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내 이럴 줄 알았다
‘신호탄!’
혈검추혼이 흠칫거리고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흑도인들을 에워싸면서 시뻘건 불길이 화르륵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화륵, 화르륵! 화르르륵!
순식간에 숲을 둘러싸며 화마가 일어나자 흑도인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동시에 벽력같은 함성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우와아아아아!”
“사파 나부랭이들을 궤멸시켜라!”
“맹의 힘을 보여주어라!”
우렁찬 고함에 이어 한 무리의 무인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두두두두두……!
땅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진동!
부스스스스!
시뻘건 화마가 일어난 곳 바로 앞에서 수풀과 나뭇가지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마구 흔들린다.
“이 무슨……!”
혈검추혼이 흔들리는 눈으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벽라검을 어깨에 척 걸쳤다.
“이봐요, 아저씨. 아무렴 내가 믿는 구석도 없이 혼자 나타나서 똥배짱 부렸을까? 무림맹이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고. 총군사는 뭐 당신들한테 속으라고 있는 자리인 줄 아시나?”
“맹의 지원을 끌고 온 것인가?”
“후후. 괜히 수다나 떨면서 시간을 끌었겠어? 다 지금을 위해서였지.”
이쯤 되자 흑도인들도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혈검추혼이 날카롭게 외쳤다.
“동요할 필요 없다! 베어야 할 적의 머리가 늘어났을 뿐! 너희들의 힘을 보여주어라!”
“복……!”
“에이, 어차피 너희들은 다 죽을 거예요. 안 보여? 저 어마어마한 불길이. 만만하게 싸울 상황에서 저런 불을 피웠을까? 아니지. 아예 궤멸시키기로 작정을 했으니 불길에 가둬 둔 거지. 설마 정말로 무림맹이 모든 병력을 운남에 투입했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우리 총군사가 그 정도로 똥멍청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남궁천의 말이 계속 이어지자 흑도인들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져간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자기네 군사를 ‘똥멍청이’라고까지 표현할까?
‘정말 맹에서 지원을 보낸 건가?’
혈검추혼의 표정이 팍 일그러진다.
상황이 반전되자 팽적호가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도를 콱 움켜쥐었다.
“역시 그랬군! 하하하! 그럼 그렇지! 다들 들어라! 맹에서 지원군을 보냈다! 이제 피의 복수를 시작할 시간이다! 가라앗!”
“존명!”
“우와아아아!”
사기가 오른 팽가 무인들이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에 남궁천도 얼른 외쳤다.
“달아나는 놈이 없도록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그 목소리를 들은 혈검추혼이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그야말로 다 잡은 물고기 떼였다.
하북에서 팽가를 삼키면 나머지는 급할 것도 없었다. 팽가의 완전한 몰락은 하북 평정이나 마찬가지로 봤다.
한데 저 한 놈 때문에 팽가를 삼킬 수 없게 되다니.
“이여업!”
마침 팽가 무인 하나가 겁 없이 혈검추혼에게 달려든다. 혈검추혼이 신경질적으로 검을 베어 올렸다.
촤아아악!
“커윽!”
비명을 내지른 무인은 가슴이 갈라진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혈검추혼이 냉랭한 눈길로 남궁천을 노려보며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따금씩 그를 가로막는 무인이 나타나면 가차 없이 베어 버렸다.
촤악! 촤아악!
이내 핏물을 뒤집어쓴 그가 남궁천 앞에 우뚝 섰다.
그는 귀신도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어휴, 꼴이 말이 아니네요.”
“진천랑의 아들.”
“아버지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을 만나다니. 감개무량입니다.”
남궁천이 해맑게 웃는다.
혈검추혼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 비명이 어우러져 아수라장이 됐다. 숲에서 달려 나온 적들의 머릿수가 이미 상당한데, 저만치 뒤에서는 아직도 많은 인력이 남았는지 연신 수풀이 흔들리고 요란한 함성이 이어진다.
이래서는 안 됐다.
팽가는 이곳에서 멸문당했어야 했다.
그걸…….
“네놈이 다 망쳐놨군.”
