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내 이럴 줄 알았다
봇짐을 지고 가던 사내가 멈칫거렸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동작 그만이라고.”
남궁천이 다시 입을 열자, 그제야 목함을 짊어진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저 말씀인지요?”
“그래, 너.”
남궁천이 빙긋 웃으면서 대꾸한다.
사내는 재빠르게 남궁천과 일행의 행색을 살폈다.
행색을 보아하니 무인.
사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왜 부르시는지요? 공자님.”
“그게 뭐야?”
남궁천이 벽라검으로 봇짐을 척 가리켰다.
사내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좌판을 열어 팔 물건들입니다만.”
“보부상이야?”
“예.”
“물건 좀 볼 수 있을까?”
“지금요?”
“응.”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어렵습니다요. 내일 아침 저잣거리로 오시면 필요한 물건을 싼값에 드리겠습니다.”
“내가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고? 그걸 보려는 거니까 물건 좀 보자고.”
남궁천이 막무가내로 나오자 다른 견습생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윤종승이 조심스레 나섰다.
“오밤중에 무슨 물건을 보려고 그래?”
“내가 원래 좌판 구경하는 걸 좋아하거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왜 갑자기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그래?”
“남궁 소협, 혹시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괜찮습니다.”
유현도 넌지시 나섰다.
어깨를 부딪치고 나서 사과를 받지 않는 모습에 화가 난 건가 싶어서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남궁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 때문이 아니야.”
“그럼 왜 이렇게 고집을……!”
윤종승이 다시 다그치는데 이번엔 진소홍이 오히려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그녀는 가만히 남궁천을 응시했다.
지금 남궁천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없다.
그녀가 아는 한 남궁천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강짜를 부릴 사람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도 실리를 챙기는 모습을 종종 보이지 않던가?
‘그래, 마단곡도 그랬으니까.’
며칠 전 그녀는 남궁천이 건네주는 대환단을 받으면서 광서성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남궁천이 선뜻 내미는 대환단이 아니었다면 그 말을 절대 믿지 못했으리라.
당시 진소홍은 대환단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주는 거야?”
“금왕의 명패를 받았잖아. 상인이 자기 돈을 맡긴다는 것은 명운을 통째로 걸었다는 뜻이겠지. 그 정도의 신뢰라면 나도 그만한 믿음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믿어도 된다는 믿음.
남궁천은 그걸 보여주려는 것이었으리라.
어쨌거나 그 덕에 진소홍은 대환단을 복용했고, 남궁천이 그녀의 운기조식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로 인해 공력이 크게 늘어난 상태.
그런 남궁천이다.
광서성에서 삼봉파를 자극하고, 수레바퀴까지 부숴가면서 시간을 끄는 행동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뭔가가 있을 거야.’
자신으로서는 짐작조차 안 가지만.
마침 객잔에서 두 명의 보부상이 걸어 나왔다.
그중 콧수염이 수북한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응? 자네, 무슨 일인가?”
“글쎄, 여기 공자께서 갑자기 좌판을 구경하고 싶다는구먼.”
“좌판을?”
콧수염이 미간을 슬쩍 좁히더니 남궁천을 힐끔 보았다.
‘나이는 어린 것으로 보이는데, 네 명 다 무공을 익힌 모양이군.’
짧은 시간에 상대를 파악한 콧수염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넨다.
“아이고, 공자님. 그럼 제 걸 한 번 보시겠습니까? 사실 이 사람보다 제가 가진 물건이 훨씬 좋은 게 많습지요.”
“어허, 자네 무슨 말을……!”
유현과 어깨를 부딪쳤던 보부상이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지만 콧수염이 개의치 않고 봇짐을 어깨에서 내렸다.
그가 막 짐 보따리를 풀려고 할 때였다.
“아니, 그럴 필요 없고. 난 이 사람 물건을 보고 싶어.”
멈칫.
순간 세 보부상의 동작이 움찔거렸다.
이쯤 되자 유현도 뭔가 심상찮은 것을 느끼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단지 눈치 없는 윤종승만 남궁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야, 왜 그래? 그냥 대충 넘어가지. 유현 도장이 괜찮다고 했잖아.”
윤종승의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보부상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아까 어깨를 부딪친 건 제가 부주의했던 탓입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넘어가 주십시오.”
“거참, 말귀를 못 알아먹네. 나는 지금 거기 있는 물건을 보고 싶다니까?”
“……!”
남궁천의 말에 다시 한번 보부상들의 표정이 경직됐다.
콧수염이 슬쩍 견습생들을 훑었다.
나이는 이제 막 약관이나 되었을까?
‘이 녀석이 뭘 알고 이러는 건가?’
콧수염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사실 그들은 흑무곡 무인들이었다.
무영삼도(無影三刀)라 불리는 그들은 곡주의 명에 따라 하북 분타주의 수급을 들고 무림맹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단순하다.
무한 저잣거리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북 분타주의 머리를 효시하는 것.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남궁천이 지목한 보부상의 봇짐에 든 것이 바로 하북 분타주의 머리였다.
다른 이들은 정말 보부상처럼 잡동사니를 지니고 있었다.
‘운이 나빴나? 하필 삼도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겨우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어린 녀석이 뭘 알고 이러는 것 같진 않다.
원래 무관 삼 개월짜리가 제일 무섭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강호 초출내기 생도들은 세상 겁 날 게 없을 때다.
괜히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도 걸고, 애먼 사람 겁도 주고 그러는 거지.
‘역시 무시하는 게 상책이겠지.’
“죄송합니다요, 공자님. 저희들이 지금 바빠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물건은 다음에…….”
“어딘데.”
“예?”
