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07화 (206/508)

207. 내 이럴 줄 알았다.

무영삼도가 흠칫거리고는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강호 초출인 견습생이 자신들을 알아보았다.

단순히 만곡도와 세 명이라는 것만 보고선.

굳이 좋게 생각하면 자신들의 명성이 그만큼 알려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강호 초출인 견습생들이 알 정도는 아닐 텐데…….’

일도는 자신들의 위치를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흑도 무리들 사이에서는 조금 알려졌을지도 모르지만, 백도 무인들은 자신들을 모르는 이가 많다.

하물며 이런 애송이라면 더욱.

일도가 스산한 목소리를 흘렸다.

“우리를 아느냐?”

“그럼. 알지. 네가 맏형 일도잖아.”

“……!”

“거기가 이도, 너는 삼도.”

무영삼도가 저마다 흠칫거리고는 서로를 보았다.

일도가 입매를 희미하게 비틀었다.

“아무래도 살려둬서는 안 될 아이구나.”

“물건 좀 보자는데 살기를 떨치네. 이거 아주 나쁜 새끼들일세.”

남궁천의 전신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일도가 흠칫거리고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무슨 애새끼한테서 이런 살기가……!’

정말이지 등골이 오싹해진다.

약관에 다다른 생도가 뿌려대는 살기라기에는 지나치게 그 농도가 짙은 느낌이다.

마치 시체가 나뒹구는 전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 같다고나 할까?

“이 건방진……! 쳐!”

파바밧!

순간 무영삼도가 일제히 바닥을 차며 날아갔다.

“우와아악!”

윤종승이 비명인지 기합성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대며 이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유현은 조용히 검을 휘둘러 일도의 심장을 노렸다.

진소홍은 유성추를 뿌려 삼도의 얼굴을 공격했다.

퍼엉!

까앙!

티잉!

일도와 이도, 삼도가 튕기듯 물러난다.

동시에 반응했던 견습생들도 뒷걸음을 치며 멀어졌다.

아직까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남궁천이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윤종승만 세 걸음. 저 녀석에게 상청단이라도 하나 줘야 하나?’

어린 녀석의 저런 꼴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는 남궁천이었다.

‘정말 이러다 거지 될라.’

하나 이렇듯 함께 싸우는 일이 많아진다면 윤종승을 쓸 만한 놈으로 키워서 나쁠 건 없으리라.

남궁천이 생각에 잠긴 사이 윤종승이 손가락을 들어 남궁천을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저, 저……! 사고는 혼자 쳐놓고 뒷짐 지고 구경하는 것 좀 보소! 에라이! 이 상황 어쩔 거야! 이러다 다 죽겠다, 다 죽겠어!”

고래고래 소리치는 윤종승을 보며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아직은 시기상조다.

저 녀석에게 상청단을 복용할 자격이 있는지는 더 두고 볼일이다.

어쨌거나 유현과 진소홍은 눈에 띄게 공력이 늘어났다.

특히 대환단을 복용한 진소홍은 조금 전 유성추를 날려 삼도를 세 걸음이나 물러나게 만들었다.

한편 무영삼도는 두 눈을 찢을 듯 부릅떴다.

‘뭔 놈의 견습생 수준이……!’

자신의 예상을 훨씬 상회한다.

물론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본 남궁천은 예사롭지 않다고 여겼다.

해서 딱히 방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급작스러운 기습을 통해서 놈의 목을 일격에 날릴 생각에만 집중했다.

한데 놈은 움직이지도 않았고, 다른 견습생들이 나섰다.

반면 남궁천은 태연히 구경만 했다.

마치 이런 결과를 예상이나 했다는 것처럼.

일도가 아우들에게 말했다.

“방심하지 마라. 보통 녀석들이 아니다.”

“예, 형님.”

무영삼도가 저마다 기도를 끌어 올렸다.

견습생들도 저마다 무기를 꽉 움켜쥐고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긴장하지만 두려워하진 않는다.’

요즘 견습생들은 다 이런가?

무림맹이 많이 썩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도 무너지지 않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일까?

일단 삼도가 저 여자아이와 권법 쓰는 녀석을 상대로 조금 버텨주고, 이도가 화산파 아이를 상대한다면…….

