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태풍에 맞설 용기
분위기라는 게 참 묘하다.
마치 공기의 흐름과 같아서 한번 기류를 타게 되면 순식간에 다른 상황처럼 보이곤 한다.
지금 황학루 최상층의 분위기가 딱 그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갖 조롱과 멸시가 난무하던 곳이었지만, 이젠 어딘지 엄숙하고 경외감마저 떠도는 공간이 되었다.
남궁표는 여전히 눈물을 찔끔거리며 소매로 눈가를 훔쳤고, 남궁화는 눈시울을 붉힌 채 물잔만 바라보았다. 남궁효 역시 목이 멘 것인지 물만 연신 들이켰다.
그러나 어딜 가든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있게 마련.
감동의 물결이 휘몰아치는 이런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던 조검명이 애써 입매를 비틀며 이죽거렸다.
“좋은 말이군. 한데 자네는 지금 칠대세가에 끼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시라도 착각하지 말라는 소리다. 오늘은 엄연히 본 회가 남궁가를 초청한 것일 뿐, 칠대세가로 인정한 게 아니라는 점을.”
그의 말에 훈풍처럼 느껴지던 기류가 돌풍으로 변하는 듯했다.
남궁천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데, 남궁검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전에.”
“……?”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남궁검에게 향했다.
원래부터 과묵한 자가 발언권마저 남궁천에게 넘겼으면서도 입을 여니 모두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남궁검이 얼음 조각 같은 눈빛으로 조검명을 찍어 눌렀다.
“본 가의 소가주는 지금 내게서 정식으로 발언권을 얻었소. 즉, 내 대리로 생각해 주면 되겠소. 동네 어린애를 다루듯 하대해서는 안 될 것이오.”
“아무리 그래도 배분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시지요.”
조검명이 냉소를 지으며 대꾸하자, 남궁검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조검명도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고 그 시선을 빤히 마주 보았다.
‘천둥벌거숭이가 설치니, 영감도 분위기에 휩쓸린 모양이군. 아무렴 아들뻘 되는 녀석에게 내가 존대까지 할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한참 얽히다가 남궁검이 입을 열었다.
“배분이라. 정녕 그리 생각한다면 좋을 대로.”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검명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다음 순간 그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감사는 무슨. 내 너에게 감사까지 받을 일은 한 적이 없는데.”
“……!”
조검명이 흠칫거리고 돌아보자, 남궁검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묻는다.
“왜? 기분이 나쁜가?”
“남궁 가주……!”
“말해라.”
“이 무슨 무례입니까? 아무리 기분이 언짢으셔도 그렇지…….”
“네 말대로 배분 차이가 있지 않은가?”
“……!”
조검명은 뺨을 부들부들 떨었고, 주변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특히나 남궁검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남궁화와 남궁표, 남궁효는 입을 쩍 벌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면 남궁천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오오, 영감이 드디어 내 방식을 인정하기 시작했군! 그래, 이거지!’
좌중의 분위기는 이제 얼음장같이 싸늘해졌다.
결국 조검명이 한발 물러섰다.
“끄음.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남궁 소협, 하대한 것에 대해 사과드리겠소.”
“괜찮습니다. 제가 이해해 드리겠습니다.”
할아비나 그 손주나!
조검명이 어금니를 콱 깨물었다가 다시 은근히 쏘아붙였다.
“아무튼 앞서 말한 점은 분명히 해주셔야겠소. 남궁가가 칠대세가에 속한 건 아니…….”
“그런데 칠대세가의 기준이 뭡니까?”
“그야 강호가 인정하는…….”
“그러니까 그 인정하는 기준이 뭐냐고 여쭙는 겁니다.”
“기준이 뭐냐니…….”
조검명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버무리는데, 듣다 못한 악후가 불쑥 나섰다.
“그야 당연히 모든 게 기준이오. 풍부한 학식, 걸출한 무공, 막강한 재력! 이 모든 것을 갖춘 천하칠대가문을 말하는 거요.”
