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세 송이의 푸른 꽃
삼화취정의 경지.
하단전의 기운인 정(精)이 중단전의 기운인 기(氣)와 함께 상단전에 가까운 인당혈로 오른다.
그리고 상단전에서 모이는 신(神)의 기운과 함께 어울리면서 정수리인 천궁을 통해 발산한다.
이렇게 기운의 수발이 원활해지면 아지랑이가 피듯 공간이 이지러지면서 세 송이의 꽃이 형상화되는데 이를 삼화취정이라 부른다.
당연히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내가고수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만이 도달하는 경지.
그런데…….
“헐…… 이게 다 뭡니까?”
손우곤의 뒤를 이어 들어온 차무진이 그대로 목석처럼 굳어서 멍하니 중얼거린다.
손우곤은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겠다.”
삼화취정인 줄 알았다.
분명 정수리 위에 세 송이의 꽃이 피었으니까.
그런데 그 직후에 일어난 변화는 손우곤도 도저히 알아보지 못했다.
허공으로 살짝 떠오른 남궁천의 머리 위로 피어난 세 송이의 푸른 꽃.
한데 만개한 꽃이 점점 커진다 싶더니 어느 순간 조각조각 흩어지며 바람에 흩날리는 게 아닌가?
푸르게 빛나는 꽃잎이 그렇게 아름다운 파편이 되어서 실내의 허공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머리가 절로 맑아질 듯한 꽃향기와 함께 푸른 꽃잎이 허공을 떠돈다.
나비처럼 나풀나풀 날아가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바람에 휩쓸려 빠르게 휘몰아치기도 한다.
손우곤과 차무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꽃잎을 잡아보려고 했다.
하나 꽃잎은 실체가 아니다.
바람이다. 공기다.
손에 닿은 꽃잎은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들 듯이 지나쳐간다.
그 묘한 광경에 두 사람은 홀린 듯 한참이나 허우적거렸다.
남궁천은 완전한 무아지경 상태였다.
공기의 흐름만으로도 주변의 사물이 완전히 구분이 된다.
실내로 손우곤과 차무진이 들어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가 딱히 방해되지 않는다.
그저 의자와 탁자처럼 그 둘도 이 공간에 존재할 뿐이었다.
눈을 감고 있지만 주변의 공기 흐름이 그대로 느껴진다.
진정한 물아일체에 가까워진다.
‘이것이 창벽공.’
남궁천은 그렇게 푸른 공기가 되었다.
얼마나 운기에 집중했을까?
슈우우우…….
남궁천의 신형이 차츰 침상으로 내려오면서 마침내 착좌했다.
허공에 부유하던 무수한 꽃잎들도 서서히 빛조각이 되어 흩어진다.
“아…….”
“꽃잎이…….”
손우곤과 차무진이 어정쩡한 자세로 손을 뻗은 채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남궁천에게 고정됐다.
삼화취정의 단계를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아니, 정말로 이게 삼화취정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푸른 꽃잎이 바람처럼 흩날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기에.
한편 운기를 마친 남궁천은 그대로 가부좌를 튼 채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이 짐짓 근엄하게 느껴졌기에 손우곤과 차무진은 차마 남궁천을 부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꼿꼿하게 시립한 채로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남궁천은 내단에 쌓인 내공을 점검해 보았다.
‘공력이 상당히 늘었군.’
역시 소림의 대환단이다.
단지 몸에 좋은 약이 아니라, 오로지 내공을 증강시키기 위해 제조한 영단답다.
기분 같아서는 대환단 서너 개를 복용하면 환골탈태도 할 것 같다. 물론, 영단이라는 게 무작정 많이 복용한다고 고스란히 내공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확연히 늘어난 내공을 느낀 남궁천이 잠시 생각에 빠져들어 황학루에서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 녀석들 분명 류난의 똘마니들이었단 말이지.’
세 사람 모두 류난을 따르던 녀석들이었다.
이들이 갑자기 다른 조직에 편입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류난은 매력적인 인간이었으니까.
