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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공검제-208화 (207/508)

208. 내 이럴 줄 알았다

팽수혁이 다시 한번 눈을 끔뻑였다.

“진짜 너야?”

“그럼 진짜 나지. 가짜 나도 있어?”

남궁천이 실없는 소리를 하며 터벅터벅 걸어온다.

그 뒤를 따르는 유현과 윤종승, 그리고 진소홍.

아니, 쟤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그보다 지금 저기 숲을 등지고 쫙 깔린 흑도인들은 안 보이나?

황당하기는 흑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혈검추혼이 눈썹을 구기고는 남궁천 일행을 빤히 응시했다.

‘뭐지? 미친놈인가?’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낡은 사당 앞에는 투기와 살기가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중이다.

한데 그 복판을 태연하게 지나가면서 팽가 녀석에게 말을 건네지 않나?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행동이 가능할까?

아니, 미쳤더라도 불가능할 텐데.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살기를 맞으면 본능적으로 제 한 목숨 지키려고 움츠러들게 마련이니까.

‘좀 과하게 미친놈인가?’

너무 어이가 없으니 호기심이 동해서 지켜만 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 팽적호는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팽수혁을 돌아보았다.

“아는 자더냐?”

“예? 아, 예. 견습생 동기입니다.”

“견습생 동기?”

팽적호의 질문에 팽수혁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천의 정체를 알면 아버지가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할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자식을 어찌 반기겠는가?

팽적호가 미간을 구기며 재차 물었다.

“자세히 말해보아라. 저들이 어째서 여기까지 온 것이더냐?”

“거기까진 소자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쪽은 화산파 유현이고, 황산윤가의 윤종승, 그리고 진소홍 생도입니다.”

팽수혁이 자연스럽게 남궁천을 생략했지만, 팽적호의 시선은 남궁천에게 향해 있었다.

“그래, 기억나는군. 그럼 저쪽은?”

“으음…… 학관 동기입니다.”

그러자 듣고만 있던 남궁천이 불쑥 나섰다.

“아니, 왜 말을 못 해? 내가 바로 남궁천이다, 무연회 우승자이자 대 남궁세가 소가주이며 강호신룡인 그 남궁천이라고 왜 말 못 해? 늘 깊은 가르침을 주는 존경하는 동료라고 말을 해야지!”

아, 저 꼴통 새끼.

‘기껏 신경을 써 줘도…….’

팽수혁의 표정에 난감한 기색이 스친다.

한편 팽적호는 남궁천의 이름을 듣자마자 흠칫거리고는 눈빛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이제 기억나는군. 맞아, 자네가 남궁천이었지. 그새 체격이 제법 달라졌어.”

“예, 제가 바로 그 남궁천입니다. 팽 가주님을 뵙습니다.”

남궁천이 포권을 하고는 씨익 웃어 보인다. 그러자 함께 온 유현과 윤종승, 진소홍도 얼떨결에 포권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팽 가주님을 뵙습니다.”

팽적호가 손을 저었다.

“예를 차리며 인사를 나누기엔 상황이 썩 좋지 않군.”

팽적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남궁천이라.

무연회에서 본 기억이 난다.

대살성 진천랑의 유일한 혈육.

천하제일룡이었던 남궁선과 연분을 맺어 낳은 아들이라지.

무연회에 우승했고, 호구에서 학관 영웅으로 거듭난 인물. 심지어 견습 생활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한다고.

‘한 번쯤 제대로 보고 싶었는데 제 발로 나타나 주었군.’

하나 말했던 대로 상황이 좋지 않다.

마침 혈검추혼이 피식 웃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얘기 나눠도 좋소. 어차피 당신들이 이승에서 떠들 시간도 얼마 되지 않을 테니. 그 정도는 사정을 봐 드리지.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하시도록.”

명백한 비웃음이다.

그럼에도 남궁천은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감탄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이야, 역시 여유가 흘러넘치시는 분. 어디서 좀 배우신 분. 그야말로 멋지신 분. 감사합니다!”

“…….”

저건 바본가?

혈검추혼이 눈살을 슬쩍 구긴다.

반면 팽적호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견습생들을 보았다.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아들의 동료들을 만나다니.

자존심이 상한다.

특히나…….

‘저 녀석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전대 가주를 죽인 진천랑의 혈육이 아닌가?

