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잠깐만이라니까
악후가 움찔거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무인들과 세가주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막 음식을 나르던 점소이 하나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저, 저 말입니까요?”
점소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왜, 왜 그러시는지…….”
“이리 와보라고. 나 좀 보자.”
갑작스러운 상황에 세가주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한껏 기세를 끌어 올려 달려들던 악후도 미간을 푹 찡그리고는 남궁천을 지켜보았다.
‘아니, 지금 비무하다 말고 뭐 하는 거야? 이것도 격장지계인가?’
어쨌거나 지목당한 점소이가 쭈뼛거리며 다가가는데, 남궁천이 또 다른 점소이 두 명을 가리켰다.
“그리고 너, 거기 너도.”
이게 무슨 일이지?
상황이 묘하게 흐르자 남궁검도 눈살을 슬쩍 찌푸리고는 남궁천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겁에 질린 듯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다가오는 점소이들.
그들이 서로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먼저 도착한 점소이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부르셨는지요?”
“너 여기서 뭐 하냐? 개과천선한 거야?”
“예?”
점소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이 점소이의 어깨에 손을 척 올리며 말했다.
“새끼, 오랜만이네. 요즘 어떻게 지내냐?”
“저어, 공자님. 아무래도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요. 저는 공자님을 처음 뵙는…….”
“괜찮아, 괜찮아. 내가 아니까. 오랜만이라 궁금해서 그래.”
“저어,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말해봐.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이제 칼질은 접었어?”
점소이가 아주 잠깐 흠칫거렸다.
그의 눈빛에 언뜻 차가운 기류가 스쳤지만 워낙 짧은 순간이었기에 그걸 눈치채는 자는 없었다.
다만 한 사람만 빼면.
“오? 아닌 모양인데? 여전히 날카롭잖아.”
점소이가 다시 뭐라고 하려는데, 남궁천이 뒤이어 다가온 두 명의 점소이를 보며 말했다.
“그래, 너희들도 다 여기 모여 있으니 새삼 반갑네.”
점소이들이 역시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번갈아 보았다. 그중 한 명이 차분하게 일렀다.
“공자님,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저희들은 공자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누가 본 적이 있대? 그냥 나 혼자 반갑다는 거야.”
이쯤 되자 지켜만 보던 악후는 속이 바글바글 끓는 듯했다. 결국 그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남궁 소협!”
“응? 왜요?”
“왜요? 왜요라니! 지금 비무하다 말고 뭐 하는 거요?”
“아, 오랜만에 본 녀석들이라 반가워서 그럽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세가의 자제가 저런 하찮은 인간들을 볼일이 뭐가 있다고!”
“하찮다니. 거, 말이 심하시네. 다 같은 사람끼리.”
“비무가 두려워서 회피하고 싶은 거라면 솔직히 말하시오! 내 비무를 강요하진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그게 아니라니까. 정말 아는 녀석들을 보니까…….”
“저들은 소협을 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소!”
“그래도 나는 안다니까?”
“허!”
악후가 허공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웃음만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이 점소이들을 둘러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셋이 한꺼번에 여기에 일자리라도 구한 거야? 어떻게 된 건지 말 좀 해보라니까? 궁금하잖아.”
그러자 점소이 셋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안색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이쯤 되자 가장 먼저 남궁검과 묵천악이 묘한 기류를 눈치챘다.
그리고 마침 다른 점소이 중 한 명이 이쪽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
그를 본 남궁검이 나직이 물었다.
“왜 그러나?”
“저 사람들 신입인데…….”
“신입?”
“예. 오늘 유난히 단체 예약이 많아서 엊그제 객점에서 구인 홍보물을 돌렸습지요.”
“그때 지원한 자들이다?”
“예. 그 외에도 몇 명 더 있습니다만.”
“그게 누군가?”
점소이가 고개를 돌리고는 음식을 나르는 다른 점소이들을 훑어보았다.
그 순간!
“칫!”
점소이 하나가 혀를 차더니 접시째로 집어 던지는 게 아닌가?
