천악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버러지도 때론 키울 필요가 있는 법이라니까.”

* * *

“저기에 목책을 추가하도록.”

“알겠습니다, 가주님!”

“산동에서는 아직 아무 소식이 없느냐?”

“악 가주가 지원군을 보냈다고 합니다. 조만간 도착할 것 같습니다.”

“개방은?”

“그쪽은 사흘 후쯤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알겠다. 다들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존명!”

언양걸과 무인들이 언가장을 둘러서 목책을 설치하는 등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팽가를 구출한 직후 진주로 돌아와서 곧장 흑도인들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가장이 암벽을 바로 등지고 있어서 전면과 측면만 대비하면 뒤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모용세가가 요녕에만 있었어도…….”

원래 모용세가는 요녕 땅에 터를 두고 있었으나, 오래전 정마대전이 벌어진 이후 절강으로 터를 옮긴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이미 떠난 이를 아쉬워할 수는 없는 법. 대책을 세우는 게 우선이다.’

마침 언호량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아버지,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요?”

언호량은 사실 지난번 계곡에서 흑도인들을 보고 적잖게 놀랐다. 그런 대규모 실전도 처음이었는 데다 적의 머릿수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한데 흑무곡이 작정하고 언가를 친다면 그보다 더한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겠는가?

언양걸이 언호량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버텨야지. 어떻게든 버틴다. 죽어서도 버틴다는 게 본 가의 신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긴 합니다.”

언호량의 시선이 힐끔 팽가 무인들에게 향한다.

현재 팽가도 언가의 방비를 돕고 있었다.

이제는 한배를 탄 상황.

지금까지 팽가와 언가가 이토록 가깝게 지냈던 적이 있었던가?

역시 외부에 적을 두면 내부에서는 똘똘 뭉치게 마련인가 보다.

“그래도…… 보기 좋네요.”

언호량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자, 언양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언양걸은 새삼 감개가 무량했다.

팽가와 언가가 힘을 합치는 날이 올 줄이야.

새삼 백도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뭉클했다.

‘남궁천. 너는 어쩌면 내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로구나.’

언가의 오랜 숙원.

그것은 비단 강령신공의 대성만이 아니다.

바로 백도로서 완전히 인정받는 것.

남궁천은 그것마저 자연스럽게 만들어준 것이다.

“보아라, 어쩌면 이것이 남궁천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전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단합하고 힘을 합쳐 악의 무리와 맞서는 것. 공동의 적 앞에서는 원수도 앙숙도 없다는 것. 오로지 서로가 뜻을 모아 힘을 합쳐…….”

“가주니이임! 큰일 났습니다! 지금 남궁천과 팽 가주가 싸우고 있습니다!”

“으응?”

언양걸과 언호량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돌아보았다.

바로 앞까지 다다라서 숨을 헐떡이는 무인이 겨우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 그것이 남궁천과 팽 가주가 연무장에서 비무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누구랑 누가? 뭐를? 아니, 도대체 왜? 지금 같은 시기에?”

“그게……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습니다만, 서로 원수라나?”

“이 시국에 뭔 소리야? 앞장서게!”

“옛!”

언양걸이 뒤를 따라 걸으면서 혀를 찼다.

‘서로 협력은 개뿔! 역시 그냥 미친 망아지 같은 놈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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