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세 가지 이유
소문은 들었다.
이상한 녀석이라고.
강호신룡이라는 별호로 불리지만 격식과 품위라곤 찾아보기 힘든 유형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신선한 바람으로 느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뭐, 굳이 허례허식을 차리지 않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아무렴! 정의를 지키는 협객의 면모만 보인다면야 그게 대수겠나?”
“차라리 위선적이지 않은 모습이 더 낫군그래.”
세간의 평이 대체로 그랬다.
그래서 언양걸도 어느 정도 호기심을 가지곤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자기 아들의 눈을 찔러 버린 녀석이었다.
마냥 좋은 감정만 가질 수도 없는 노릇.
그저 세간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가만히 듣기만 할 뿐이었다.
반짝 떠올랐던 샛별 같은 존재라면, 결국 태양 아래 빛을 잃을 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강호신룡의 명성은 오히려 더 자자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광서성에서는 산채 하나를 강호신룡이 앞장서서 토벌했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물론 과장이 보태졌겠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는 없는 법.
‘뭔가 한 가락이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미친놈일 줄이야?
세상이 강호신룡이라며 떠받들어주니 겁대가리라는 걸 상실해 버린 건가?
아무리 허례허식이 필요 없다지만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라는 게 있는 법이건만.
한차례 뺨을 씰룩인 언양걸이 웃옷을 대충 걸치고는 일어났다.
“도대체…….”
그가 말을 막 꺼내려는 찰나, 남궁천이 포권을 척 취하더니 더없이 격식을 갖춰 말했다.
“밤중에 갑자기 찾아와 실례를 저지른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하나 한시를 다투는 문제인지라 급히 가주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지켜보던 언호량이 눈을 부릅떴다.
‘아니, 저게 왜 갑자기 정상인인 척이야?’
마침 남궁천 뒤를 허겁지겁 따라 들어온 유현과 윤종승, 진소홍도 포권지례를 취했다.
“가주님께 사죄드립니다!”
이쯤 되자 준엄하게 꾸짖으려던 언양걸도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물었다.
“대체 얼마나 중한 일이기에 밤중에 이 난리를 친단 말인가?”
“언가의 존폐가 걸린 문제입니다.”
“……!”
언양걸은 물론 언호량도 화들짝 놀라서 남궁천을 보았다.
언양걸의 목소리가 대번 높아졌다.
“본 가의 존폐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떨까요?”
남궁천이 주변을 스윽 둘러보며 말했다.
시종들과 수하들이 난잡하게 어우러져서 어수선한 상황.
언양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그러도록 하지. 그러나 막상 중한 문제가 아닐 시에는 자네가 그 책임을 어떤 식으로든 져야 할 것이야.”
“물론이죠.”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 * *
진주언가 가주실.
커다란 탁자에는 하북성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언양걸과 언호량, 그리고 남궁천을 비롯한 견습생들이 그 지도를 함께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양걸이 지도를 내려다보며 침음을 흘리다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지금쯤 흑무곡이 하북팽가를 치고 있을 거란 말이군.”
“그렇죠.”
“이미 하북 분타는 점령을 당한 상태일 것이고.”
“네.”
“하나 하북 분타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은 아닐세. 맹이 운남에 집중한 것에는 하북 분타의 힘을 어느 정도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척!
언양걸이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탁자 위에 놓아둔 목함을 보았다.
그가 눈썹을 구기며 물었다.
“그게 뭔가?”
“이미 하북 분타는 적의 손에 넘어갔다니까요.”
남궁천이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목함의 덮개를 열었다.
순간 언양걸과 언호량이 기함하며 물러났다.
“헉!”
“이런!”
목함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하북 분타주 팽진악의 머리.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무한으로 향하는 흑도 놈들을 붙잡아서 빼앗은 겁니다.”
“그럼 정말 하북 분타가…….”
언양걸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거, 참. 사람 말을 못 믿으시네.
남궁천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겨우 진정을 되찾은 언양걸이 지도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자네 말은 알겠어. 하나 본 가가 팽가를 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이유가 있네.”
“뭔 이유가 세 가지씩이나. 일단 들어보죠.”
