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협력은 개뿔
팽적호가 저만치 견습생들과 어울리는 남궁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진주언가를 움직여?
정말이지 놀라운 놈이다.
만약 자신이 직접 도움을 청했다면 진주언가가 움직였을까?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배어나온다.
팽가와 언가는 그렇게 쉬운 사이가 아니다.
하북을 놓고 늘 팽팽한 대립각을 세우던 가문이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언가가 백도로 편입하려고 할 때 끝까지 반대했던 곳 역시 팽가다.
그러니 언가로서는 팽가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팽가가 건재한 것이 언가에게 이득이 된다고 해도, 차라리 망하길 은근히 바라는 게 바로 언가다.
원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앙숙의 관계.
그런데 그 언가가 움직였다.
팽가를 구해주기 위해서.
‘도대체 저 녀석은 무슨 요술이라도 부리는 건가?’
팽적호가 내심 혀를 내두르는데, 그 곁으로 언양걸이 다가오며 말했다.
“놀라운 녀석이오.”
“확실히. 하나 본 가를 돕기 위해 달려와 주신 언 가주께도 놀랐소. 자칫 위험할 수 있었는데 참으로 묘책을 내셨소.”
팽적호가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처음에는 그 역시 사방에 지른 불을 보고 영락없이 맹이 지원군을 보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퇴로를 모두 차단하겠나?
한데 언가 무인이 전부라니.
자칫 허허실실 전략이 들킬 수도 있었는데, 계곡을 탈주로로 열어둔 덕분에 계략이 통한 것이다.
언양걸이 피식 웃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전략은 모두 저 강호신룡이 짠 것이외다.”
“강호신룡이……?”
“그렇소. 이실직고하자면 본 가는 팽가를 돕지 않겠다고 했소.”
“…….”
그건 놀랍지 않다.
다만 어떻게 설득을 한 것인지 궁금할 뿐.
“그런데 저 신룡이 우리가 움직여야만 하는 이유를 알려주었소.”
“그 이유가 무엇이오?”
“뭐, 별것 아니었소. 다만 본 가는 신룡의 말을 듣고 결정을 내렸소. 가진 걸 지키려고 하기보단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로.”
“그렇구려. 어쨌든 고맙소. 팽가가 언가에 큰 신세를 졌소이다.”
“자, 이제 그만 갑시다. 여기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 봐야 좋을 건 없을 테니. 자칫 저들이 이쪽 전략을 눈치채고 돌아오면 골치 아파질 거요.”
“그럽시다.”
“어차피 갈 곳이 마땅치 않을 테니 본 가로 갑시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신세를 지겠소.”
팽적호가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그렇게 팽가 무인들은 부상자들을 부축해서 언가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무림맹주 묵천악은 맹주전 집무실에 앉아서 서신을 펼쳐 들고 읽었다. 찬찬히 글을 읽어 내려가는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때마다 집무 책상 앞에 시립한 총관의 표정도 이리저리 꿈틀댄다.
“으음.”
마침내 서신을 모두 읽은 묵천악이 무거운 침음을 흘린다.
총관이 흠칫거리고는 맹주의 눈치를 살폈다.
묵천악이 실눈을 뜨고는 중얼거렸다.
“운남이 아니라 하북이라는 건가?”
“그런 듯합니다.”
총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천뇌당은 하북이 아니라 운남일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천뇌당주이자 무림맹 총군사인 제갈승.
보통 사람보다 세 배는 더 똑똑하다고 하여 삼뇌선(三腦仙)이라 불리는 그가 판단이었다.
한데 틀렸다.
맹의 모든 인력이 운남에 집중한 마당에 정반대인 하북을 치다니.
제대로 한 방 먹은 셈이다.
“총군사는?”
“지금 수습을 위해서 천뇌당 인력을 최대한 가동하고 있습니다.”
“분타에서 서신을 보낸 시점이 있을 테니 지금쯤이면 하북이 넘어갔을 테군.”
“어쩌면 팽가도 위험할 겁니다.”
