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내 이럴 줄 알았다
“팽수혁에게 전해줄 물건?”
비량의 물음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북팽가는 지금 전시를 대비하느라 몹시 분주한 상황이야. 굳이 지금 가서 전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지금 전해야 해요. 전시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남궁천의 태연한 대답에 비량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은?”
남궁천 뒤에 선 유현과 윤종승, 그리고 진소홍이 애매한 웃음을 흘린다.
“우린 그냥 친구로서…… 하하.”
“친구?”
“사실 남궁 소협을 보면 배울 것이 많아 최대한 붙어 다니고 싶습니다.”
유현이 가장 먼저 이실직고하자 윤종승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마지막으로 진소홍이 남궁천을 한 번 힐끔 보고는 말했다.
“상인의 딸로서 느끼는 거지만, 남궁천은 투자할 가치가 있거든요. 저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까지.”
그러자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들으셨다시피 제가 데리고 온 녀석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혼자 가고 싶은데 자꾸 따라붙어서 탈이죠. 문제가 된다면 저만 보내셔도 됩니다.”
“안 돼요! 같이 보내주세요!”
다른 세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자 비량이 깍지 낀 손을 턱에 받치고 생각에 잠겼다.
“흐음. 너희들은 지금 맹의 모든 인력이 운남으로 집결하는 중인 걸 알고 있어?”
“압니다.”
“그래, 천뇌당에서는 흑도 세력이 운남에서 집결한 후 치고 올라올 거라고 보는 거지. 모든 정황이 그렇거든.”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만약 류난이 정말 나선 것이라면 천뇌당을 속일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했을 테니까.
게다가 하북팽가가 있는 북경에는 자금성이 있지 않은가?
관무불가침이라는 불문율이 있다지만, 어지간히 간이 크지 않고서는 천자가 있는 자금성 앞마당에서 칼부림을 하긴 어려울 거라는 게 천뇌당 판단이었을 거다.
그럴수록 더욱 남궁천의 확신은 하북으로 기울었다.
‘운남은 속임수다.’
그런데 뜻밖에도 비량의 입에서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운남은 속임수다.”
“……?”
“라는 것이 내 생각.”
“무슨 의미죠?”
“내 생각에는 하북에서 치고 내려올 것 같다는 거지.”
“왜요?”
“그냥 감.”
“감……?”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그냥 감이라니.
무슨 감이 천뇌당의 결정마저 반할 정도로 확실한가?
하긴. 비선향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실전을 생사 경계에서 겪었을 테니 감이 많이 발달할 수는 있겠지.
그래도 보통 이런 추측의 경우는 판단을 내릴 만한 근거가 있게 마련이다.
비량이 피식 웃으며 그 근거를 말했다.
“계림 인근에서 싸웠던 여신우를 기억해?”
“기억합니다. 당연히.”
“그래, 만약 운남에서 일이 터지려면 그자가 모든 걸 주도했을 가능성이 크지. 하지만 내가 본 그자는 그런 준비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단 말이야. 거사를 앞두고 직접 뭔가를 할 사람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여유가 넘쳤달까?”
“듣고 보니 그렇네요.”
“물론 이게 확실한 증거는 아니야. 내 짐작이 틀릴 수도 있어. 하지만 내 감이 틀린 경우는 별로 없었거든.”
하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 대부분은 감이 뛰어나다. 때문에 그런 자들은 기회를 잡기도 수월하고.
잘 모르는 이들은 그저 운이 좋다고만 여기겠지만, 거기에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허투루 보지 않는 습관 같은 것이 있다.
‘아니면 나처럼 평생 눈칫밥만 먹고 살아도 오감이 발달하지만.’
남궁천이 속내를 거두고는 물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됩니까?”
“이런, 뭘 들었어? 당연히 문제가 되지. 만약 내 감이 틀림없다면 흑도 세력은 하북을 칠 거야. 그럼 너희가 가려는 곳이 아주 위험하게 되는 거야.”
“최대한 조심할게요.”
비량이 피식 웃는다.
“네가? 네가 조심하겠다고?”
“음. 조심할 수도 있죠, 뭐.”
“에이, 넌 조심할 인간이 아니야. 더 사고를 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거, 참. 사람을 못 믿으시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내가 너희들과 함께 갈 수 없다는 거야.”
