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잠깐만이라니까
무서운 속도로 질주한 남궁천이 그대로 벽라검을 뽑아 사선으로 베어 올렸다.
쑤아아앙!
검기가 발출되자, 멀뚱히 서 있던 점소이가 차가운 눈빛으로 물러서며 단도를 뽑아 막아냈다.
쩌어어어엉!
츠츠츠츠츳!
길게 미끄러지며 물러난 점소이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상황이 거의 정리된 줄 알았던 가주들과 창응대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저 점소이는 난리가 났을 때도 몸을 둥글게 말고는 오들오들 떨던 자가 아닌가?
물론 상대를 찬찬히 뜯어 살폈다면 무공을 익힌 자라는 걸 눈치챌 수도 있었다.
하나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두려움에 떠는 점소이들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당고륜이 남궁천 옆으로 얼른 다가와 물었다.
“저자도 한통속인가?”
“그럴 겁니다.”
“하면 저놈만이라도 어떻게든 생포를 해서 배후를 밝혀야겠군.”
그러자 점소이가 싸늘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 실력으로 나를 생포할 수 있을 것 같소?”
명백한 도발이었지만, 당고륜은 경험이 풍부한 고수답게 무시했다.
대신 남궁천이 나직이 말했다.
“생포는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아직까지 독단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폭멸고를 복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폭멸고!”
당고륜이 흠칫거리며 소리쳤고, 다른 무인들도 움찔 떨며 한 걸음씩 물러났다.
폭멸고가 터지면 그 숙주는 온몸이 산산조각 나면서 죽는다. 문제는 그와 동시에 지독한 독기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폭이다.
누구보다 독에 대해 잘 아는 당가주였기에 폭멸고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 점소이도 남궁천이 폭멸고를 언급하자 눈빛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린 녀석이 제법 눈썰미가 있구나.”
“너도 죽고 싶지 않으면 괜히 공력 끌어 올려 자폭하지 말고 멈추지 그래?”
“흥! 죽음이 두려울까 보냐!”
“뭘 원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미 실패했잖아.”
“실패? 웃기는 소리. 거사는 이제부터 시작일 뿐이다! 곧 흑도천하가 도래하리라!”
앙칼지게 외치는 점소이를 보며 당고륜이 나직이 읊조렸다.
“내가 먼저 출수하겠네.”
뒤를 부탁한다는 뜻이다.
어째서인지 지금은 남궁천과 호흡을 맞추는 게 가장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 순간,
파앗!
촤라라락!
당고륜의 소매에서 비수 수십 개가 일제히 점소이를 향해 날아갔다.
“어림없지!”
점소이가 코웃음을 치더니 날아드는 비수를 연이어 쳐냈다.
따다다다당!
하지만 사천당가주의 암기술은 가히 압도적이라 할 만큼 강했다.
푹! 푸푹!
몇몇 개의 암기가 허벅지와 배, 가슴에 차례로 박혔다.
“크읍!”
점소이가 신음을 삼키며 비틀거릴 때,
“막아라앗!”
응? 받아라도 아니고 막아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점소이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발바닥을 보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양손을 열십자로 교체하며 막아냈다.
콰아아앙!
요란한 소리가 터지면서 점소이의 몸이 그대로 포탄처럼 튕겨 날아갔다.
콰자아앙!
마침내 난간까지 부수며 날아간 점소이가 허공에 붕 떠오른 순간,
“끄아압!”
퍼어어억!
급격히 끌어 올린 공력 때문에 마침내 폭렬고가 폭발하면서 온몸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피와 살점들이 저 아래로 후두둑 떨어지고, 녹빛 기체가 창공에서 비산했다.
“아…….”
사람들이 멍한 시선으로 그 끔찍한 모습을 보았다.
창응대원들 중 몇 명은 속이 거북한지 시선을 외면하고 말았다.
“후…….”
가까스로 안도의 숨을 내쉰 남궁천이 돌아서서 사람들을 보았다.
“폭멸고독은 기화 상태에서 공기 중으로 중독되죠. 다행히 꽤 떨어진 허공에서 흩어졌으니 피해는 없을 거예요. 그렇죠? 당 가주님.”
당고륜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다들 안심하셔도 좋소.”