“흑무곡이라. 정보는 있는가?”
“예, 이것이 천뇌당에서 분석한 흑무곡에 대한 정보입니다.”
총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서류를 내밀었다.
묵천악이 묵묵히 그 서류를 한 장씩 넘겨가며 살펴보았다.
하나 정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본적인 것들만 적혀 있다.
특히 흑무곡주라는 류난에 대한 정보는 빈약하기 이를 데가 없다.
정확한 무공 수위도 적혀 있지 않고, 흑무곡의 인원이 얼마인지도 드러나지 않았다.
천뇌당이 분석한 자료라기에는 가히 실망스러운 수준.
오히려 그 사실이 더 많은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그만큼 흑무곡이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이다.
어지간하면 천하의 일을 꿰뚫고 있는 천뇌당이다.
한데 흑무곡이 흑도 세력을 연합해서 무림맹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올 것이란 걸 파악하지 못하다니.
‘그만큼 치밀한 자라는 뜻일 터.’
신경이 쓰인다.
바깥의 적은 늘 내부 결속을 위해서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던 묵천악이었다.
한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언제든 그 적을 조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마음만 먹으면 외부의 적을 충분히 말살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흑무곡의 봉기는 자신의 손밖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것이 못내 불쾌하다.
거기에 예상 밖의 결과를 내고 있다.
묵천악이 원하는 대로 내부 결속의 기틀을 마련할 수는 있겠지만, 지나치게 거대해지면 오히려 내부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다. 아니, 붕괴가 될 수도.
‘그렇게는 둘 수 없지.’
어찌 이룬 강호 평화인가?
생사람마저 잡아가며 지켜온 평화이고, 이 자리다.
“청랑단은?”
“회군 중이라고 합니다.”
“운남에서는 아무 일이 없는가?”
“다소 마찰이 있으나 역시 눈속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적랑단이 상황을 정리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팽가가 무너지면 다음은 진주언가 차례겠군.”
“지금쯤이면 언가도 방비를 굳히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팽가 쪽으로 견습생들이 갔다고?”
“예, 남궁천을 포함해 네 명이 하북으로 갔습니다.”
“남궁천이라.”
묵천악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원래 견습생들은 운남으로 파견된 것으로 안다.
다만 몇 명의 견습생들이 동료인 팽수혁을 걱정해서 하북으로 보내달라고 졸랐다는 말을 들었다.
“빨리 갔다면 지금쯤 팽가를 만났거나…….”
“언가에 도착했을 테지요.”
“어느 쪽이든 위험한 상황이겠군.”
“청랑단에게 서두르라는 연통을 넣겠습니다.”
“아니.”
묵천악이 불쑥 말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총관이 흠칫거리고 바라보자 묵천악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모처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강호신룡이다. 지금처럼 난세가 시작되려고 할 때는 영웅이 필요한 법. 그가 조금 더 돋보일 시간을 벌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나 제아무리 강호신룡이더라도 팽가가 무너진다면…….”
“영웅은 반드시 이겨야만 되는 게 아니지.”
묵천악의 나직한 목소리에 총관이 움찔거리고는 곧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
영웅은 항상 이길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항상…….
‘살아 있어야 할 필요도 없지.’
오히려 죽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영웅으로 등극하는 사람도 많지 않던가?
묵천악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영웅이 등장하기에 딱 좋을 시기군.”
총관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자신이 모시는 맹주는 이런 자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런 맹주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하나 결과적으로 그는 늘 추구하는 바를 얻었다. 그렇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자 총관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과연 수단과 방법을 지켜 위태로운 평화가 좋은 것인가?
대의를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하는 것이 나쁘기만 할까?
이런 고민을 하던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그래, 그것 또한 용기다. 누군가는 어긋난 정의라고 부를 테지만, 그 비판을 모두 짊어질 수 있는 것 역시 용기가 아니겠나?’
작은 것에 연민을 품는 여린 마음으로는 결코 큰 조직을 이끌 수 없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묵천악은 진정한 무림맹주였다.