“칭찬 감사합니다.”
“맹랑한. 죽기 전에 남길 말은?”
“제가 말이 많은 편이라 이틀 밤은 새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 저승에서 말하도록.”
“죽기 전에 남길 말이라더니.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 하시네.”
남궁천의 실없는 소리에도 혈검추혼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들었다.
남궁천이 피식 웃는다.
‘웃어……?’
혈검추혼이 눈매를 꿈틀하는 찰나, 남궁천의 입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추혼.”
“……!”
순간 혈검추혼은 온몸이 그대로 경직된 것처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이 기분……!’
그래,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다.
오래전 천하대살성을 이겨보겠다면서 진천랑을 찾아갔을 때 느낀 그 기분!
무려 세 번이나 찾아갔다가 세 번 전부 패배했던 상대, 진천랑!
진천랑은 늘 자신의 별호를 뒤에 두 글자만 따로 불렀다.
지금 남궁천처럼.
남궁천이 여전히 입매를 비튼 채 말한다.
“비무를 즐기지만, 패할 것 같으면 꽁무니를 빼고 줄행랑을 치지. 그리고 뻔뻔하게 다시 나타나서 비무를 신청하고. 그렇게 이길 때까지 싸운다고 해서 붙은 별호, 혈검추혼.”
“……!”
혈검추혼의 눈자위가 꿈틀거린다.
이 어린놈이 어째서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는 거지?
“그 검에 피를 묻힐 때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남자. 너란 놈은 그렇게 비열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지.”
“이…… 어린 새끼가……!”
“어때? 오늘도 싸우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달아날 건가? 당연히 그래야겠지. 지금으로서는 가망이 없으니까.”
남궁천이 눈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마침 화마가 있는 곳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청랑단의 무서움을 보여주어라!”
“우와아아아아!”
혈검추혼의 미간이 팍 일그러진다.
하필이면 청랑단이라니.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물러설 때 물러설지언정 네놈만은 죽이고 가마.”
“그럴 수 있을까?”
“죽음으로 깨달아라.”
타앗!
혈검추혼이 바닥을 차며 달려든다.
남궁천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혈검추혼을 지켜보았다.
‘쯧…… 달아날 때마다 귀찮아서 쫓지 않았더니…….’
자신 역시 도망자 신세였기에 굳이 달아나는 흑도 녀석을 귀찮게 뒤쫓진 않았다.
그렇게 세 번이나 놓아줬더니 은인을 몰라보고 또 달려들어?
“추혼, 너무 건방지잖아.”
“닥쳐랏!”
쒸아아앙!
핏빛 혈검이 남궁천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린다.
‘끝이군.’
혈검추혼은 확신했다.
자신의 검신이 남궁천의 머리를 절반으로 갈라놓으리라는 것을.
그런데,
스슷!
순간 남궁천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쫘악 끼쳐온다.
전생에 진천랑에게 당했던 그 방식 그대로가 아닌가?
퍼뜩 고개를 들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 보 정도 밖으로 물러난 남궁천이 살벌한 미소를 짓는다.
“건방지다고.”
쉬이이익! 쩌어어엉!
“크으윽!”
촤르르르르륵!
혈검추혼이 그대로 튕겨 나가면서 한참이나 미끄러졌다. 손이 저릿저릿 울리고 어깨가 욱신거린다.
충격보다도 놀란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진천랑에게서 느꼈던 죽음의 공포를 그 아들에게서 느끼게 될 줄이야!
‘저 녀석은…… 괴물인가?’
어찌 저 나이에?
하나 생각을 깊게 할 겨를이 없다.
마침 옆구리 쪽에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기에.
‘측면!’
쒸아아아아앙!
그가 몸을 비트는 것과 동시에 시퍼런 도기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피츗!
옆구리가 얕게 베이면서 피가 튀었다.
펄럭!
상의가 찢어지면서 펄럭인다.
마침 남궁천 앞을 가로막으며 태도를 척 내민 상대는 바로 팽수혁.
