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세 가지 이유
숲을 에워싼 불길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시에 모여드는 적의 숫자도 점점 많아진다.
이대로는 궤멸이 확실하다.
숲에 불을 질렀다는 것은 아예 퇴로를 막아 버려서 전멸시키기로 작정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적이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는 뜻.
자존심은 상하지만 본능이 물러서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혈검추혼은 늘 본능의 경고에 충실한 편이었다.
자존심?
자존심이라는 건 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뿐이다.
죽으면 다 끝이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이 강호는 살아남는 자가 강한 곳이다.
무력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열함을 전제하지 않는가?
힘으로 찍어 눌러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
적어도 무인이 공정을 운운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는 법이다.
그러니 달아나는 것도 살기 위한 방책 중 하나일 뿐!
‘일단은 후퇴다!’
결심을 굳히는데 다시 남궁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방에 불을 질러서 퇴로도 없어. 어딜 빠져나가려고?”
혈검추혼이 남궁천을 스윽 돌아보았다.
“남궁천. 기억해 두마.”
다음 순간 그가 재빨리 돌아서서 몸을 날렸다.
화마가 사방을 덮쳐오더라도 아직 안전한 퇴로가 한 군데 남아 있지 않은가?
“다들 계곡을 따라 이곳을 벗어난다!”
“복명!”
혈검추혼의 명령에 흑도인들이 대답과 동시에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 뒤로 팽가 무인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놈들이 달아난다! 잡아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우와아아아!”
무인들이 달아나는 흑도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정하고 달아나는 흑도인들을 완전히 쫓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남궁천이 팽적호에게 말했다.
“너무 깊이 쫓지 말고 부상자를 돌보게 하세요.”
“뭐? 모처럼 청랑단까지 지원 왔는데 그게 무슨 소린가? 당장 쫓아가서 놈들을 궤멸시켜야지!”
“청랑단은 안 왔어요.”
“뭐라? 그럼 저들은…….”
팽적호가 미간을 좁히고 숲을 바라보는데, 마침 핏물을 흠뻑 뒤집어 쓴 중년의 사내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마침내 달빛 아래 중년인의 얼굴이 훤히 드러나자 팽적호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
“언 가주……?”
곰처럼 커다란 덩치의 중년인은 다름 아닌 진주언가주 언양걸이 아닌가?
‘저자가 어째서 여길……?’
물론 진주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하나 문제는 두 가문의 관계다.
사실 언가와 팽가는 그리 친분이 두텁지 않다. 하북을 두고 늘 힘겨루기를 하는 가문이니까.
게다가 진주언가는 한때 사파로 분류되던 곳이 아니던가? 그들은 백도에서 배척하는 강시술을 사용한다.
하지만 몇 대 전부터는 강시술을 봉해 버리고, 그걸 신체에 적용해서 언가권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그 바람에 백도로 편입될 수 있었는데, 여전히 팽가는 언가를 반쯤 흑도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팽가가 위기에 처해도 절대 지원을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곳이기도 하고.
“팽 가주, 괜찮으시오?”
언양걸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팽적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는 괜찮소. 한데 어찌 여길……?”
“강호신룡이 날 이곳으로 오게 했소.”
언양걸이 턱짓으로 남궁천을 가리켰다.
팽적호의 시선이 자연히 남궁천에게 향했다.
‘하필이면 원수의 자식과 언가라니.’
썩 내키지 않는 상황이지만 은혜를 입은 것만은 틀림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와 도움을 주어서 감사드리오.”
팽적호가 포권하며 말하자, 언양걸이 웃으며 답례했다.
“별말씀을. 응당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팽적호가 고개를 들고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저 녀석이 어떻게 언가를 움직인 거지?’
* * *
하루 전.
웅장한 대문 위에 ‘진주언가’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윤종승이 커다란 편액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남궁천에게 물었다.
“여긴 왜 온 거야?”
다른 견습생들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저도 궁금하군요. 하루빨리 팽가로 달려가야 하지 않습니까?”
유현이 나서며 물었다.
바로 어젯밤에 만난 흑도인들에게서 팽가장이 위험하단 소리를 듣지 않았나?
그런데 생뚱맞게 언가를 찾아오다니.
하지만 진소홍만큼은 남궁천의 의중을 눈치채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지금 팽가로 달려가도 늦을 거야. 게다가 우리가 간다고 해서 뭐가 바뀌긴 어려울 거고. 그럴 바엔 지원 인력을 끌고 가는 게 낫겠지.”
“아…….”
윤종승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다.
“그래도 언가는 팽가와 사이가 썩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과연 지원을 가줄까?”
“그걸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정문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마침 번을 서던 문지기 둘이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멈춰라! 오밤중에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
“한시가 급한 용무라 빨리 문 좀 열어줬으면 좋겠는데.”
“뭐? 이런 미친놈이…….”
문지기가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성큼성큼 나섰다. 그러잖아도 지루한 터에 잘 걸렸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반면 뒤에 선 윤종승은 속으로 가만히 문지기의 명복을 빌었다.
* * *
“아, 아버지…….”
언호량이 검을 들고 주춤거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곧 언양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런 못난 것! 뭘 하느냐! 어서 내려치지 않고!”
“하지만……!”
“그리 마음이 나약해서 얻다 써먹는단 말이냐!”
언양걸의 호통에 언호량이 검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하지만 떨리는 마음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부자가 있는 곳은 장내 연무실.
언양걸은 윗옷을 모두 벗어 던진 채 왼팔을 내밀고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탄탄한 신체는 흡사 강철이 연상될 정도로 끄떡없어 보인다.