“첫째, 본 가는 팽가와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야.”
“그럼 팽가가 망하길 바라시는 건지?”
“그 정도는 아니지만 팽가를 위해 본 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거지.”
“하나 팽가가 망하면 언가도 위험해집니다. 팽가 다음은 어디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본 가가 되겠지. 그 정도는 짐작한다. 하나 지금부터라도 본 가가 더욱 철저히 방비한다면 버텨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듣고만 있던 진소홍이 불쑥 나섰다.
“그래요. 한동안 버틸 수는 있겠죠. 운이 좋다면 정말 맹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그래서 얻는 건 뭐죠?”
“얻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잃는 게 적겠지.”
진소홍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든 위기는 곧 기회예요. 얻으려는 자보다 잃지 않으려는 자는 결코 성공하기 힘들죠. 진주언가가 왜 늘 그 자리인지 알 만한 발언이시네요.”
“……!”
진소홍의 날카로운 지적에 언양걸은 물론 다른 견습생들조차도 놀란 표정이 됐다.
남궁천만 희미하게 웃는다.
‘역시 금왕의 딸이네.’
늘 조용히 상황을 지켜만 보던 진소홍이 실리를 따지는 일에는 사뭇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
언양걸이 언짢은 표정으로 진소홍을 나무랐다.
“자네는 얼마나 귀한 가문에서 자랐기에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는가?”
그러자 진소홍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언호량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버지, 금왕의 딸이라고 합니다.”
“뭐, 뭣?”
언양걸이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진소홍을 보았다.
주근깨 빼곡한 얼굴에 수수하면서도 약간 큰 옷매무새는 어디로 보나 평범한 가문의 자녀로 보였다.
그래서 주제넘게 참견하는 그 모습을 지적한 것인데…….
‘금왕의 딸이라니……!’
하면 보고 듣고 자란 것이 있어 생각하는 것도 다를 터.
어지간한 상가의 자식이라면 진주언가에 견주기 어려울 터다.
하나 금왕이라면 다른 문제다.
“커흠!”
언양걸이 헛기침을 하는 사이, 남궁천이 진소홍에게 말했다.
“원래 남자들이 자존심 때문에 큰 그림을 잘 못 그리는 경우가 많아.”
“그게 뭐야? 정말 답답하네.”
“별수 없지, 뭐. 자존심에 죽고 사는 게 또 무인이니까.”
마치 자신에게 들으라는 듯 떠드는 남궁천과 진소홍을 보고 언양걸이 씹어뱉듯 말을 흘렸다.
“하면 자네들은 본 가가 이득을 취할 길이 있다고 보는 건가?”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죠. 팽가를 도우면 됩니다. 팽가가 고집스럽고 거칠지만 은원 관계는 확실하게 따지죠. 저 같으면 이 기회에 팽가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하북 분타를 노려보겠는데요?”
“하북 분타라.”
남궁천의 눈길이 팽진악의 머리로 힐끔 향했다. 언양걸도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따라갔다.
마침 비어 있는 자리가 됐다.
이 전쟁이 어찌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무사히 정리가 된다면 하북 분타의 자리를 앞으로 언가가 차지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아직 두 가지 문제가 더 있다.”
“뭐죠?”
“자네 말대로 지금쯤 팽가가 전투 중이라면 우리가 출발해 봐야 이미 늦었다는 거지. 팽가가 장원을 버리고 도주를 선택한다면 어디로 올지 알 수도 없고.”
“그건 간단합니다. 여기 어딘가니까.”
남궁천이 지도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계곡이 흐르는 지형이었다.
“어째서 그리 확신하지?”
“팽가는 실전에 능한 가문입니다. 하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싸움을 다 겪어봤겠죠. 그럼 당연히 도주하기에 가장 좋은 지형도 알 겁니다. 그게 바로 여기.”
사실 이는 남궁천이 오랜 도주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하북에서 팽가 놈들에게 쫓길 때 자주 이용하던 지형이기도 했고.
‘팽가가 아무리 멍청해도 실전에서 익힌 게 있을 테니 도주로는 여기밖에 없을 거야.’