‘남궁천이라는 녀석은 내가 어떻게든……! 응?’

그렇게 다짐을 하는데 남궁천이 태연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게 아닌가?

너무 편안한 표정이어서 절로 긴장이 풀어진다.

‘뭐지? 물어볼 게 있나?’

마침내 지척에 다다른 남궁천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너무 느리게 진행되니 방어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마치 미세한 변화가 계속되면 눈에 익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듯.

지금 남궁천이 딱 그렇다.

무영삼도는 물론 견습생들도 그저 멍하니 남궁천이 하는 행동을 지켜만 보았다.

그렇게 벽라검이 일도의 목 언저리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뒤늦게 일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적의 검이 목 언저리에 다다를 때까지 넋을 놓고 있다니?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나?

그렇게 재빨리 반응하려는 찰나!

서걱.

한 줄기 빛이 일도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툭, 데굴데굴……!

머리통이 떨어지고 잘린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츄아아아아!

그제야 이도와 삼도가 두 눈을 부릅뜨고 경악했다. 지켜보던 견습생들도 마찬가지!

“헉!”

“갑자기!”

하지만 갑자기는 아니다.

남궁천은 살기를 철저하게 감추었을 뿐, 위험 신호는 진즉 있지 않았나?

“노오옴!”

눈이 뒤집힌 이도가 만곡도를 휘두르며 남궁천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남궁천의 무심한 눈길이 그에게 향하는 순간,

푹!

어느새 벽라검이 이도의 심장을 뚫고 등 뒤로 튀어나왔다.

“끄…… 꺼억!”

그대로 눈을 까뒤집은 이도가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정적.

삼도는 물론 견습생들조차 숨소리마저 죽였다.

늦은 밤이었기에 거리는 조용했다.

무심코 객잔 밖으로 나오던 손님 하나가 기겁을 하며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어, 어떻게 한 거야?”

윤종승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묘하다.

두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남궁천이 뭘 어떻게 한 건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라니.

남궁천이 벽라검을 들고선 중얼거린다.

“호오, 이게 되네.”

남궁천은 방금 배수(소매치기)의 수법과 백무극의 환술을 섞어보았다.

전생에 하오문에 잠시 몸을 의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배수로부터 소매치기하는 법을 잠깐 배운 적이 있었다.

일반 배수라면 그저 기척을 죽이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하오문에 속한 배수들 중에는 내공심법을 소매치기에 이용하는 고수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로 무인들을 상대로 물건을 훔쳤는데, 이때의 내공 운기가 도망자로서 생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바로 그 운기법에다 백무극의 환술을 융합하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확실히 이럴 때 보면 배수의 운공이 살수보다 더 은밀하다니까.’

살수는 기척을 숨기는 것에서 그치지만, 배수는 기척을 속인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가서 은밀하게 필요한 물건을 탈취하는 방식이다.

단지 죽이기만 하면 끝인 살수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은밀해야 하는 이유다.

한편 일도와 이도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자, 삼도는 입을 딱 벌린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스윽.

남궁천의 시선이 삼도에게 향했다.

삼도가 든 만곡도가 달달 떨렸다.

이젠 더 이상 견습생으로 보이지 않는다.

피에 굶주린 사신이 눈앞에 있는 것만 같다.

사람 눈이 어찌 저리도 무정할 수가 있나?

본능이 경고를 한다.

저놈은 건드리지 말라고.

주춤!

삼도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자 남궁천이 허리를 숙이더니 바닥에 떨어진 일도의 머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헛!”

삼도가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남궁천이 입매를 천천히 비틀며 묻는다.

“이제 좀 보여줄 마음이 생겼나?”

“무슨…….”

“그 물건 말이야. 대가는 줄게.”

남궁천이 일도의 머리를 불쑥 내밀더니 말을 이었다.

“바꾸자.”

삼도의 표정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었다.

‘이 새끼, 역시 다 알고 있어!’

남궁천의 손에 매달린 채로 흔들리는 일도의 얼굴을 보며 삼도가 이를 뿌득 갈았다.

여기서 녀석의 제안을 거절하면 분명 살아서 벗어나진 못하리라.

결국 그가 마지못해 대꾸했다.

“알겠다.”

