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세 송이의 푸른 꽃
당고륜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조검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하면 남궁 소협은 그 점소이로 위장한 흑도인을 어떻게 알고 있었소?”
순간 가주들이 흠칫거리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맹주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남궁천의 대답을 기다렸다.
확실히 남궁천이 먼저 그 점소이에게 아는 체하지 않았던가?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자 남궁표가 슬쩍 나섰다.
“어째 조 가주께서는 질책을 하시는 듯합니다. 본 가의 소가주가 그 점소이를 지목하지 않았다면 정말 위험했을 텐데요.”
한때나마 남궁천과 대립하던 사이였지만, 가재는 게 편이고,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 아니던가?
게다가 남궁표는 이번에 남궁천의 발언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던 터였다.
남궁표가 나름 옳은 말을 하자, 조검명이 입매를 비틀며 대꾸했다.
“물론 남궁 소협 덕분에 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기도 하지요. 남궁 소협, 다시 묻겠소. 저들과 진즉 알던 사이요?”
남궁천이 조검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던 사이냐고?
당연히 알던 사이지.
하지만 조검명이 뭘 노리는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요.”
“뭐요? 한데 어째서 저들을 지목해서 불러낸 거요?”
“딱 보면 보이지 않나요?”
“응? 뭐가?”
“음식을 나르면서도 눈은 계속 우리를 살피더군요. 필요 이상으로 느긋하게 행동하고요. 보통 점소이들은 무인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음식을 나르고 물러가려고 하죠. 그런데 지나치게 여유가 있더란 말입니다. 게다가 무인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그 세심함은 역시…… 뭔가 꿍꿍이가 있겠거니 생각한 거죠.”
“그래서 자네가 그 점소이를 부른 건가?”
당고륜이 내심 감탄한 마음으로 물었다.
남궁천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이상하니까요. 다른 점소이들과 달리.”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당고륜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사실 평소의 경우라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으리라.
무인이 타인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은 일종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니까.
하나 남궁천은 평소와 달리 비무 중인 상황이었다.
모든 신경을 비무 상대에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음식을 나르는 점소이까지 신경을 썼다니?
그러고도 전혀 밀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악후가 더욱 조급해보 이지 않던가?
게다가 다른 가주들조차 두 사람의 비무에 집중하느라 점소이의 행동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건만.
이 정도로 주변에 신경을 쓴다는 건 평생 도망만 다닌 사람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리라.
‘한데 이제 겨우 약관이 아닌가? 정말이지 기재로구나. 잠룡이 틀림없다.’
당고륜이 속내를 갈무리하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자네는 그들에게 배후가 있을 것이고, 그 배후는 꽤나 세력을 키웠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한편 맹주 묵천악도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확실히 영민하다.
지금쯤 엄청난 위기를 넘기고 정신이 없을 만도 한데, 이 모든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다.
세가주들도 아직까지 상기된 표정인데 남궁천만은 변화가 없다.
마치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 같다. 아니, 이런 위기를 넘기는 게 늘 일어나는 일상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면 저리될까?
대살성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그리도 위급한 삶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모든 면에서 타고난 기재라도 되는 걸까?
‘역시 마음에 안 드는군.’
묵천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궁천의 말은 틀리지 않았소. 천뇌당은 그들이 꽤나 결속력을 다진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소.”
“그런…….”
조검명이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다.
그 반응 이면에는 남궁천을 거부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흑도인들이 결속을 하게 되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로지 절대적인 힘만을 숭상하는 흑도인들이 똘똘 뭉치게 된다면, 마교 못지않게 까다로운 상대가 되리라.
그럼 태평천하의 시대도 종식일 테고.
모용환이 예의 그 차가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하면 움직임은 어디까지 파악이 되었습니까?”
“현재 북동과 남서에서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를 들었소.”
“북동과 남서라면…….”
“하북과 운남이오.”
“하북과 운남이라니!”
“허어, 참!”
가주들이 연신 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 완전히 반대 방향이 아닌가?
하북이면 중원에서 북동 끝자락이라고 보면 될 테고, 운남이라면 남서 끝자락으로 보면 될 것이다.
“완전히 떨어진 두 곳에서 동시에 그런 신호가 나왔다면 확실히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소.”
“그럼 성동격서(聲東擊西)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한마디로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에서 치는 속임수가 아니냐는 물음이다. 이럴 경우 둘 중 한 곳만 정말 위급한 곳이 되리라.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
“그럼 둘 중 진짜가 어느 쪽일지 가려야겠군요. 물론 둘 다 진짜일 수도 있겠고.”
“적랑단과 청랑단이 마침 운남 인근에서 임무 수행 중이었기에 그쪽으로 보냈소. 하북은 현재 팽가가 맞설 채비를 갖췄고.”
“칠대세가는 언제든 맹을 도울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힘이 필요하시다면 주저 없이 말씀 주십시오. 전력을 다해 맹주님을 돕겠습니다.”
“전력을 다해 맹주님을 돕겠습니다!”
가주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복창했다.
맹주가 수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리 생각해 주신다니 힘이 나는구려. 아무튼 오늘은 이 일에 대해 여러분께 알리고 대책을 논의하려고 찾아왔소.”
“마땅히 힘을 모을 일입니다. 이는 무림맹의 문제가 아니라 강호 평화 문제지요.”
“고맙소.”
맹주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세한 사항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 * *
황학루에서 칠대세가회가 무사히 끝난 후 남궁표의 장원에 남궁세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남궁설희 역시 연락을 받고 도착해 있었는데, 그녀는 마단곡의 이야기를 듣고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마단곡의 영단이라니요? 그걸 정말 소가주가 챙겼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남궁검의 대답에도 남궁설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저 아이는…….’