언양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자네 말이 다 맞다고 쳐도 마지막 문제가 남아 있네. 팽가가 무너질 정도면 흑도인들이 작정을 했다는 뜻일 터. 본 가가 지원을 가봐야 머릿수에서 한참 밀릴 것이야. 당연히 전력에서도 차이가 날 테고. 본 가의 무인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 말일세.”
자존심이 상하지만 사실이었다.
원래부터 진주언가는 다소 폐쇄적인 가문이었다. 강시술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오랜 역사에서 그들은 흑도로 배척받아 왔으니까.
대대로 진주언가의 무인 숫자가 적은 것 역시 보유한 강시들로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대 전부터 강시술을 완전히 폐하면서 백도로 인정을 받긴 했지만, 대신 그만큼 힘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가신들을 모두 이끌고 지원 간다고 해도 흑무곡 무인들을 압도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적다.
그러자 진소홍이 다부진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전쟁은 머릿수로 하는 게 아니라 머리로 하는 거죠.”
“혹 묘수라도 있는 것인가?”
“저는 없지만 남궁천이 있을 거예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남궁천을 바라보는 진소홍.
‘그새 뻔뻔함이 늘었어.’
남궁천이 고개를 살짝 젓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 그걸 숨기기 위해 밤중에 지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팽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위를 포위한 다음 불을 지르는 거죠. 그럼 지레 겁을 먹고 맹에서 지원왔을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제가 그렇게 종용할 거니까. 거기에 경공이 빠른 자들로 몇 명 추려서 나뭇가지와 수풀을 지게 한 다음 부지런히 뛰어다니게 만드세요. 그럼 숲이 통째로 흔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지원군이 있는 걸로 착각하겠죠. 함성을 내지르고 발을 심하게 굴리면 더 좋고. 복색은 청랑단이 상상될 정도로 푸른빛으로 하고요.”
“자네 말은 알겠네. 하나 싸움이 격해지면서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허허실실 전략을 눈치챌 것이야. 그땐 두 가문이 위험에 처할 수 있어.”
“그래서 여기가 딱 좋은 지형이죠. 달아날 길을 자연스럽게 열어둘 수 있으니까. 배수의 진이라면 적도 죽기 살기로 싸우겠지만, 달아날 구멍이 있으니 적들도 무리해서 싸우기보단 달아나려고 할 겁니다.”
“달아날 길이라니. 사방에 불을 피웠는데 어디로…… 아!”
그제야 언양걸이 흠칫거리고는 지도에 그려진 계곡을 보았다.
과연 물이 흐르는 계곡이라면 화마가 미치지 못할 테니 자연스레 탈주로가 되리라.
회의 과정을 지켜본 언호량은 남궁천을 보며 내심 전율했다.
‘남궁천…… 저 녀석은 도대체?’
용천관 공식 호구였다는 게 정말인가?
용천관 생도들이 작정을 하고 속인 게 아닐까?
도저히 같은 생도처럼 보이지 않는다.
짧은 시간 남궁천은 하지 못할 세 가지 이유를 가능성이 있는 세 가지로 바꿔 버렸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고수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 않나? 마치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장군처럼 보일 지경이다.
격이 다르다.
훨씬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것만 같다.
하나 언양걸은 여전히 침음을 흘리며 시원한 답을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하북 분타를 취한다는 보장이 없지. 그리고 그것만으로 본 가를 위험에 빠트리기엔…….”
“하북 분타는 제가 보장해 드리죠.”
“자네가?”
“예. 그리고 거기에 얹어서.”
“얹어서?”
“가주님의 염원이 이루어지도록 도와드리면 어떨까요?”
“내 염원이라니.”
남궁천의 눈길이 언양걸의 왼팔로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언양걸이 흠칫거리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강령신공을 익히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예. 그럼 팽가를 도우러 가실 건가요?”
“그 전에. 자네가 어찌 도울 건가? 강령신공은 가문의 비전. 자네가 돕고 말고 할…….”
“쳐보세요.”
“뭐라?”
“저기 칼로 제 팔을 내리쳐 보시죠.”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좌대에 걸린 도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