그걸 신호로 점소이들 중 일부가 일제히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며 가주들을 향해 휘둘렀다.
남궁검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점소이를 앉은 자세 그대로 발로 차서 날려 버렸다.
뻐억!
또 다른 점소이는 맹주를 향해 비도를 내던졌다.
쉬이이익!
티잉!
손을 가볍게 휘저은 묵천악이 무서운 눈길로 점소이를 노려보았다.
“쳇! 어차피 글렀다! 엎어!”
점소이 하나가 버럭 외치자, 순식간에 황학루 최상층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 와중에도 남궁천에게 붙들려 있던 세 사람이 이를 빠득 갈고는 품에서 단도를 뽑아 들었다.
“이 개 같은! 별 같잖은 애송이 때문에!”
쉬쉬이익!
세 사람이 동시에 남궁천을 향해 단도를 휘둘러왔다.
남궁천이 발끝으로 바닥을 툭 차면서 물러났다.
“뭐야? 개과천선이 아니었던 거냐?”
“닥쳐라!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새끼가!”
쉬쉬이잇!
세 줄기의 공력이 남궁천을 향해 쏟아진다. 하나는 단전, 하나는 목, 하나는 심장.
제일 먼저 뻗어오는 단도를 남궁천이 발끝으로 걷어찼다.
퍽!
“큭!”
휘리릭!
그대로 돌개바람처럼 회전한 남궁천이 벽라검을 뽑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서걱!
“크아아악!”
단도를 쥔 손이 그대로 잘려 나간 점소이가 입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내질렀다.
마지막으로 심장을 노린 단도를 왼손으로 낚아채면서 금나술의 수법으로 꺾어 버렸다.
우드득!
“크어어억!”
순식간에 세 사람이 바닥에 나뒹굴자, 그 모습을 본 악후가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지척의 세 사람을 한꺼번에? 도대체 저 녀석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 거야? 아니, 그보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상황이야?’
너무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악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편 세가주들은 뒤늦게 대응했지만, 조검명은 옆구리에 자상을 입었고, 백리영산은 허벅지에 비도가 박혔다.
그리고…….
“우기야!”
당고륜이 비명처럼 외치며 달려가는 것과 동시에 소매에서 비도 몇 자루를 날렸다.
쒸쒸에엑!
퍼퍼억!
당우기를 덮쳤던 점소이 둘이 그대로 비수를 맞고 포탄처럼 튕겨 나갔다.
콰당탕!
한 명은 기둥에 처박히고, 다른 한 명은 난감에 겨우 걸친 채로 추락을 간신히 면했다.
당고륜이 얼른 아들을 안아 일으켰다.
“괜찮으냐?”
하필이면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기습을 당했던 터라 당우기는 목 언저리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 아버지……!”
“아무 말 말아라!”
당우기가 얼른 점혈을 했지만 좀처럼 피가 멈추지 않았다.
“제길!”
매사에 침착한 그였지만 소가주이자 하나뿐인 아들이 중상을 입으니 심정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출혈 과다로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
마침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그가 무섭게 돌아서며 비수를 뿌리려는 찰나,
“어우씨, 놀래라.”
“남궁천……?”
“비켜 보세요.”
“……!”
당고륜이 엉겁결에 옆으로 슬쩍 물러났다.
비키란다고 비켜주는 자신이 이상했지만, 남궁천의 눈빛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남궁천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모습이었기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워낙 의외성을 느끼게 해서 그럴까? 어쩌면 남궁천이 또 뜻밖의 해결책을 꺼내 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쓰러진 당우기 앞으로 간 남궁천이 내공의 흐름을 유심히 살폈다.
‘무리하게 공력을 끌어 올리던 중에 당했군.’
공력의 흐름이 몇 군데 혈에서 막혀 있다. 그러다 보니 점혈을 해도 제대로 지혈이 안 되는 것이다.
공력의 흐름을 제대로 터주어야만 점혈도 효과가 있으리라.
