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세 가지 이유
‘진짜 미친놈인가?’
아까부터 계속 드는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저 칼로 팔을 자르라니?
제정신이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하나 지금까지 논리정연하게 조목조목 반박하는 걸 보면 분명 미친 녀석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강령신공은 언가의 비전인데 그걸 제까짓 게 무슨 수로 도와주겠단 말인가?
그런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남궁천이 말했다.
“물론 제가 강령신공에 대해선 모릅니다.”
사실 너무 잘 알지만.
이미 남궁천은 언호량과 손을 섞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남궁천은 초견파공안으로 언호량의 운기를 보면서 문제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워낙 오래전이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전대 가주가 사용하던 강령신공은 그보다 훨씬 단단한 느낌이었으니까.
언양걸이 미간을 좁히고는 따지듯 물었다.
“강령신공에 대해서 모른다면서 뭘 어찌 돕겠단 말인가?”
“막힌 부분을 뚫을 만한 실마리는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실마리라. 무슨 수로?”
“제가 맨몸으로 저 칼을 막아내는 걸로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렷다.”
“물론이죠.”
남궁천이 해맑게 웃는다.
너무 천진해 보이니 긴장도 되지 않는다.
헛웃음을 지은 언양걸이 곧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언호량을 불렀다.
“칼을 가져 오너라.”
“아, 아버지…….”
“어서!”
언호량이 입을 꾹 다물고는 좌대로 걸어가 칼을 꺼내왔다.
언양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실제로 몹시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그래도 강호신룡이라는 별호에다 자신을 설득하는 논리에 나름 감탄은 했지만, 이렇게도 무모하고 주제넘을 줄이야.
‘강령신공을 어지간히 우습게 보는 모양이군!’
장도를 건네받은 언양걸이 시퍼런 도신을 뽑아 들고는 물었다.
“그래, 들어는 보지. 무슨 수로 이 칼을 막아보겠다는 건가?”
“제가 강령신공을 모르는 만큼 창벽공으로 막아보겠습니다.”
“창벽공? 그것이 남궁가의 무공이더냐?”
“예, 한동안 실전되어 있었지만, 제가 다시 익혀서 유용하게 써먹는 중이죠.”
“하나 창벽공의 운기가 강령신공의 운기와는 전혀 다를 텐데. 자네가 내 칼을 막는다고 해도 창벽공의 묘리를 알려줄 것도 아닐 테고. 과연 그게 강령신공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에이, 만류귀종이죠. 하나를 알면 열을 깨우치는 게 무공이고. 그것도 깨닫지 못하면 너무 무식해서 무공을 배울 자격이 없는 거죠.”
“…….”
이 새끼가 지금 날 먹이는 건가?
잠깐 이마에 핏대가 섰던 언양걸이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좋다. 어찌 됐건 자네 팔이 멀쩡할 때의 얘기겠지.”
“그렇죠.”
남궁천이 속도 없이 헤실헤실 웃고 있다.
오히려 불안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함께 온 생도들이었다.
“유현 도장, 저거 정말 괜찮을까?”
“글쎄요. 남궁 소협이 아무 대책도 없이 저러진 않을 것 같긴 한데…….”
“믿어. 남궁천을. 나는 믿으니까.”
진소홍이 다부진 표정으로 말한다.
그 옆모습을 돌아본 유현과 윤종승은 내심 진소홍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의 믿음이라니.
상인은 남을 잘 믿지 않는다던데 어째서 진소홍은 저렇게 남궁천을 믿는 걸까?
‘아……!’
윤종승이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진소홍의 다부진 표정을 보고 있자니 새삼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래, 소홍은 남궁천을 믿는 게 아냐. 자신을 믿고 있는 거야.’
남궁천을 인정한 자신의 안목을 믿는 거다.
입을 꽉 다물고 남궁천과 언양걸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진소홍.
그렇다. 저건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자의 눈빛이 아니라, 더 높은 곳을 보는 자가 위험을 무릅쓰는 눈빛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만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진소홍이 새삼 대단하고 부럽기도 했다.
언양걸이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소를 가릴 필요는 없을 터. 여기서 하도록 하지.”
“그러죠, 뭐.”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상의를 훌훌 벗었다. 이내 탄탄한 근육이 자잘하게 박힌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남궁천이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오른팔을 쑥 내밀었다.