그건 문제가 안 되는데.
그래도 이유는 궁금하니까 물었다.
“왜요?”
“맹에서 명이 떨어졌다. 견습생도 운남으로 가라고.”
진소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늦지 않아요? 지금 출발하면 전투가 다 끝난 후에나 도착할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하나 그 또한 공부가 될 테니까. 사상자가 많아질수록 전투 직후에 할 일이 태산이거든.”
“하지만 운남은 속임수라면서요?”
“그래도 전투는 있을 거야. 정말 아무것도 없이 천뇌당을 속일 수는 없어.”
이번엔 윤종승이 불쑥 나섰다.
“그럼 우린 다시 운남으로 가는 겁니까? 광서성에서 돌아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좀 기운 빠지긴 하네요.”
운남과 광서는 바로 옆에 붙어 있기에 생도들이 이런 기분을 느낄 만도 했다.
비량이 어깨를 으쓱이곤 대꾸했다.
“사실 내 재량으로 너희들만 따로 하북으로 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다만 내 예상대로 그곳에서 뭔가 일이 벌어진다면 너무 위험할 수 있다는 거지. 게다가 내가 함께 갈 수도 없고.”
“그럼 더욱 보내주셔야죠!”
윤종승이 모처럼 큰 소리를 내자,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교관님 말씀대로면 팽수혁도 위험한 거잖아요. 누군가는 하북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흐음.”
비량이 침음을 흘리면서 내심 고개를 저었다.
‘끙. 괜히 말했네.’
아무 생각 없이 남궁천을 따라왔던 견습생들마저 이제는 어딘지 고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난 여정을 통해 견습생들 간에 연대감이라도 생긴 걸까?
마침 남궁천이 입을 열었다.
“혼자 다짐한 것 때문에 우리를 온실 속 화초로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라고 표현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을 두고 한 말이다. 일전에 맹으로 귀환하던 중 남궁천은 비량의 다짐을 들은 적이 있었기에.
비량으로서는 진천랑에게 빚진 기분을 이렇게라도 만회하려는 것일 테지만…….
‘오히려 거추장스럽다고.’
남궁천이 비량의 두 눈을 빤히 응시하며 말을 마저 이었다.
“누구도 그걸 원하진 않으니까요.”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한참이나 얽혀들었다.
결국 비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너희들을 하북으로 보내줄게. 대신 조심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견습생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 * *
반백의 중년은 부드럽고 매혹적인 미소를 가진 자였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두 발을 책상 위에 올려둔 자세마저도 호감으로 보일 정도였다.
어딘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수하의 보고를 듣는 동안 그는 조금씩 무표정하게 변해갔다.
그러나 그 모습조차도 어딘지 우수에 젖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상입니다.”
마침내 수하가 보고를 마치자 그가 나직이 침음을 흘리다 입을 열었다.
“으음. 분타의 포로들은?”
“뇌옥에 모두 가둬 두었습니다.”
“그렇군. 서신을 이리로.”
“예, 곡주님.”
깍듯하게 대답한 수하가 집무 책상으로 걸어가서 손에 든 서신을 건네주었다.
곡주라 불린 사내는 서신을 펼쳐 들고 한참이나 읽었다.
글귀는 짧았지만 계속해서 반복하여 읽는 중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가 인정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중얼거렸다.
“마단곡 영단은 결국 실패군.”
“하나 무림맹이 운남으로 집결하게 만드는 건 성공했습니다.”
“그래야지.”
곡주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황학루도 실패했지만, 이곳은 성공했고.”
그가 시선을 돌려 옆을 돌아보았다.
집무 책상 옆에는 또 다른 중년의 사내가 포승줄에 꽁꽁 묶인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지 아등바등하는 중이었다.
곡주가 가만히 지켜보다가 무심히 지풍을 날렸다.
푹! 푹푹!
“커헉!”
그제야 말문이 열린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말을 쏟아냈다.
“원하는 게 뭔가?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이런 짓을 하는……!”
“무림맹 하북 분타. 당신은 하북 분타주 팽진악이고.”
“그걸 알면서도……!”
“그러니 더 긴장해야 할 거요.”
“……!”
“다시 말해 뭣도 모르고 설치는 게 아니라, 너무나 잘 알고 저지르는 짓들이니까.”