원수의 자식을 앞에 두고 이런 처참한 꼴이라니.

‘수혁이를 통해서 정상이 아닌 녀석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미친놈일 줄은 몰랐군.’

어쨌거나 저 미친놈 때문인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벌었다.

그사이에 가신들이 대열을 정비하고 조금이라도 싸우기 좋은 형편을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전세를 역전시키기에는 이미 글러먹었지만.

‘그래도 수혁이만은 살린다!’

팽적호가 견습생들을 돌아보고는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여기엔 어찌 온 것인가?”

“맹에서 지원을 온 겁니다.”

남궁천의 대답에 팽적호가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지원? 자네들만?”

“예, 맹에서 저희들만 보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맹이 가끔 헛다리를 잘 짚잖아요. 다들 지금 운남으로 달려가서 인력이 모자라거든요.”

“그렇다고 자네들을 지원 인력이랍시고 보내다니. 어지간히 본 가가 우습게 보였나 보군!”

“에이, 좋게 생각하세요. 팽가라면 저희만 보내도 끄떡없을 거라고 믿은 걸 수도 있잖아요.”

이건 조롱인지, 위로인지…….

팽적호가 이내 냉소를 지었다.

팽가를 믿어서?

그럴 리가.

자신이 무림맹을 모를까?

특히 현 무림맹을 이끄는 묵천악은 철저한 실리주의자다. 세력이 약해진 팽가를 오래전부터 차별대우한 걸 가주인 자신이 모를 리가 없다.

팽가를 믿어?

‘그게 아니라, 있으나 마나 한 것쯤으로 생각하겠지.’

단적인 예로 하북 분타주를 팽가 무인이 맡아오는 것조차 탐탁잖게 여기던 영감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이 강호신룡이라.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던가?

가문의 원수를 호부라 칭하고 싶진 않지만, 진천랑은 확실히 무서운 자였다.

무림맹이 수십 년간 악착같이 쫓아다닌 유일한 자였으니.

한데 그 아들이 강호신룡의 별호를 받았다니 새삼 놀랍긴 하다.

팽적호가 혈검추혼을 슬쩍 보고는 남궁천에게 말했다.

“자네가 대살성의 혈육이라는 걸 안다. 아쉽군. 이런 만남이 아니었다면 내 반드시 자네를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첫 만남이 좋지 않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아들 녀석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게.”

척!

팽적호가 대도를 앞세우고는 양손에 힘을 꽉 주었다.

‘수혁아, 너만은 살아야 한다!’

원수의 자식을 이렇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 못내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강호신룡의 별호를 믿고 아들을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탈출시키는 게 급선무다.

남궁천에게도 나쁠 게 없는 제안이리라. 괜히 개죽음을 당하느니 최대한 빨리 여길 벗어나서 살아남는 것이 훨씬 좋은…….

“싫은데요.”

“그래, 응? 뭐라?”

“싫다고요.”

“아니, 왜?”

“지원을 온 거지. 탈출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요.”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살길을 열어준다는데도 싫다니?

진짜 완전히 미친놈인가?

‘네놈이야 살든 죽든 알 바 아니지만, 그러면 내 아들마저 죽는단 말이다!’

마침 남궁천이 손가락으로 팽수혁을 척 가리킨다.

“저 멧돼지 같은 놈이 가잔다고 갈 놈이 아니잖아요? 저 새끼, 말 더럽게 안 들어 처먹는다고요.”

내 새끼지, 네 새끼가 아니야!

“말귀를 못 알아듣는가! 지금 상황을 보고도……!”

“됐고. 절 설득하시기 전에 저 멧돼지부터 설득하시든가, 그럼.”

아니, 아까부터 자꾸 남의 아들을 멧돼지라니!

어이가 없는 와중에 팽수혁이 성큼 나서더니 고집을 부렸다.

“저 녀석 말이 맞습니다. 저는 안 갑니다, 아버지.”

“혁아!”

“아버지! 어찌 저 혼자 살라고 하십니까? 아버지를 사지에 버려두고 가면 제가 평생 짊어져야 할 마음의 짐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멍청한 녀석! 마음의 짐은 누구나 지고 사는 거다! 그게 살아가는 자의 인생이다! 잔말 말고 가라! 가서 네 숙부를 찾아!”

“안 갑니다! 못 갑니다!”