하나 그래도 사람의 몸이다.
날카로운 검신으로 팔을 내려치면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에도 언양걸은 아들에게 자신의 팔을 자를 기세로 내리치라고 독촉했다. 강
“량아, 잘 들어라. 본 가가 흑도로 내몰리는 것도 다 힘이 약해서다. 이 세상은 힘 있는 자만이 누리는 곳이다. 본 가가 힘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이 강령신공(殭靈神功)을 완성해야 한다! 알겠느냐?”
“아버지…….”
“강령신공만 확실했어도 너는 무연회 본선까지 무난하게 올랐을 것이다. 자, 쳐라!”
언호량이 두 손으로 검을 콱 움켜쥐었다.
아버지는 지난 한 달간 폐관수련을 하면서 강령신공을 익히셨다.
가문에서 가주에게만 내려오는 비전 중 하나.
몇 대 전부터 강시술을 내공심법에 접목해서 개발해 왔는데, 그중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강령신공이다.
강령신공을 대성하면 도검불침의 신체가 완성된다.
물론, 고수의 검기나 검강에는 버틸 수 없겠지만, 어지간한 검신 정도는 튕겨낼 수 있는 신체가 된다는 뜻이다.
다만 전대 가주가 강령신공을 완전히 전수해주기 전에 죽어 버리는 바람에 언양걸은 강령신공을 대성할 수 없었다.
이는 언양걸 평생의 한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독학으로만 강령신공을 익히다 보니 발전이 더디고 더뎠다.
그리고 지금.
한 달간의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온 언양걸은 다시 한번 강령신공을 시험해보고자 했다.
이미 그의 팔뚝에는 깊고 얕은 자상이 한가득했다. 오늘처럼 강령신공을 시험하다가 생긴 상처였다.
“어서 쳐라앗!”
언양걸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언호량이 움찔거리고는 검을 들어 올렸다.
“으아아아! 아버지이잇!”
쉬이이이잇!
아들이 검을 치켜들고 제 아버지의 왼팔을 내려치는 묘한 상황.
수카아앙!
마침내 검신이 왼팔에 부딪치면서 금속성 같은 소리가 울린다.
동시에 언양걸이 어금니를 빠득 깨물었다.
찰나의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만 느껴진다.
언호량은 허공으로 튀어 오른 검신의 일부를 보았다.
촛불 빛을 받아 반짝이는 날붙이가 허공에서 한참이나 회전한다.
‘부러…… 졌다?’
검신이 부러졌다!
퍼뜩 정신이 든 언호량이 제 손에 들린 검신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가운데가 뚝 부러져 나가 있었다.
‘아버지는……?’
얼른 고개를 드니 아버지의 왼팔이 멀쩡하다.
눈물이 차올랐다.
“아, 아버지! 성공했습니다아아!”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나 언양걸은 묵묵부답이었다.
“끄음.”
침음을 흘린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왼팔을 보았다.
그 순간,
피츗!
가느다란 선혈이 그어지더니 왼팔에서 핏줄기가 튀어오른다.
‘제길…… 또 실패인가?’
누가 그의 속내를 들었다면 혀를 내둘렀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있는 힘껏 내리친 검신에 피를 약간 본 정도로 저런 박한 평가라니!
하나 그가 아는 한 강령신공을 대성한다면 이 정도론 상처조차 나지 않아야 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실패다.”
“예? 하지만 검신이 부러……!”
“네가 검기를 사용했느냐?”
“그건 아니지만…….”
“네가 초절정 고수라도 되느냐?”
“아닙니다.”
“네가 휘두른 검에도 피를 봤다면 말 다한 것이다. 명백한 실패다. 강령신공의 오의를 깨닫는 것이 이리도 힘들 줄이야.”
언양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보았다.
언호량도 입을 다문 채 아버지의 눈치만 살폈다.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시종 하나가 달려와 보고했다.
“가, 가주님. 밖으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너는 어찌 함부로 연무실에 들어오느냐!”
언호량이 짐짓 엄한 투로 다그쳤지만, 시종은 전혀 다른 걸 신경 쓰는 듯 밖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것이 지금 누가 가주님을 찾아왔는데…….”
“가주님을? 이 밤중에?”
“예, 어서 밖으로…….”
시종이 말을 마저 맺기도 전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느냐!”
“막아랏!”
“저놈 잡아!”
“거참, 급한 일이라니까 그러네!”
“닥쳐랏!”
언호량이 이맛살을 푹 구겼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오밤중에 감히 언 가장을 찾아온단 말인가? 그것도 저렇게 무례하게.
“내가 가마!”
언호량이 말을 뱉고 돌아서는데, 마침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섰다.
“뭐, 나올 것까진 없고.”
상대를 확인한 언호량이 눈을 크게 부릅뜨고는 끔뻑였다.
“너, 넌……?”
“오랜만이네. 눈은 좀 괜찮나?”
태연하게 말을 건네 오는 인간.
자신의 두 눈에 손가락을 쑤셔 박아서 자칫 실명할 뻔하게 만든 그 인간!
“남, 남궁천……!”
언호량이 더듬거리며 말하자, 뒤에 앉아 있던 언양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남궁천이라고? 그 강호신룡?
그가 고개를 돌리고 관심을 보였다.
“저 아이가 남궁천이라고 했느냐?”
“아, 아버지…….”
언호량이 얼른 옆으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은 연무실을 한 번 둘러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뭔가 살벌한 연무실이네요. 피까지 줄줄 흘리시고. 그 팔 괜찮으세요? 무지 아파 보이는데.”
언양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건…… 미친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