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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공검제-200화 (199/508)

200. 잠깐만이라니까

물론 생사비무가 아닌 만큼 창으로 남궁천의 복부를 꿰뚫어 버릴 생각은 없었다.

창끝이 복부에 닿는 순간 공격을 멈출 작정이긴 했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창을 맨손으로 낚아채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누군가?

섬전절창 악후가 아닌가!

그런데 배꼽까지 날아든 창대를 휘어잡아?

“이익……!”

자존심이 상한 악후가 창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창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치 단단한 바위에 파고들어 박힌 것만 같다.

너무나 어이없는 광경이다 보니 지켜보던 세가주들도 헷갈렸다.

저게 지금 악후가 알아서 멈춘 건지, 남궁천이 낚아챈 것인지. 아니, 어쩌면 그들도 일신에 상당한 무예를 지니고 있었으니 짐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궁천이 낚아챘다는 사실을.

하나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으리라.

악후가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가만히 심호흡을 하고는 물었다.

“비무 중에 잠깐이라니. 이게 무슨 짓이오?”

“누가 올라왔잖아요.”

“뭐? 누가 올라와?”

악후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흠칫 굳어 버리고 말았다. 세가주들도 그제야 계단을 따라 올라온 노인을 보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맹, 맹주님!”

황학루 최상층에 불쑥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맹주 묵천악이었다.

다들 남궁천과 악후의 비무에 모든 신경을 쏟아내느라 미처 묵천악이 올라온 걸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를 본 남궁검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권했다.

“오셨소? 맹주.”

“또 봅니다, 남궁 가주.”

묵천악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다만 그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지금의 상황이 썩 이해가 되지 않은 탓이다. 그의 시선이 이곳저곳을 방황했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

가주들만 모여 있어야 할 최상층에 웬 무인들이 한가득이지 않은가?

게다가 초청을 받은 남궁검이 말석도 아닌 상석에 앉아 있고, 다른 가주들이 기다란 탁자 좌우에 늘어앉아 있다니?

자신이 아는 한 칠대세가주들은 그렇게 물렁한 자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뒤쪽에서는 악후가 창을 내지르고, 남궁천이 그 창을 움켜잡은 채로 이쪽을 보지 않는가?

뒤늦게 악후가 창을 거둬들이면서 얼른 포권했다.

“악 모가 맹주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 옆에서는 꼴 보기도 싫은 남궁천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인사를 건넨다.

맹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이오?”

“그것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백리세가주 백리영산이 대략의 사정을 조곤조곤 알려주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를 파악한 맹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내를 둘러보다 걸음을 옮겼다.

그가 발걸음한 곳은 애초에 남궁천이 비워두었다는 팔인용 탁자였다.

과연 노련한 그는 남궁천의 꼼수에 넘어가지 않고 따로 탁자를 차지한 것이다.

그가 남궁천과 악후를 보며 웃었다.

“모처럼 눈요기가 될 것 같군. 하던 비무는 계속해도 좋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실례하겠습니다, 맹주님.”

악후의 대답에 맹주가 슬며시 손만 들어 응답했다.

악후가 다시 한번 기수식을 취했다.

휘리릭, 휙휙, 차악!

“오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저 겉멋. 크으으.”

남궁천이 너스레를 떨자 악후의 미간에 주름이 팍 생겼다.

“내 남궁 소협을 과소평가한 것 같소. 하나 이제는 방심하지 않을 거요.”

“당연히 그래야죠. 강호에서 방심은 그냥 뒈지는 지름길이니까.”

“……!”

나름의 경고를 해주었는데도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정말이지 정이 붙지 않는 인간 아닌가?

악후가 착 가라앉은 눈으로 남궁천을 응시하다가 서서히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그럼에도 남궁천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검을 척 늘어뜨린 채 꿈쩍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남궁천의 시선이 악후에게 향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을 보는 게 아닌가?

바로 세가주들이 앉은 기다란 탁자였다.

그곳에서는 지금 묘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맹주가 나타나면서 자리를 따로 앉았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조검명이 나직이 말했다.

“자리를 옮깁시다. 여기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하긴. 맹주님께서 따로 앉으셨으니 저쪽으로 옮깁시다.”

“우리도 진작 저리할 걸 그랬습니다.”

그렇게 두런거리는 대화가 나오더니 세가주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아닌가?

이렇게 되면 남궁세가 식구들만 긴 탁자에 남게 되고 칠대세가는 다시 맹주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되리라.

분위기가 순식간에 역전되는 것이다.

한편 남궁천이 한눈을 팔자 악후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무시를 해도 유분수지. 감히!’

탓!

순간 악후가 삼절창을 빠르게 내지르며 빛살처럼 날아갔다.

한 치의 방심도 없이 그야말로 생사비무를 치른다는 느낌으로 최선을 다한 일격.

그제야 남궁천도 힐끔 돌아보고는 얼른 보법을 밟았다.

팟!

곧게 뻗은 삼절창이 옷깃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제법!’

남궁천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확실히 섬전절창이라는 명성이 마냥 허황된 것은 아닌 모양.

휙! 쉬이익!

목표를 잃은 삼절창이 그대로 옆으로 휘둘러져 왔다. 거의 직각에 가까운 움직임!

‘호오, 과연!’

관성을 꺾고 이렇듯 직각으로 휘두르는 건 어지간한 근력과 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에 가깝다.

따앙!

촤아아악!

눈 깜빡할 사이에 벽라검으로 창을 막아낸 남궁천이 그 압력에 떠밀려 주르륵 밀려났다.