딱 부러진 그의 말에 칠대세가주들이 그제야 흡족한 표정이 되어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풍부한 학식이야 뭐 제갈세가 빼면 다 비슷비슷한 수준인 것 같고. 걸출한 무공은 본 가가 결코 뒤지지 않을 듯하고, 막강한 재력도…….”
탁!
남궁천이 탁자 위에 금왕의 명패를 올려두었다.
모든 이의 표정이 꿈틀 흔들린다.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역시 본 가가 전혀 뒤지지 않을 것 같은데?”
“……!”
어금니를 꾹 씹던 악후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미소를 지었다.
“남궁 소협께서는 한 가지 사실을 왜곡하셨소.”
“왜곡이라면?”
“과거에는 확실히 재력이 떨어져도 무공 수준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터. 하나 지금은 그 반대요. 재력을 인정한다고 해도 무공 수준은 글쎄…… 앞서 남궁 가주께서 소협에게 대리를 맡기지 않았소? 세대교체가 된다면 무공 수준을 다시 평가해야 하지 않겠소?”
“나, 무연회 우승자인데요?”
악후가 피식 웃는다.
“그리 따지면 나도 무연회 우승자 출신이오.”
“그래요?”
“그렇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의외네요.”
빠직.
악후가 이마에 핏대가 서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소협의 무공이 녹록지 않다는 건 이미 동생에게 들어서 알고 있소.”
“에이, 무슨 말씀을. 그쪽 동생이 너무 약한 거죠.”
빠직.
“뭐…… 좋소. 아무튼 무연회는 무한의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보다 뛰어난 자를 가리는 것일 뿐. 강호는 그보다 훨씬 넓소.”
강호 넓은 거야 누구보다 잘 알지.
남궁천이 내심 생각하면서 가만히 경청했다.
“고만고만한 또래 사이에서 우승을 했다고 강호를 우습게 보면 곤란하오.”
“우습게 안 봅니다. 그리고 나 이번에 광서성에서 좀 대단했었는데. 아직 그 소식은 못 들었나 봐요.”
악후가 눈살을 파르르 떨었다.
‘이 녀석 뭐지?’
보통 저런 얘기를 제 입으로 떠드나?
어이가 없다 보니 피식 웃음마저 나온다.
“그렇소?”
“그랬죠.”
저 뻔뻔함이란.
정말이지 기가 찬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후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악현을 돌아보았다.
악현이 그 뜻을 짐작하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악후가 다시 남궁천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면 남궁가가 정말 칠대세가의 자질을 갖췄는지 내가 한 번 알아봐도 되겠소?”
“악 형께서 어떻게?”
“무공의 자질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겠소? 직접 겨뤄보는 것이지.”
대화가 뜻밖으로 흐르자 세가주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남궁천을 지켜보았다.
이미 조강민과 당우기, 그리고 모용강마저 꺾은 남궁천이었지만, 악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악후는 그의 말대로 무연회 우승자 출신이었고, 섬전절창(閃電節槍)이라는 별호로 명성을 떨치는 중이었다.
강호 경험이 풍부한 악후와 남궁천이 무공을 겨룬다면 그 결과는 뻔하지 않겠나?
남궁천이 제아무리 타고난 무골이라도 악후마저 이기진 못하리라.
악후가 말을 덧붙였다.
“물론 강요는 아니오. 나는 원치 않는 비무를 강요할 만큼 무례하진 않소. 다만 남궁 소협이 칠대세가에 낄 자격을 증명하고 싶다면 그런 방법이 있다는 말이외다.”
묘한 도발이다.
이래서야 비무를 하지 않으면 지레 겁을 먹고 꼬리를 만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또한 자연스레 칠대세가에 머리를 숙이는 모양새가 된다.
세가주들의 표정이 묘하게 비틀린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이 있다면 꼬리를 말겠지. 섬전절창을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
‘악현 가주보다 무골 기질이 뛰어나다는 섬전절창이 아닌가? 남궁천의 콧대를 제대로 눌러주는구나.’
사실 한 배분 아래나 다름없는 남궁천을 상대로 가주들이 직접 나서는 것은 모양새가 썩 좋지 않다.