순간 움찔거린 언양걸이 남궁천의 허리춤을 확인했다.
분명 왼쪽 옆구리에 검을 패용하고 있었다. 그 말은 오른손잡이라는 뜻이다.
한데 오른팔을 내밀었다.
보통은 심리적으로 만약을 대비해서 왼팔을 내밀게 마련이다. 자신 또한 조금 전까지 그랬고.
그런데 오른팔을 내밀어?
‘생각이 없거나, 미친놈이거나, 정말 괴물 같은 녀석이거나.’
지금으로서는 미친놈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
아주 미약한 주화입마가 온 것은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언양걸이었다.
실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시퍼렇게 빛을 발하는 도신과 맨몸으로 오른팔을 내민 남궁천.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린다.
여차하는 순간 남궁천이 팔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
“잠, 잠깐만요.”
마침 윤종승이 소리치며 앞으로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가자 윤종승이 쭈뼛거리며 나서서 남궁천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그럼 팽수혁 죽도록 내버려 둘까? 어쨌거나 그 녀석 구하려면 사람이 필요해. 그리고 당장 그만한 인원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야.”
“그렇긴 한데…….”
“물러나 있어라. 방해 말고.”
남궁천의 말에 윤종승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지금까지 장난 서린 표정과 다르게 이번만큼은 항거를 불능케 하는 눈빛과 말투였다.
남궁천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언양걸을 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팽수혁이 죽으면 조금 아쉽긴 하겠지만 땅을 치며 울고불고 할 일까진 아니다.
도망자 신세로 살면서 가까운 사람이 죽는 걸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하나 남궁세가를 정상에 올리려면?
혼자 싸워서는 안 된다.
세상을 상대로 혼자 싸우는 게 얼마나 무모하고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남궁천이다.
이번 생은 달라야 한다.
최대한 우군을 만들어 강호 정상을 향해 달려야 한다.
아무리 홀로 강해져도 사방이 적일 경우에는 오래 버틸 수가 없다.
그럼 역시 이 기회를 발판으로 팽가와 언가를 확실히 얻어야 한다. 팽가를 멸문지화에서 구하고, 언가의 염원을 눈앞에서 들어준다면?
‘친구는 될 수 있겠지.’
남궁천이 언양걸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뭐지? 그런 눈으로 보면 내가 맘이 약해져서 못 칠 줄 아는 것이냐?’
언양걸이 잠깐 어이없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표정을 굳히고는 천천히 검을 들었다.
“네가 자초한 것이다. 원망은 마라.”
“그러죠.”
“여기 있는 모든 이가 그 증인이다.”
언호량과 견습생들이 저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양걸이 마침내 도파에 힘을 싣는 순간,
“잠깐만요.”
“아, 또 왜! 뭔데? 왜!”
떨어지던 칼날이 멈칫거리면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남궁천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말한다.
“그 전에 약속은 분명히 받아둬야죠.”
“무슨 약속!”
“제가 멀쩡하면 팽가를 지원 가는 겁니다.”
“물론이다! 대신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땐 자네도 강령신공의 벽을 깨뜨릴 실마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야!”
“물론이죠. 그리고 그 은혜 잊지 마시고요.”
“내놓으면! 내놓으면!”
“네네.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요.”
“끄응. 다들 들었는가? 자네들이 곧 증인일세.”
“잘 들었습니다.”
언호량과 견습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럼 이제 진짜 시작한다.”
남궁천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언양걸이 다시 심호흡을 하고는 도신을 들어 올렸다.
스윽.
다시금 실내에 긴장감이 감돈다.
‘나를 원망 마라!’
이윽고 도파에 힘을 실은 언양걸이 있는 힘껏 도신을 내리쳤다.
쉬이이잇!
그 순간, 남궁천은 천천히 눈을 감고 오래전 진주언가 무인들과 싸우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당시 태상장로가 썼던 강령신공까지.
강령신공은 오행 중 두 가지 기운을 머금는다.
토와 금의 기운이다.
이 기운이 혈맥을 따라 내달리면서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물론 남궁천은 지금 강령신공을 펼치는 게 아니다. 창벽공을 운용하고 있다.
창벽공은 푸르고 푸르다.
무당의 태극공이 상선약수에 뜻을 두고 있다면, 남궁세가의 창벽공은 상선약공에 뜻을 둔다.
물과 공기.