“그 말은 무림맹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치르겠다는 뜻인가!”
“생각보다 상황 파악이 늦소. 지금쯤이면 맹에서 지령도 내려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팽진악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무림맹에서 지령이 내려오긴 했다.
하나 맹은 하북보다 운남에 집중하고 있었다.
해서 조금은 안일하게 여겼다.
한데 일이 벌어지고 나서 단 두 시진 만에 하북 분타가 점령당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나름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음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팽진악이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으음, 통성명은 해야겠지. 난 흑무곡주 류난이오.”
“류난…….”
“보아하니 이곳 하북에서는 그래도 팽가가 여전히 득세하는 모양이오. 한때 세력이 꽤 약해져서 칠대세가에도 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여긴 하북이니까. 하나 강호는 넓지. 하북 분타를 점령했다고 무림맹을 우습게 보면 곤란할 것이다. 네놈 말대로 본 가는 칠대세가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니까. 본 맹은 더욱 위대하다.”
“훌륭한 말씀이오.”
류난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상 한쪽에 놓인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꼴꼴꼴…….
류난이 팽진악의 입에 술잔을 가져갔다.
“드시오.”
팽진악이 마다하지 않고 입으로만 받아 마셨다.
화끈한 독주가 식도를 따라 배속으로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류난은 다시 술잔을 채우고 자신이 한 모금 마신 후에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처자식이 있으시던데.”
“이 비열한 새끼들! 처자식을 건드리는……!”
“너무 앞서가진 마시오. 처자식을 건드린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그럼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선택의 기회를 드리겠소.”
“선택?”
“보다시피 우리는 이제 강호에 출수했소. 세상에 흑무곡의 존재를 알리려고 하오. 그 시작이 하북일 뿐.”
“……!”
“우리는 조금씩 세력을 확장해 갈 거요. 그래서 말인데, 흑무곡이 출수했다는 상징이 필요해서 둘 중 하나를 할까 하오.”
“둘 중 하나라면?”
“분타를 불태울까 하오. 그럼 뇌옥에 갇힌 분타의 무인들은 모두 죽을 테지. 대신 분타주는 살려 보내드릴 거요. 이곳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보고할 수 있도록.”
“다른 하나는?”
“분타주의 목을 쳐서 맹에 보낼까 하오.”
“……!”
“선택하시오. 원하는 대로 들어드리리다.”
“노옴……! 어째서 이런 장난질을……!”
“장난질이라.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구려. 하나 이건 시시한 장난질이 아니오.”
“그럼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순간 류난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팽진악을 보았다. 그 눈빛이 언뜻 자애롭게도 보여 팽진악은 실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당신이 수하들의 목숨을 구한다면, 우리가 맹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되겠지. 그만큼 나름의 신념을 가진 자들이 아직은 맹에 존재한다는 뜻일 테니까. 하나, 수하들을 모조리 불태워 죽이고 홀로 살아남길 원한다면, 아무래도 맹은 뿌리부터 썩은 게 아니겠소? 제 한 목숨 살리기 위해 수하들을 전부 사지로 몰 정도라면…… 그런 조직은 굳이 힘들이지 않고 무너질 거란 말이외다.”
“한마디로…… 내 대답으로 맹의 수준을 파악해 보겠다?”
“뭐,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겸사겸사로 생각해 주시오.”
류난이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이 워낙 평화로워서 지금의 상황을 잠시 잊을 정도다.
류난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당신이 답할 차례요. 우리에게 경고를 하시겠소? 아니면 방심을 유도하시겠소? 맹의 수준을 보여주시오.”
팽진악이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 * *
하북 정정현.
“오늘은 저 객잔에서 쉬었다 가지요.”
유현의 말에 윤종승과 진소홍이 짐짓 간절한 눈으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정말이지 무한을 떠난 후로 제대로 쉰 기억이 없었다. 그 자체로도 수련이 되긴 하지만 몸은 죽어날 지경.
남궁천이 밤하늘을 잠시 올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고.”
그제야 다른 견습생들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네 사람이 객잔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툭.
마침 객잔을 나서려는 자와 어깨가 부딪힌 유현이 목례를 하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
하지만 상대는 대답도 하지 않고 봇짐을 등에 진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남궁천을 지나치는 순간.
“동작 그만.”
남궁천이 봇짐을 진 사내를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