남궁천이 재빨리 손가락으로 기해혈과 중부혈, 그리고 곡지혈을 점했다.
순간 기의 흐름이 원활해지자 당우기가 격하게 기침을 토하며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쿨럭! 컥!”
“우기야! 이 무슨 짓……!”
격노해서 외치던 당고륜이 곧 이성을 되찾았다.
‘출혈이 멈췄다!’
뿐만 아니라 당우기의 안색도 이전보다는 훨씬 편해졌다.
굳이 부가설명을 하지 않아도 남궁천이 탁혈을 빼내고 지혈을 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짧은 순간에 상황 파악을 끝내고 응급 처치를 하다니.
물론 자신이라도 조금 더 차분했으면 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천당가야말로 모든 무가 중에서도 의술만큼은 뒤처지지 않는 곳이니까.
하나 늘 그렇듯 가설은 가설일 뿐.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자신이 허둥대는 동안, 이를 남궁천이 해결해 주었다.
당고륜이 남궁천을 향해 포권했다.
“아들을 살려줘서 고맙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네! 사천당가는 은원관계만큼은 확실히 따지네.”
“예, 그런데 일단은 이 상황부터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네요.”
남궁천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만약 남궁천이 눈치를 채지 못했다면 정말 위험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서 코앞까지 다가온 살의에 대항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하나 지금은 창응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며 나섰고, 세가주들과 후기지수들도 맞서고 있었다.
첫 기습으로 몇 명이 부상을 입은 것을 제외하면 이들의 공격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이것들이 개과천선하고 새 삶을 사는 줄 알았더니…….’
남궁천은 이들 중 세 명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에 만났던 흑야신(黑夜神) 류난의 똘마니들.
흑야신 류난은 일신에 상당한 무위를 지닌 흑도 고수였지만, 은거기인에 가까울 만큼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무림공적에도 이름이 오르지 않은 자였다.
대신 유유자적 구름 따라 바람 따라 흘러가듯 살았는데, 유난히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긴 했다.
특히 하오문에서조차 꺼려할 정도로 인생 밑바닥의 흑도인들이 유난히 그를 따랐는데, 저 세 명도 그런 부류였다.
한데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게다가 다짜고짜 기습이라니?
이제 다른 조직에 편입된 걸까?
한편 상황이 급박하게 흐르자 귀신처럼 숨어 있던 맹주의 호신위들도 나타나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싸움에 가담하지 않고 그저 맹주 곁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만 했다.
대신 세가주들과 후기지수들, 그리고 창응대원들이 점소이들을 상대했다.
분명한 건 점소이로 위장한 저 무인들이 창응대까지 예상하진 못한 듯했다.
그들 사이에서 욕지거리와 함께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제길! 정보가 새어 나갔어!”
“함정이었나?”
“빌어먹을! 무림맹은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점점 생포될 위기에 몰리자, 저항하던 점소이들이 어느 순간 픽픽 혼자 쓰러지기 시작했다.
당고륜이 불같이 외쳤다.
“독단이다! 막앗!”
하나 이미 칼을 들고 싸우던 점소이들은 죄다 독단을 깨물고는 입에 거품을 물며 쓰러지고 있었다.
반면 남궁천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이것들…… 처음부터 노린 건가?’
그렇다면 이렇게 끝날 일이 아니다.
저 점소이들의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맹주와 칠대세가를 직접 노린 자들이다.
그럼 전략 실패에 대한 대비책이 반드시 있을 터!
남궁천이 초견파공안을 펼쳐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형형색색의 공력이 폭죽처럼 뒤엉키며 여기저기서 터진다.
그리고 한 사람.
‘저놈이구나!’
가히 가공할 만한 공력이 단전에서 심장으로 솟구치는 자.
저 정도로 짙은 기운이라면 틀림없이 몸에 폭멸고(爆滅蠱)가 들어 있으리라!
폭멸고가 터지는 순간, 독이 삽시간에 퍼져 이곳에 살아남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터.
타앗!
남궁천이 지체 없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