“어디냐고. 바쁘게 가야 할 곳.”
“음…… 그게 옆 마을에 가서…….”
“나보곤 내일 아침에 저잣거리로 오라더니?”
“아……?”
일도가 무심결에 삼도를 돌아보았다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예, 옆 마을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겁니다요. 지금은 급히 방문 예약이 있습지요.”
그러자 삼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와중에도 객잔에서 제일 늦게 나온 이도만이 팔짱을 낀 채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궁천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이도가 불쑥 나서서 남궁천의 어깨를 잡았다.
탁.
“어이.”
“응?”
남궁천이 돌아보자, 이도가 콧등을 씰룩이며 으르렁거렸다.
“바쁘다고 말했잖아. 물건을 사고 싶으면 내일 아침에 오라고. 너야말로 나이도 어린 녀석이 말귀 못 알아먹어?”
그러자 일도가 얼른 나서서 말렸다.
“어허, 자네 왜 이러나?”
“형님, 이런 놈들은 좋게 말해서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요. 확실하게 알아듣도록 해야지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유현과 진소홍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비상시를 대비했고, 윤종승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주춤 물러났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누군데? 말을 안 하니 알 수가 있나?”
이도가 턱을 치켜들고는 물러서지 않았다.
남궁천이 천천히 손을 들어 어깨를 잡은 이도의 손목을 잡았다.
“내가 바로…… 강호신룡 남궁천이다.”
“……!”
이번에는 세 사람도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움찔거렸다.
남궁천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가 피 냄새를 귀신처럼 알아채거든. 전생에 피 튀기는 전장만 누비고 다닌 건지, 이 피비린내만 맡으면 정신이 살짝 돌아.”
“무슨……?”
“그런데 너희들에게서 그 피비린내가 난단 말이지.”
“끄읍……!”
이도가 신음을 흘리면서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제야 일도가 얼른 물러나면서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천이 이도의 손목을 잡고는 아주 천천히 비틀지 않는가?
무서운 것은 그 속도가 일정하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이도를 힘으로 찍어 누른다는 뜻.
무영삼도 중에서도 이도의 근력이 가장 세다.
그럼에도 저리 아이 다루듯 한다는 것은…….
‘내가 고수인가?’
하필이면 강호신룡이라니?
무연회 우승자 남궁천에 대한 소문은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래 봐야 고만고만한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조금 뛰어난 수준일 테니 별로 귀담아듣진 않았다.
한데 이래서야…….
스윽.
일도와 이도가 천천히 손을 뒤로 돌려 봇짐 사이에 집어넣었다. 차갑게 식은 손잡이가 느껴진다.
그들의 주 무기인 만곡도다.
‘여차하면……!’
두 사람이 잔뜩 경계심을 끌어 올리는 사이 남궁천이 말을 이어갔다.
“특히 너.”
남궁천이 다른 한 손으로 삼도를 가리켰다.
“네가 가진 봇짐에서 피비린내가 유난히 진동해. 그래서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다고.”
“공자, 밤이 늦었으니…….”
“거기에 너희들은 너무 어정쩡해.”
“……?”
“무인을 두려워하든지, 아니면 뭣도 모르고 대거리를 하든지.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시비를 거는데 너무 침착하단 말이지. 마치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어른처럼.”
“이노오옴!”
순간 이도가 다른 한 손을 봇짐 사이에 넣더니 만곡도를 꺼내 휘둘렀다.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짧은 칼날이 남궁천의 목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쒸이이잉!
“아앗!”
“남궁천!”
윤종승과 진소홍이 동시에 소리쳤다.
천만다행히도 남궁천은 간발의 차이로 만곡도를 피한 상황.
“칫!”
혀를 찬 삼도가 성큼 물러나서는 꺾였던 손목을 어루만졌다.
차차아앙!
유현과 윤종승, 그리고 진소홍이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쯤 되자 일도와 이도도 만곡도를 뽑아 들고는 훌쩍 물러났다.
“이도! 무슨 짓이냐?”
“형님, 못 보셨소? 저놈은 이미 눈치챈 거요!”
이쯤 되자 삼도가 만곡도 칼날을 혀로 슬쩍 핥고는 말했다.
“차라리 잘된 겁니다. 형님, 저놈이 강호신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참에 저놈 모가지도 같이 가져가면 더 확실한 상징이 될 겁니다!”
“끄음.”
일도가 침음을 흘리고는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쉬울까?
그가 슬쩍 눈알을 굴려 이도의 손목에 남은 벌건 손자국을 보았다.
이도가 표현하진 않지만 저 정도로 손자국이 남았다면 지금쯤 손목이 시큰거릴 것이다.
‘방심할 수는 없는 녀석이다.’
한편 견습생들도 졸지에 무기를 꺼내 들고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보면 지금이야말로 실전이 아닌가?
이젠 지켜줄 교관조차 없다.
윤종승이 덜덜 떠는 손을 꾹 말아 쥐며 남궁천을 힐끔거렸다.
‘도대체 저 녀석은 왜 저런 것들만 건드리는 거야? 왜?’
반면 진소홍은 걱정보단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역시! 남궁천! 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은 했지만……!’
진소홍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남궁천이 옆에 있으면 묘하게 안심이 됐다.
마지막으로 유현은…….
“역시 사과를 받지 않았을 때 죽였어야 했나 봅니다.”
“…….”
“…….”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너 요즘 너무 나간다고!
남궁천이 벽라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스르르릉.
검신이 달빛을 받아 새파란 빛을 뿜는다.
“만곡도를 다루는 세 명의 보부상. 내 이럴 줄 알았다. 무영삼도 나부랭이들아.”
남궁천이 입매를 씨익 치켜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