총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면 청랑단에게 충분히 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러게.”
한마디로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오라는 뜻.
총관이 물러간 후 묵천악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왔다.
그가 밤하늘의 별을 보더니 가만히 중얼거렸다.
“왔으면 들어서지 않고.”
누구에게 건넨 말일까?
일순 부드러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더니 묵천악 옆에 거짓말처럼 인영이 나타났다.
새하얀 옷에 새하얀 고양이 가면, 그리고 역시나 하얀 쥘부채.
온통 하얀데도 이 밤중에 들키지 않고 움직이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녀가 창틀에 걸터앉으며 다리를 꼬자 옆단이 길게 찢어진 치마 사이로 백옥 같은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났다.
백묘가 입매를 비틀며 대꾸했다.
“상념에 빠져 계신 것 같기에.”
“과한 배려군. 맹주전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주제에.”
“누가 들으면 잠입하는 줄 알겠어요. 항상 드나들게끔 뒷문을 열어주시는 게 누군데.”
“쓸데없는 소리는 접어두고. 용건이나 말하게.”
“어머, 이렇게 모른 척하시면 서운하죠. 이미 많이 서운하지만.”
“서운하다?”
묵천악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백묘를 노려보았다.
“무서워라.”
백묘가 짐짓 겁을 먹은 척하며 부채를 펼쳐 들고는 얼굴을 가린다.
묵천악의 표정에 희미한 노기가 서렸다.
“내게 서운하단 소리를 다 하고. 이제 살 만한 모양이군.”
“서운할 수밖에요. 앞에서는 온갖 생색을 다 내시면서 뒤에서는 수작질을 하시니.”
후우우우웅!
순간 묵천악의 전신에서 기풍이 사방으로 불어 나갔다. 동시에 그의 장삼이 터져 나갈 듯이 펄럭였다.
바로 곁에서 묵천악의 노기를 고스란히 감당한 백묘도 조금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한차례 살벌한 분위기가 흐른 후 묵천악이 냉랭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무엇이 그리 서운했던가? 들어나 보지.”
“마단곡. 분명 도절귀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한데?”
“비량을 광서성으로 보내셨더군요.”
“그래서?”
“설마 그곳에 마단곡이 있었다는 걸 모르지는 않으실 테고.”
순간 묵천악이 움찔거리고는 백묘를 돌아보았다.
“광서성에 마단곡이?”
“시미치 떼시는 건가요?”
“……!”
묵천악의 표정이 팍 일그러지자, 백묘도 묘한 눈빛을 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보기에도 묵천악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계속 말해보게.”
“본 교 수하가 마단곡에 잠입했으나 결국 빠져나오진 못했죠. 그런데 그곳에서 빠져나온 인물이 있어요.”
“그게 비량이란 말인가?”
“아뇨. 본 교의 조사에 의하면 비량은 마단곡에 들어가지도 않은 것 같더군요.”
“하면?”
백묘가 묵천악을 가만히 응시했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묻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확인하려는 듯.
이내 백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말하게.”
“최근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남궁가가 마단곡 영단을 옮긴 것으로 보여요.”
“뭣이?”
묵천악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백묘는 그런 묵천악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실 묵천악을 의심한 것은 사실이다.
현 무림맹주 묵천악은 충분히 그럴 만한 인물이었으니까.
앞과 뒤가 다른 인물.
본인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
해서 남궁세가를 그렇게 멸시하면서도 그들을 이용하여 마단곡 영단을 빼돌린 게 아닌가 여겼다.
그렇다면 확실히 자신들의 이목을 속이기도 쉬울 테니까.
한데 지금 반응을 보면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정말 모르고 있었던 건가?’
묵천악의 표정은 이제 황당함을 넘어서 분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남궁가가 마단곡 영단을……! 도대체 무슨 수로 그들이?”
“남궁가에서 광서성으로 간 사람은 한 명뿐이죠.”
“또…… 또 남궁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