당시 자신보다 어렸지만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무림공적으로 낙인 찍혀 도망 다니던 흑도인들 중 다수가 류난을 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류난은 딱히 욕망이라는 게 없는 자였다.
늘 유유자적 구름처럼 바람처럼 인생이 흐르는 대로 살던 녀석.
그런 녀석이 갑자기 무림맹을 공격한다고?
‘상상이 안 가지만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니까.’
도망자로 살면서 뼈에 새긴 사실은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남궁천은 그 누구도 속단하지 않았다.
류난이 강호를 뒤집어엎을 만한 위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그가 미쳐 돌아서 그런 결심을 할 수도 있지 않겠나?
가만.
‘그러고 보니…….’
불현듯 한 인물이 머릿속을 스친다.
계림에서 비량과 손을 섞었던 녀석!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더라니…….’
그 녀석 역시 류난의 똘마니 아니었던가?
늘 그늘진 구석에서 까마귀 한 마리 데리고 다니던 녀석!
워낙 어두침침한 분위기에다가 말수가 없어서 별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사실 관심도 없었고.
한데 지금 떠올려 보니 분명 류난을 따르던 녀석 중 한 명이다.
‘그 녀석 이름이 여신우였군.’
당시에는 워낙 말이 없어서 벙어리인 줄 알았는데.
그걸 이제야 기억해 내다니.
평생을 도망만 다니느라 웬만하면 한 번 본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삶이 꽤 편해지긴 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여신우와 이번 황학루 사건이 별개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들이 내뿜는 분위기가 묘하게 닮았으니까.
물론 같은 흑도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나 초견파공안으로 볼 때 그들의 운기 형태는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함께 생활한 이들은 운기의 흐름도 비슷하게 닮아지는데, 생활 습관과 먹는 음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여신우와 황학루의 흑도인 세 명이 딱 그랬다.
마치 한 가족을 보는 것처럼 묘하게 닮은 흐름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천뇌당에서 말하지 않았나?
하북과 운남에서 동시에 움직임이 느껴지고 있다고.
운남은 계림이 있는 광서성 바로 옆이다.
‘그곳에서 여신우를 봤으니, 아마도 그 녀석이 운남을 맡은 것이리라.’
그럼 하북은 류난이 맡게 된다는 뜻인데…….
‘내가 아는 한 그 녀석은 중요한 일을 절대 남에게 맡기지 않지.’
만약 둘 중 하나가 진짜라면 하북이 위험하다. 그리고 정말 류난이 강호 전면에 나서기로 했다면 절대 만만하게 볼 수 없다.
천뇌당도 그의 치밀함에 속을 수 있을 테고.
‘하북으로 가야 하나?’
남궁세가를 천하제일의 가문으로 끌어 올리고, 자신이 무림 정점에 서기 위해서는 최대한 우군을 만드는 게 유리하다.
그것이 곧 세력이 되고 힘이 될 테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북팽가라면 괜찮은 상대지.’
생각을 정리한 남궁천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앞에 꼼짝하지 않고 시립해 있던 손우곤과 차무진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불렀다.
“주, 주군?”
“왜?”
“괜찮으신 거죠?”
“아주 좋아.”
“방금 그건 뭐였습니까? 삼화취정 맞죠?”
“응?”
“막 푸른 꽃잎이 떠다니다가 막 손가락 사이로 막 지나가고…… 막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바람이 휭휭 불고…… 막 희한하던데요?”
“창벽공의 영향인가 보네.”
“창벽공이요?”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예? 어딜요?”
“너희들 상청단 복용하러.”
“아! 맞다! 그거 정말 저희들에게 하나씩 주시는 겁니까?”
“왜? 싫어?”
“그럴 리가요! 완전 감사합니다!”
“다들 연공실로 모이라고 해.”
“명 받들겠습니다!”
손우곤과 차무진이 동시에 포권하며 목청껏 외쳤다.
* * *
구오오오.
연공실에 훈기가 가득 찼다.
서른 명의 창응대원들이 모여서 동시에 운기를 하니 그야말로 장관이 펼쳐졌다.
남궁세가의 심공은 기본적으로 공기의 흐름과 관련이 깊다 보니 운공하는 내내 실내 가득 훈풍이 불었다.