“이놈……!”

그때 남궁천이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불쑥 나섰다.

“숙부라면 혹시 하북 분타주? 그럼 이미 여기 오셨는데…….”

“뭐라? 어디?”

팽적호가 흠칫거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혹시 분타에서 지원 인력을 함께 보내준 것인가?’

그렇다면 살 수 있다!

일말의 희망이 싹트자 갑자기 기운이 솟는다.

그래, 그럼 그렇지.

어쩐지 어린 생도 녀석이 살기등등한 상황 속에서 기 죽지 않고 떠들더라니.

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리라.

“분타주는 어디에 있나?”

“여기예요.”

남궁천이 지고 있던 목함을 내려두더니 덮개를 열었다.

그 순간 팽적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진, 진악아!”

팽적호가 비틀거리자, 팽수혁이 얼른 달려와 부축했다.

“아버지!”

“진악…… 진악아!”

팽적호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목함 안에 든 팽진악의 머리를 꺼내 들었다.

“헉!”

그제야 팽수혁도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숙, 숙부님……!”

이쯤 되자 상황을 관망하기만 하던 혈검추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눈살을 잔뜩 구기고는 팽진악의 머리를 보았다.

‘저게 어째서 저 녀석에게……?’

그가 옆에 선 수하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저 수급이 정말 분타주의 것이냐?”

“그런 것 같습니다.”

“어째서 분타주의 수급이 저 녀석에게 있는 것이야!”

“속하도 거기까진…….”

수하가 말꼬리를 흐리는 사이, 팽적호에게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진노가 향한 곳은 남궁천이었다.

“노오오오옴!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그로서는 갑자기 나타난 원수의 아들이 동생의 머리를 내밀었으니 자연히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칼날이 목젖까지 다다른 남궁천이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분타주님은 저 흑도인들에게 당한 거고, 저는 흑도인들에게서 이 목함을 가로챈 것일 뿐이라서요.”

남궁천의 해명에도 팽적호는 잠시 핏발 선 눈으로 경계를 풀지 않았다.

결국 팽수혁이 나서고 나서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아버지, 천이의 말이 맞을 겁니다. 이상한 녀석이긴 해도 적아를 가릴 줄은 아는 녀석이에요.”

“으으…… 진악이…….”

팽적호도 그제야 경계를 풀면서 비틀비틀 물러났다.

팽수혁도 가까스로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저 미친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황과 분위기 좀 파악해야지. 다짜고짜 숙부님 머리를……!’

그때였다.

흑도인들 사이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제 수다는 다 떠셨소?”

지금껏 지켜만 보던 혈검추혼이 묵직한 음성을 던졌다.

남궁천이 돌아서서 고개를 저었다.

“시간 넉넉하게 준다더니. 생각보다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네. 성격이 급해.”

“…….”

‘미친놈이 확실하군.’

혈검추혼이 속내를 삼키고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여담은 저승에서도 나누면 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보다 그 수급이 어디서 난 건가?”

“정정현에서 그쪽 한 명의 머리와 바꿨지.”

“바꿔……?”

“뭐, 그렇게 됐어. 지금쯤 그쪽 머리도 아마 배달이 됐을 거야. 우리가 생각보다 조금 늦었으니까.”

“배달이라면 누구에게?”

“흑무곡주 류난.”

“……!”

혈검추혼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너 정체가 뭐냐?”

“아까 들었을 텐데. 대 남궁세가 소가주이자…….”

“네가 정말 진천랑의 아들이냐?”

“그래.”

혈검추혼이 입매를 말아 올리고는 혀로 입술을 슬쩍 핥았다.

“그렇군. 대살성의 아들이 오늘 내 손에 죽는구나.”

“그 전에 내가 전해줄 물건이 있는데. 저기 빼앗은 봇짐에 좋은 게 들었더라고.”

“……?”

혈검추혼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남궁천을 응시했다.

이번엔 또 뭘 꺼낼지 모두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남궁천이 봇짐으로 걸어가서 손을 넣으며 말한다.

“궁금해? 궁금하면 오백 냥.”

“…….”

“농담이고. 아, 찾았다!”

순간 남궁천이 봇짐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하늘로 재빨리 던져 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것을 따라 위로 올라가는 순간,

삐이이익, 파앙!

신호탄이 폭죽처럼 터지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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