그제야 다른 가주들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독의 제왕이라 불리는 당고륜이 인정했으니 마음이 놓인 것이다.
당고륜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자네는 그런 것들을 어찌 다 알고 있었나?”
“책은 지식의 보고죠.”
“책이라.”
당고륜이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지만, 진정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책을 통해서 폭멸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방금 죽은 자의 몸에 폭멸고가 심어져 있을 거라는 건 책을 본다고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풍부한 경험을 가진 자만이 유추할 수 있는 수준이다.
자신조차도 경황이 없어서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나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군.’
조금만 깊이 생각해 봤다면 이들에게 최후의 수단이 하나쯤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폭약은 소지하기도 번거롭고 불을 붙이기도 애매하니 폭멸고가 제일 만만하지 않겠나?
구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이만한 일을 꾸몄다면 역시 그 정도는 대비할 테니.
그런데 자신도 놓친 걸 남궁천이 먼저 눈치채고 있었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분석해서 역대급 재앙이 될 만한 사고를 막아낸 것이다.
확실히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또한 강호 경험이 풍부하지 않고서는 쉬이 해낼 수 없는 일.
‘그럼에도 저리 태연하단 말인가?’
이런 고비쯤은 이미 수십 번은 경험한 사람처럼 침착하다.
이제 약관인 청년이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남궁천. 너란 녀석은 대체…….’
당고륜은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세가주들이 합심해서 궁지로 몰아도 단박에 판세를 뒤집는 능력, 섬전절창에도 뒤지지 않는 무위, 점소이로 위장한 흑도인을 가장 빨리 알아채고, 폭멸고를 무용으로 만든 임기응변까지!
‘재능’이라는 말로 넘기기에는 너무나 큰 능력이다.
‘잠룡…… 인가!’
만약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남궁천은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잡아야 할 대상이다.
당고륜이 생각을 거두고는 남궁천에게 다가가 포권했다.
“자네 덕분에 큰 위기를 넘겼네. 고맙네.”
순간 장내의 모든 사람이 눈을 크게 치뜨고는 당고륜을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천당가가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경우는 좀처럼 없기에.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사천당가가 아닌가?
먼저 시비를 걸진 않더라도 먼저 고개를 숙이는 일도 없다.
딱 상대방에게 받은 만큼만 예를 차린다는 사천당가다.
한데 사천당가주가 남궁천에게 먼저 예를 다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때마침 계단을 따라 무인들이 우르르 올라왔다.
각 세가의 호신위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여느 때처럼 황학루 아래층에서 머물고 있었다.
실력이 쟁쟁한 가주들이 한곳에 모여 있으니 굳이 호신위가 최상층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가주님!”
“가주님을 호위하라!”
“가주님! 무사하십니까?”
저마다 자신의 주인을 찾아 소리치는 호신위들.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그럴 수밖에. 이만한 문제가 일어났던 적은 지금껏 없었으니.”
당고륜이 쓴웃음을 지으며 남궁천에게 말을 건넸다.
태평천하의 시대였다.
이만한 문제는커녕 지금까지는 무한에서 그 어떤 무인도 칠대세가 가주들을 보고 시비 한 번 거는 일이 없었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마침 사천당가의 호신위도 달려왔다. 당고륜은 부상당한 당우기를 옮기게 하고는 호신위를 모두 돌려보냈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호신위들이 물러가고 나서야 조금 잠잠해진 분위기가 됐다.
지금껏 사태를 관망만 하던 맹주가 마침내 기다란 탁자로 걸어왔다.
상석에는 이미 남궁검이 앉아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래도 아랫자리에 앉을 수는 없기에 탁자 끝으로 가서 남궁검과 마주 앉았다.
“자, 다들 앉으시오.”
“예, 맹주님.”
가주들이 그제야 이성을 되찾고는 기다란 탁자로 걸어와 자리를 차지했다.
창응대원들이 얼른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남궁천도 남궁검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묵천악이 좌중을 한차례 훑어보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칠대세가만 있는 자리는 아니나 개의치 않고 말하겠소.”
“예, 새겨듣겠습니다.”