하나 섬전절창 악후라면 똑같은 소가주 입장인 데다 배분도 큰 차이가 없으니 거리낄 것이 없지 않은가?
모용환은 냉랭한 웃음을 띤 채 남궁천의 반응을 살폈고, 당고륜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남궁천이 입을 열었다.
“괜찮겠어요?”
“음? 뭐가 말이오?”
“여기서 저를 상대하셔도.”
“물론이오. 내가 먼저 제안을 한 것이니.”
“하지만 악 형은 창을 쓰잖아요. 이렇게 좁은 곳에서 창은 결코 유리한 무기가 아닐 텐데요.”
허, 지금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건가?
악후가 잠깐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맹랑한 녀석을 봤나?
악후가 입매를 뒤틀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내 창은 좀 특별하니까.”
“오, 그래요? 여의봉처럼 막 길어지고 짧아지고 그러나요?”
이놈 진짜 뭐지?
악후가 헛기침을 하고는 대꾸했다.
“뭐, 비슷하오. 나는 삼절창(三節槍)을 사용하오.”
삼절창은 마디가 세 개로 나뉘어 있어서 세 단계로 접을 수 있는 창을 말한다.
남궁천이 활짝 웃는다.
“잘됐네요. 그럼 결과에 대해서는 무조건 승복하겠네요.”
“당연한 것을.”
“뭐, 굳이 칠대세가에 들어가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고. 악 형께서 궁금해하시니까.”
“좋소. 그럼 가볍게 흥을 돋워보시겠소?”
악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옆의 너른 공간으로 걸어갔다.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씨익 웃었다.
“좋습니다. 그 도전 받아들이죠.”
‘아니, 도전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하는 거라니까.’
악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더 따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패자는 말이 없어지고, 승자의 미소만 남게 될 일.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나 하지 말아라. 울어도 봐주지 않으마.’
악후가 순간 허리춤에서 삼절창을 뽑아 들더니 현란한 동작으로 기수식을 취했다.
휙, 휙휙! 차악!
그 일련의 과정이 마치 춤사위를 보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남궁천이 팔짱을 끼고는 중얼거렸다.
“호오, 이 집안은 형이나 동생이나 하는 짓이 비슷하네.”
“뭐요? 짓……?”
“아, 뭐 별건 아니고요. 그냥 겉멋이 가득한 것 같아서요.”
“겉멋이라니…….”
악후의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까부터 시종 무례한 것을 참고 넘어갔건만 끝까지…….
“그럼 시작하죠.”
스르르릉.
남궁천이 벽라검을 뽑아 들었다.
한데 기수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저 검을 척 늘어뜨리고는 가만히 악후를 보기만 한다.
“안 할 거요?”
“하는 건데요?”
“하는 거라고?”
“예, 덤벼요.”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악후의 이마에 다시 한번 핏대가 솟았다.
‘이놈이 정녕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웬만해서는 선공을 양보하려고 했건만, 이제는 정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으리라.
“좋소, 그럼 가겠소!”
타앗!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악후의 신형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쒸이이익!
창끝이 복부를 향해 거침없이 파고드는데도 남궁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악후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흥, 완전히 얼어붙은 모양이군.’
거만함이 하늘을 찌르기에 조금은 기대도 했건만, 맥이 빠지는 기분이다.
마침 남궁천이 입을 연다.
“잠깐만요.”
응? 잠깐만이라니?
기가 막힌 소리.
비무 중에 잠깐만요?
그래, 어지간하면 멈췄을지도 모른다.
하나 지금까지 남궁천의 행동을 보면 용납이 안 된다.
‘비무가 끝난 다음에 말하도록!’
악후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그대로 남궁천의 복부를 향해 내질렀다.
찰나,
팍!
“……!”
악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잡, 잡혀……?’
어느새 뻗어 나온 남궁천의 손이 창대를 꽉 움켜쥐고 있는 게 아닌가?
남궁천이 툴툴거리듯 말한다.
“거참, 성격 급하시긴. 잠깐만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