“저 녀석은 아무도 못 죽여, 아저씨. 왜냐하면 우리 집 원수의 자식이거든. 죽여도 내가 죽여.”
“뭔 개소리를…….”
“개소리는 아까부터 그쪽이 하시던데?”
이번엔 좌측에서 윤종승이 기도를 끌어 올리며 기수식을 취한다.
빙빙빙-
후방에서는 어느새 진소홍이 다가와 유성추를 잡아 돌리고 있고, 우측에서는 유현이 검을 앞세운다.
졸지에 생도들에게 포위된 상황.
혈검추혼이 픽 실소를 머금었다.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인 모양이군.”
“그건 이쪽에서 할 말입니다. 다섯 명에게 둘러싸였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다니. 우리가 어지간히도 우스운가 보군요.”
유현이 예를 차리며 전한 말이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문답무용이다!”
탓!
말을 마친 혈검추혼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종승!”
팽수혁이 버럭 소리쳤다.
윤종승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으아아! 왜 하필 나야!”
쉬이이익! 휘청!
“응?”
윤종승이 혈검추혼의 신형을 때렸지만 주먹에 감각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내 혈검추혼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더니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떨어진다.
“가라, 애송이.”
“헉!”
쉬이이익!
사선으로 떨어지는 검신!
“어딜!”
따앙!
전광석화처럼 날아든 유성추가 혈검추혼의 검을 튕겨냈다.
혈검추혼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사이 이번에는 유현의 검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쉬이잇! 빙글.
‘매화?’
검봉이 현묘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순간 노을빛 매화 한 송이를 피워내는 것이 아닌가?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매화 한 송이가 검 끝에서 파생되더니 이내 두 송이, 세 송이가 만들어진다.
혈검추혼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어째서 견습생 주제에 이 정도 경지까지……!’
화산파에서도 매화를 피워내는 경지라면 일대 제자는 되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한데 이제 약관에 다다른 견습생이 매화를 피워내다니.
하나 혈검추혼 역시 강호에서 별호를 떨친 고수.
따다다앙!
그가 재빨리 검신을 휘둘러 매화를 박살 냈다.
그런데 이번엔 산산조각 난 매화 사이로 시커먼 태도가 세상을 쪼갤 듯 떨어져 내린다.
슈우우우웃!
“크읏!”
신음을 삼킨 혈검추혼이 바닥을 차고 얼른 물러나자, 팽수혁이 태도로 땅을 내려찍었다.
콰아아앙!
따다다당!
튀어 오른 파편을 다시 한번 쳐내는 혈검추혼.
삐이이잉!
다시 날아드는 유성추!
휙! 파라라라!
몸을 뒤집는 것과 동시에 땅을 차고는 물러났다.
“이여어업!”
다시 윤종승이 기합성을 싣고 일장을 내질렀다.
‘제길, 어린 새끼들이!’
혈검추혼이 반사적으로 왼손을 뻗어냈다.
꽈아아아앙!
촤르르르륵!
“끄으으읍!”
윤종승이 어깨를 쥐면서 신음을 터뜨렸다.
혈검추혼 역시 서너 걸음이나 밀려난 채로 심호흡을 했다.
‘이놈들……!’
일장을 받아친 왼팔이 욱신거린다.
견습생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고전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합격술을 미리 짠 것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서로의 무공에 대해 이해가 깊다는 뜻이다.
주변을 힐끔 살펴보니 저만치 팽적호가 마침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제길.’
팽적호까지 합류하면 위험하다.
게다가 저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남궁천도 문제다.
‘조금 전의 그 움직임은……!’
제 아비와 꼭 닮지 않았던가?
진천랑을 상대할 때의 공포심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려고 한다.
‘한낱 견습생 따위에게!’
지금으로서는 궤멸 상태에 몰린 수하들도 문제다.
“칫, 어쩔 수 없나?”
우선은 물러날 수밖에.
그 순간 남궁천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추혼. 또 도망치려고? 한심한 겁쟁이 새끼. 자존심도 없냐?”
으으, 저 말투!
어쩌면 저리도 제 아비하고 꼭 닮은 건지!
혈검추혼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남궁천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