삼도가 등에 멘 봇짐을 내려두고는 일도의 수급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술 한 잔 기울이던 일도의 머리가 자기 손에 들려 있다는 것이 영 실감 나지 않았다.

남궁천이 봇짐을 가져가며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같이 들어가서 잠깐 얘기만 더 나눌까?”

* * *

빛줄기가 허공을 가르자 피가 튀어 오른다.

“크악!”

비명이 그 뒤를 따른다.

계곡을 따라 달려가는 한 무리의 무인들. 저마다 베이고 찔린 상처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 뒤를 바짝 쫓는 흑의인들.

“달려라! 이 길로 곧장 내려가면 사당이 나온다! 그곳에서 버틴다!”

“존명!”

명을 내린 팽적호는 어금니를 꽉 씹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혈검추혼(血劍追魂)! 저놈이 본 가를…….”

혈검추혼.

흑도인들 사이에서도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무림공적으로도 이름을 올린 자.

한데 삼사 년 전부터 그의 행적은 묘연해졌다.

그런데 지금 흑도인들을 이끌고 팽가를 칠 줄이야.

하북팽가주 팽적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혈검추혼이 이끌고 온 흑의인들에 의해 장원이 점령당했고, 부득불 가신들을 이끌고 도주 중이었다.

살면서 이런 치욕이 있었던가?

그나마 식솔들을 미리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기에 망정이지. 자칫 멸문지화를 입을 뻔하지 않았나?

그 오래전 대살성 진천랑에게 팽 가주가 죽었을 때보다 더 큰 타격이다.

흑도인들의 칼질에 당한 가신들을 챙길 여유조차 없는 상황이다. 그 자신도 왼쪽 어깨에 깊은 자상을 입고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계곡 하류에 다다른 팽적호가 비탈진 길을 따라 올라가자, 마침 목적지인 낡은 사당이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사당이지만, 그래도 저곳에서 대열을 정비하고 방어하며 싸우는 게 훨씬 수월할 것이다.

힐끔 돌아보니 흑도인들이 새카맣게 몰려들고 있다.

‘징글징글한 것들!’

머릿수는 아군의 세 배가 넘어 보인다.

이젠 더 이상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살아남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마침 먼저 도착했던 팽수혁이 태도를 앞세우고는 소리쳤다.

“아버지! 여기서 제가 막아보겠습니다!”

“무슨 소리! 너야말로 뒤로 빠져라!”

팽적호가 소리치자, 다른 정예 가신들도 일제히 멈춰 서면서 칼을 뽑아 들었다.

“가주님!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팽적호가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칼을 고쳐 잡았다.

어쩌다 팽가가 이렇게까지 약해졌던가?

저깟 흑도인들을 막아내지 못해 장원마저 버리고 달아나는 신세가 되다니!

‘진악이는 무사할까?’

그의 동생 팽진악은 하북 분타주로 머물고 있었다.

하나 흑도 세력이 팽 가장을 친 걸 보면 분타도 무사하진 못하리라.

‘어찌 됐건 목숨만은 부지해야 할 텐데.’

마침 흑도인들도 사당 앞으로 속속 도착했다. 이내 시커먼 죽음의 그림자들이 사당을 빼곡하게 에워쌌다.

그 사이로 혈검추혼이 느긋한 표정으로 걸어온다.

실뱀처럼 가느다란 눈매에 얇게 핀 냉소.

사신이 다가오는 듯 싸늘한 감각.

꿀꺽!

팽적호가 칼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마른침을 삼켰다.

혈검추혼이 나른한 목소리를 흘린다.

“가장까지 버리고 달아나다니. 모양이 너무 빠지지 않소? 가주.”

“닥쳐라.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 법. 장원은 언제든 다시 찾으면 될 일이고, 네놈들에게는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팽가가 군자 타령을 할 줄이야.”

혈검추혼이 피식 웃자, 두 사람 사이로 싸늘한 밤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

마침내 혈검추혼이 입을 막 열려는 순간이었다.

“봐! 내 말이 맞잖아! 웬 시커먼 것들이 여기로 우르르 달려가더라니까.”

불쑥 들려온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소리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을 본 팽수혁이 입을 딱 벌렸다.

“너, 너……! 네가 왜 여기에?”

“오랜만…… 은 아니고. 또 보네, 팽수혁.”

남궁천이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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