그 바람에 자리를 이동하려고 일어났던 세가주들이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남궁천이 세가주들을 돌아보고 씨익 웃었다.

“이런, 실례.”

세가주들이 헛기침을 하고는 시선을 외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검을 앞에 두고 자리를 홀랑 옮기는 짓은 어떻게 보든 치사함이 묻어나는 행동이지 않은가?

한편 악후는 공격을 멈추지 않고 곧장 몸을 날려 남궁천을 향해 파고들었다.

쉬이이익!

쩌엉!

다시 한번 금속성이 터지면서 악후의 창이 막혔다. 그런데 그 순간, 삼절창이 접히면서 거리를 단숨에 좁혀왔다.

철컥, 철컥, 철컥!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악후가 삼절창을 몽둥이처럼 휘둘러왔다.

쒸이이익!

뚜카앙!

벽라검에 막힌 삼절창이 다시 접히면서 남궁천의 얼굴을 때리려는 순간,

스슷!

‘엇? 사라져?’

거짓말처럼 남궁천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아닌가?

곧이어 뭔가 불쑥 다가오는 느낌이 움찔거리며 물러난 악후.

한데 오히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남궁천이 한 걸음 물러난 상황이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만 같은 상황.

이내 남궁천이 벽라검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왔다.

쒸이이익!

“치잇!”

악후의 삼절창이 채찍처럼 떨어져 내렸다.

따아앙!

“크읏!”

손바닥을 찢어 버릴 것만 같은 충격이 전해진다. 이어서 중심을 잃은 악후가 뒤로 한 걸음을 내디디며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하나 삼절창의 첫마디가 철컥 꺾이고 말았다.

이것이 삼절창의 단점이다.

공력이 심후해서 삼절창을 잘 다스리면 훌륭한 무기가 되지만, 매 순간마다 공력을 조절하며 길이를 유지하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다.

나머지 두 마디의 삼절창은 공교롭게도 맹주가 앉은 탁자를 내려치고 말았다.

콰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맹주가 앉은 탁자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눈앞에서 파편들이 튀어오르는데도 맹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의 비무를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젠장, 맹주님이 지켜보시는데……!’

악후는 조바심이 일어났다. 아니, 걱정이 됐다.

손을 섞으면 섞을수록 남궁천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니, 이런 생각부터 접어야 한다!’

애초에 질 각오를 하는 싸움이라니.

자신답지 않다.

강호신룡?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지금껏 강호신룡의 별호를 받은 자가 어디 한둘인가?

자신도 무연회를 우승했을 때 강호신룡이라는 말이 잠깐 떠돌았다.

우스갯소리로 강호신룡은 원래 떠오르다가 가라앉는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래, 주눅들 필요 없다.

강호 경험과 타고난 기질은 자신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

분위기에 끌려가지만 않는다면……!

철컥, 철컥……! 촤아악!

급하게 삼절창을 회수한 악후가 재빨리 균형을 되찾으면서 이어질 공격을 대비했다.

하나 남궁천은 더 공격을 해오는 대신 맹주를 향해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이런 또 실례를.”

“신경 쓰지 말고 하게나.”

맹주가 무감한 어조로 대꾸하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악후를 돌아보았다.

“그럼 계속.”

남궁천이 한 손을 앞으로 내밀더니 까딱거린다.

선공을 양보한다는 신호.

‘저 끝까지 건방진!’

악후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참으면서 남궁천을 빤히 노려보았다.

한편 맹주가 앉은 자리로 이동하기 위해 일어섰던 세가주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다가 슬금슬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난감한 모습이란.

그리고 마침 계단에서는 빈 탁자를 채우기 위한 음식들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요.”

점소이들은 남궁천과 악후의 비무에 잠깐 멈칫거렸지만 곧 내색 없이 요리를 나르기 시작했다.

무인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으레 있는 일이라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모양이었다.

잠시 산만해졌던 정신을 수습하고는 악후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남궁 소협, 확실히 강호신룡이라는 명성이 허황된 건 아니구려. 하나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오.”

“눼에, 눼에, 그러시겠죠.”

‘저놈이 끝까지……!’

어금니를 부득부득 간 악후가 기수식을 척 취했다.

남궁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어? 이번엔 그거 안 해요?”

“그거?”

“거 왜 막 붕붕 휘두르고 멋지게 자세 잡고 하는 거요.”

‘저……!’

또다시 발끈하려던 악후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집중력을 유지했다.

이 또한 심지를 흩트리기 위한 상대의 격장지계이리라. 저런 단순하고도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선 안 된다.

완전한 평정심을 되찾은 악후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이쯤 되자 남궁천도 더 이상은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 서서히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악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남궁천!’

다르다.

그냥 편안한 자세로 서 있을 때와 제대로 집중하는 지금의 모습은 천양지차다.

마치 사신이 되어 눈빛만으로 자신을 찍어 누르는 것 같지 않은가?

저 어린 나이에 어찌 저런 기운을 품는단 말인가?

꽈악.

악후가 창대를 힘주어 움켜잡았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상대이긴 하지만 긴장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강호 경험만큼은 내가 한 수 위다!’

마음을 다잡은 악후가 바닥을 차며 쏘아가는 순간!

“잠깐만요.”

아니, 또 왜! 뭔데!

왜 자꾸 잠깐만이래! 왜!

짜증이 확 솟구친 악후가 이번에는 급히 멈추고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또 뭐요? 대체!”

한데 남궁천이 악후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엉뚱한 곳을 향해 말하는 게 아닌가?

“야, 너! 거기 이리 와봐. 나 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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