남궁천은 창응대원들 사이를 거닐면서 초견파공안을 이용해 운기 과정을 세밀히 관찰했다.
단전에서 치솟는 공력이 혈맥을 따라 이동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보이니 누가 어디에서 막히는지 단박에 파악할 수 있었다.
“거궐혈에 집중해. 기가 뭉쳐 있어.”
“……!”
“생각이 너무 많으니까 인당혈에서 기가 자꾸 멈칫거리잖아.”
“……!”
“너는 똥 마렵냐? 왜 회음혈에서 기가 떠날 생각을 안 하냐?”
“……!”
남궁천이 한마디씩 툭툭 던질 때마다 창응대원들이 흠칫거리고는 정신을 다잡았다.
정말이지 귀신같이 알아채니까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러다가도 말로 해서 안 될 경우에는 직접 손을 쓰기도 했다.
퍽!
“윽!”
어깨에 강한 충격을 느낀 박창수가 어금니를 꽉 씹으며 신음을 흘렸다.
“견청혈이 경직되어 있다. 뭐 검을 휘두를 때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지금은 운공만 하잖아. 정 신경 쓰이면 팔이 없다고 생각하라고.”
박창수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내공을 운기했다.
조금 전보다 훨씬 기가 원활하게 움직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궁천이 목검으로 어깨를 때릴 때 이미 추궁과혈의 수법으로 견청혈을 어느 정도 뚫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른 명의 운기를 하나씩 도와주고 나니 대략 한 시진 정도가 흘렀다.
마침내 운기가 끝나자 창응대원들은 저마다 늘어난 공력에 새삼 놀랐다.
무엇보다 상청단의 효능을 오롯이 받아들인 기분이 묘했다.
대번 단전이 든든하게 느껴진달까?
“힘이 솟는 느낌이야.”
“소가주님이 등을 쿡 찌를 때는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더라고.”
“잠깐 통증을 참으니까 머리까지 맑아지던데?”
저마다 남궁천의 능력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사실 운기 중인 무인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다.
한데 남궁천은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건드렸다.
마치 어느 위치에서 기운이 어떤 형태로 흐르는지 다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그 덕분에 영단의 효능을 버릴 것 없이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손우곤이 남궁천을 가만히 보았다.
‘진맥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지켜보는 것으로 운기조식을 도와주셨다. 마치 눈으로 다 본 사람처럼.’
이걸 감각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제아무리 고수라도 진맥도 하지 않고 내기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자는 없으리라.
더구나 고요하게 운기조식만 할 때라면 더욱.
‘그 말은 곧…….’
손우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남궁천의 친부는 천하대살성이지만 또 다른 이야기도 은밀히 따라붙는다.
바로 초견파공안의 재능을 가졌다는 것.
초견파공안이라는 재능이 대물림되지는 않는다지만…….
‘만약 죽음에서 깨어났을 때, 대물림한 이 재능이 본격적으로 각성된 것이라면?’
순간 손우곤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끼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천하를 지배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되면 남궁세가는 다시 한번 제왕의 가문으로 거듭날 것이다.
손우곤은 전율을 느끼며 남궁천을 다시 보았다.
만약 남궁천이 정말 초견파공안을 지녔다면 그 사실을 굳이 알리고 다닐 필요는 없다.
재능이 뛰어나면 시기와 질투가 한 몸처럼 따르게 될 테니.
심지어 천하대살성도 그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당했다는 말이 최근 암암리에 떠돌지 않던가?
마침 눈이 마주친 남궁천이 미간을 좁혔다.
“뭘 그렇게 봐?”
“아닙니다, 주군. 감사합니다!”
손우곤이 씨익 웃으며 포권했다.
다른 이들도 포권하며 이구동성으로 감사 인사를 건네왔다.
“감사합니다, 주군!”
* * *
“하북으로 가겠다고?”
비량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남궁천 뒤에 선 유현과 윤종승, 그리고 진소홍에게 향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북으로 보내주세요.”
“이유가?”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그 녀석에게 줄 게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