많은 부분이 닮았지만 또 다르다.
물은 공기를 품지 못하고, 공기는 물을 품지 못한다.
둘은 각각 다르지만 어떤 형태로든 변할 수 있다는 것만은 똑같다. 그리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물보다 공기가 더 유연하다.
해서 창벽공을 강령신공처럼 운기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창벽공의 오의는 바로 비움에 있기에. 그 빈 곳에 강령신공의 뜻을 담는다.
단전에서 솟구친 창벽공이 강령신공의 흐름에 따라 전신 혈맥을 타고 빠르게 치달린다.
이내 피부가 무쇠처럼 단단해지고 심중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것이 창벽공!’
남궁천이 창벽공에 매료된 것도 이 때문이다.
창벽공으로 만들어낸 내공은 순수함 그 자체다. 마치 티 없이 맑은 하늘과 같다.
그렇기에 어떠한 형태도 고집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다. 초견파공안을 가진 남궁천에게 그야말로 딱 맞는 무공이 아닌가?
그만큼 익히기는 어렵지만, 남궁천에게는 문제 될 게 없다.
모든 인간의 공력 흐름을 꿰뚫어 보았고, 모든 공력의 성질을 파악하고 있으니까.
생각은 길었으나 걸린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쒸이이이이익!
쩌까아앙!
도신이 남궁천의 팔을 강타한 순간,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남궁천은 천천히 눈을 떴고, 언양걸은 두 눈을 찢을 듯 부릅떴다.
곧이어 다른 사람들도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딱 벌렸다.
칼로 사람 팔을 쳤는데도 금속성이 터진 것에 먼저 놀랐다. 그리고 남궁천의 오른팔이 멀쩡하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어, 어찌……?”
도신이 부러지진 않았다.
가주실에 걸린 칼이었던 만큼 쉽게 부러지는 도가 아니었다.
하나 남궁천의 팔도 멀쩡했다.
“강령…… 신공……?”
멍하니 중얼거린 언양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저건 강령신공이 아니다.
남궁천의 팔을 에워싸듯 은은하게 도는 푸른빛은 분명 강령신공과 다르다.
강령신공은 검붉은빛을 띤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말한다.
“이제 좀 믿겠어요? 아마 강령신공을 대성하면 이보다 훨씬 대단해지겠죠.”
“어찌…… 어찌한 것이냐?”
“토와 금의 기운을 섞는 게 우선 중요해요. 애초에 단전에서 끌어 올릴 때부터 그래야 해요. 뽑아내서 섞는 게 아니라, 단전에서 이미 버무려서 뽑아낸다는 생각으로.”
“아…….”
“이후에는 중단전에서 크기를 좀 더 키워야죠. 이때 절대로 멈칫하면 안 돼요.”
“……!”
언양걸이 흠칫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중단전에 이르면 절로 공력이 주춤거리기 때문이다. 습관 같은 게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된다.
남궁천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언호량과 손을 섞으면서 확인했던 부분이기에.
단전에서 뽑아 올린 공력이 중단전에 이르면 언가권을 쓸 때 폭발하듯 터진다.
이런 운기가 반복되다 보니 진주언가 무인들은 고질적으로 중단전의 혈맥이 점점 굳어지는 것이다.
혈맥이 굳어지면 그만큼 튼튼해진다는 장점은 있다. 하나 지나치게 굳어지면 자연스레 둔해질 수밖에 없다.
언가의 무공이 대체로 강시술에서 따온 것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문제는 이걸 수시로 풀어줘야 하는데…… 그 풀어주는 법을 가르쳐주기 전에 전대 가주가 죽은 거겠지.’
남궁천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근육을 많이 쓰면 뭉치잖아요. 그땐 자꾸 유연해지도록 풀어줘야죠. 보기만 좋은 근육 돼지가 되면 실전에선 무용지물이니까요.”
이만해도 충분히 실마리는 됐을 터. 풀어주는 법은 언가가 스스로 연구해야 할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언양걸이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가…… 그런 문제였나! 그렇군! 그랬어!”
뭐든 해결책을 알고 나면 쉽다.
하나 해결되지 않을 때는 막막한 게 바로 세상 이치다.
“그럼 이제 우리하고 같이 가실 거죠?”
남궁천이 장삼을 걸치며 물었다.
언양걸이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언가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좋아요.”
남궁천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