사람을 놀라게 해도 정도가 있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놀라게 하더니, 뜬금없이 부활해서 기절초풍하게 하고, 무연회 우승에다가 소가주 자리를 차지한 것도 모자라 이젠 마단곡의 영단까지?
도대체 어떤 운명을 타고났기에 이럴 수가 있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의 놀라움은 모두 가문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너를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 우선 영단을 모두 본 가로 옮길 예정이지만 여기서 하나씩 복용하려고 한다.”
“아…….”
영단이라니.
얼마 만에 향이라도 맡아보는 영단인가?
가문이 기울고 나서는 영단을 구경한 지 오래였다.
이미 지긋한 나이지만 무인으로서 좀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무언들 욕심나지 않을까?
특히 작년에 폐관수련을 하다가 길이 막혀 방황할 때는 정말이지 소림의 소환단 냄새라도 맡아보면 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라버니가 연공실로 모이도록 했구나.’
처음에는 연공실로 부르기에 내공심법에 대한 가르침을 내리거나, 새로운 내공심법을 터득하여 시범을 보이려는 것인 줄만 알았다.
한데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다들 받아라.”
남궁검이 작은 목함을 바닥에 내려두고는 부드럽게 밀었다.
목함이 둥글게 모여 앉은 사람들 바로 앞까지 착착 미끄러졌다.
남궁설희와 남궁표, 그리고 남궁효와 남궁화.
마지막으로 남궁천에게도 하나의 목함이 배당됐다.
남궁설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목함을 열었다.
딸깍.
순간 청아한 향이 실내를 가득 채운다.
남궁검을 포함해 모두 여섯 개의 목함이 열리자 그 향기만으로도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아아…….”
저마다 나직한 탄성을 흘린다.
보통의 영단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남궁검이 묵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대환단이다. 소림의 환단은 본 가의 내공심법과도 호환성이 좋으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저마다 입을 열어 감사를 표하자, 남궁검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는 내가 아니라 소가주에게 하도록.”
“……!”
모두들 멈칫거리고는 남궁검과 남궁천을 번갈아 보았다.
별말 아닌 듯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보면 남궁검은 완전히 남궁천을 차기 가주로 인정하는 것으로 보였기에.
가장 먼저 거리낌 없이 표현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효였다.
“소가주! 고맙네.”
남궁천을 보는 그의 시선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대꾸한다.
“별말씀을요.”
“고맙네, 소가주.”
“잘 먹겠네.”
다른 이들도 저마다 남궁천을 향해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남궁화는 입 밖으로 말을 뱉진 않았지만, 그저 감동이 그득한 눈길로 남궁천을 바라보았다.
남궁검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시기가 좋지 않다. 우선은 이곳에서 영단을 복용한 후 나머지를 본 가로 옮기도록 한다. 일부를 남겨두고 본 가의 영단 제조 연구에 쓰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모두가 대답하는 가운데 남궁천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저는 이곳에 남아서 견습 기간을 마저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해라.”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저는 따로 복용하겠습니다.”
남궁검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홀로 영단을 소화하다가 혹여나 잘못되면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대환단처럼 기운이 막강한 영단은 자칫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기에.
하지만 남궁검은 곧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했다.
이제는 걱정과 염려보다는 믿음과 신뢰를 보내야 할 때가 아니던가?
오늘 황학루에서처럼.
“그러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남궁천이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방으로 돌아온 남궁천은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영단을 홀로 복용하겠다고 한 건 딱히 다른 이유가 없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운기하는 게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전생에서부터 수십 년 동안 굳어온 습관이니 어쩌겠나?
‘그럼 시작해볼까?’
남궁천 역시 대환단처럼 구하기 어려운 영단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한 그가 목함 덮개를 열고 청아한 향을 품는 단환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빠른 흡수를 위해 단환을 혀 아래쪽으로 밀어 넣었다.
사르르르.
입안에서 녹는다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둥근 단환이 거짓말처럼 녹으면서 사라져 갔다. 동시에 운공을 시작했다.
창벽공.
만약 남궁천이 초견파공안으로 자신의 몸을 볼 수 있었다면 단전에서 일어나는 푸른 빛줄기를 목격했으리라.
하나 지금은 무아지경 상태.
남궁천은 스스로 한 줄기 빛이 되었다.
푸르고 푸른빛이 되어 세상과 하나가 되었다.
후우우웅!
남궁천의 전신에서 훈풍이 불어나가면서 장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하나 남궁천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다.
흔히 경지에 이른 자가 내공심법을 운기하면 허공에 부유하는 현상이 생기듯, 남궁천의 몸도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남궁천은 자신을 잊고 그저 공기와 하나가 되었다. 주변의 잡음조차 공기의 흐름으로 받아들여 일절 거슬리지 않는다.
장삼자락은 연신 너울거리며 허공에서 춤울 추는 듯하다. 머리카락도 한 올 한 올 떠오르면서 무게가 사라진 것만 같다.
하단전의 기운(精)과 중단전의 기운(氣)이 인당혈로 모여든다. 인당혈에서 모인 기운은 이내 상단전의 기운(神)과 어울리더니 천궁을 향해 치닫는다.
그리고 다시 임독양맥을 따라 순환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사라라라라…….
순간 남궁천은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정기신이 하나가 되어 정수리를 통해 발산되고 동시에 천기를 받아들이는 느낌.
남궁천의 머리 위에 창공의 푸름이 펼쳐진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손우곤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섰다.
“소가주님! 주군! 정말로 저희들에게도…… 으헉!”
말을 쏟아내던 손우곤이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고는 남궁천을 올려다보았다.
침상 위에 살짝 떠오른 남궁천의 정수리에는 세 송이의 푸른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 있었다.
경이롭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만한 광경.
손우곤이 부들부들 떠는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삼, 삼화취정(三花聚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