조검명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꾸한다. 남궁세가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묵천악이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리된 만큼 다들 사태가 꽤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하실 거요. 지금 흑도 세력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소. 하여 내 부득불 세가회에 참석하겠다고 했소.”
“그들이 결집하기 시작했습니까?”
모용환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묻자, 묵천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뇌당(天腦堂)의 분석으로는 그런 것 같소.”
천뇌당은 무림맹에서도 총군사가 총괄하는 곳이다.
무림의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여 상세히 해석하는 곳.
천뇌당이 그리 결론을 내렸다면 십중팔구 믿어도 된다는 뜻.
황보칠이 주먹을 콱 말아 쥐고는 소리쳤다.
“마교 놈들이 잠잠하니 이젠 속 시커먼 것들이 설치는군요! 죄다 쓸어 버려야 합니다! 싹을 틔우기 전에!”
이에 백리영산이 조심스럽게 의문을 표했다.
“한데 흑도인들이 결집하다니. 확실히 놀라운 일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늘 뒤통수나 치는 것들도 뭉칠 수가 있다니. 어차피 본때를 보여주면 다들 가루가 되어 흩어지겠지만요.”
황보칠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실제로 흑도인들은 오랫동안 세력을 규합하지 못했다.
흑도인들 특성상 오로지 강함에만 집착하는 데다 승자독식의 구조에 익숙하다 보니 배신과 모략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조직이 어찌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겠는가?
하나 그런 자들이 만약 어떠한 계기로 똘똘 뭉치게 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조직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이미 저렇게 동귀어진을 각오로 이런 일까지 꾸민다면 쉽게 흩어질 것 같진 않습니다만.”
남궁천이 떠오른 생각을 가감 없이 말했다.
그러자 조검명이 발끈해서 소리친다.
“네가 뭘 안다고……!”
말을 하던 그는 남궁검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고 나서야 목소리를 애매하게 흐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말을 하시오? 흑도인들은 원래 배신과 모략만 일삼는 족속들이오. 믿을 수가 없는 놈들이란 말이오. 오늘 일은 흑도인들 중에서도 순진한 것들 몇 놈이 꼬드김에 넘어간 것이겠지.”
물론 남궁천은 이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가 오늘 알아본 세 명의 흑도인들은 간단히 목숨을 내던질 만큼 순진하지 않다.
‘그것들이 얼마나 영악한 것들인데.’
하지만 그들과 아는 사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하면 낙양조가주께서는 순진한 사람을 꼬드겨 목숨을 걸게 하실 수 있습니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롭니다. 누구라도 순진한 사람을 설득해서 목숨을 버리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맹주님을 비롯해 쟁쟁한 가주들을 암살하도록 종용하실 수 있습니까?”
“무슨 그런……!”
“단지 자살을 강요하는 거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건 포기하게 만드는 거니까요. 하지만 맹주님을 비롯해 쟁쟁한 세가주들을 한꺼번에 몰살하라고 명하면 아마 대부분 듣지 않을걸요? 순진한 사람일수록 더욱 기절하고 도망가겠죠.”
왠지 모르게 설득이 된다.
실제로 누군가를 겁박해서 자살하게 만드는 건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지만, 무림맹 수뇌부를 몰살시키라는 명을 듣게 하는 건 어려워 보인다.
물론 충성심이 대단한 가신이라면 달라지겠지만, 그래서야 결속력이 약하다는 말을 스스로 반박하는 셈이고.
조검명이 생각에 잠긴 사이, 남궁천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그럴 때는 포기가 아니라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거니까요. 어디 용기뿐일까요? 목숨을 걸 만한 신념도 필요할 겁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보다 백 배는 더 어려운 일이죠. 말 그대로 삶을 불태워서라도 이루고 싶은 열망을 심어줘야 하니까.”
“…….”
“그래서 만만하게 보면 안 되는 거죠. 오늘 폭멸고를 복용하고 온 순둥이 말고, 그 배후에 있는 자들을요. 사람을 부릴 줄 안다는 뜻이니까. 그 말은 곧…….”
“결집도 가능하단 말이겠지.”
당고륜이 무겁게 말을 잇자, 남궁천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고륜이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해서 자네는 그 배후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저야 모르죠.”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조금 의심스러운 녀석이 있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