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태풍에 맞설 용기
한 시진 전.
황학루 최상층에 오른 남궁천과 남궁검은 멀찍이 흐르는 양자강을 보면서 감탄을 흘렸다.
“아름답군요.”
“그렇구나.”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흐르는 강물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때론 백 마디 말보다 침묵이 많은 걸 전할 때도 있는 법.
지금 남궁검과 남궁천이 그랬다.
두 사람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 오롯이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 멀리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남궁세가는 앞으로 묵직하게 흘러가리라.
모진 풍파를 지나왔으니 이제는 다시 흐를 일만 남았을 터.
그리고 그 흐름은 어느새 남궁천의 손에 달린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남궁천의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궁검이 다시 시선을 돌려 강물을 보았다.
하긴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날 때도 됐다.
세가의 미래는 이제 젊은 사람에게 맡겨야 하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이번 회합은 남궁검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리라.
남궁세가의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는. 더불어 남궁천이 휘몰아치는 태풍에 어찌 맞서는지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테고.
‘비겁해질 용기라.’
남궁검은 며칠 전부터 자신이 내뱉은 그 말에 대해 곱씹길 반복했다.
어쩌면 그 말 자체가 비겁한 변명은 아니었을지.
만약 자신의 처세가 틀렸다면?
세상과 당당히 맞서겠다고 한 남궁천이 옳은 것일까? 무모한 객기가 아니었던 것일까?
‘어찌 됐든 오늘 어느 정도 알게 될 테지.’
남궁검이 침음을 흘리고는 기다란 탁자에 앉았다.
약속한 시간으로부터 일각이 흐르고 있었지만 칠대세가의 주인들 중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따금씩 점소이가 올라와서 상황을 살피고는 머쓱한 표정으로 내려가곤 했다.
“많이 늦네요. 이 사람들.”
“그렇구나.”
남궁검이 예의 그 얼음장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하나 그는 내심 알고 있었다.
이 또한 칠대세가가 남궁세가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행위이리라.
얼핏 질 나쁜 장난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런 것들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법이다.
따지고 들기에는 속 좁은 인간으로 보이고, 그냥 넘기기에는 한심한 사람이 되는.
다시 점소이가 올라왔을 때, 남궁검은 차를 주문하고는 묵묵히 기다렸다.
그렇게 다시 일각이 더 흘렀다.
이제는 식사를 한 번 하고도 마칠 시간이 지난 셈.
남궁검의 표정은 처음과 변화가 없었다. 하나 그의 눈빛만큼은 더욱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칠대세가회인데 이렇게 치졸한 방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어이가 없다 보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마침 계단에서 기척이 느껴지기에 시선을 돌렸더니, 다름 아닌 손우곤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됐어?”
남궁천의 질문에 손우곤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칠대세가 중 아무도 황학루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
“이것들이 선을 넘네.”
“정말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닙니까?”
손우곤이 남궁검의 눈치를 보고는 역정을 이어갔다.
“이건 칠대세가회에 정식으로 항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을 초청해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이랍니까?”
“최상층 대실은 언제까지지?”
남궁천의 질문에 손우곤이 씨근거리며 대꾸했다.
“오늘 종일로 예약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칠대세가회를 하긴 한다는 뜻인가?”
“아마 하겠지요. 맹주도 참석하는 걸로 알려졌으니까요. 그런데 일부러 시간을 틀리게 알려준 것 같습니다.”
“그럼 대실료는 이미 지불된 상태고?”
“예. 술과 음식값도 넉넉하게 선납되었다는 걸 보니 회담이 열리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래서야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할지…….”
손우곤이 말끝을 흐리자, 남궁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일어나자.”
순간 남궁천과 손우곤이 시선을 돌렸다.
남궁검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만약 칠대세가의 목적이 남궁검을 화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만큼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실 겁니까?”
남궁천의 물음에 남궁검이 그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그래. 평소라면 그랬을 테지.”
“하면…….”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예?”
“평소 나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을 터다.”
남궁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 성격이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끝까지 남아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조차 구질구질하다고 여길 테니까.
하지만 그게 자신의 방식은 아니다.
‘내가 뒤끝은 없지만, 기분 나쁜 건 즉석에서 풀어야 하거든.’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저는 가지 않을 겁니다.”
“하면?”
남궁검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오히려 차분하게 되물었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꾸했다.
“판을 깔아주었으니 실컷 놀아줘야죠.”
“깔린 판에서 논다라. 그것이 태풍에 맞서는 너의 방식이더냐?”
남궁검이 가만히 중얼거리자, 남궁천이 고개를 젓는다.
“아뇨. 태풍이 불기 전에 제가 태풍이 되어야죠.”
남궁검의 눈빛에 이채가 서린다.
“스스로 태풍이 된다?”
“예. 뭐든 선빵이 유리하잖아요?”
“선빵…….”
“하지만 지금은 가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남궁천이 깍듯하게 대꾸하자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손우곤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데 남궁검에게서 뜻밖의 반응이 흘러나왔다.
“아니, 오늘은 네 방식대로 해보아라.”
“예?”
“가주님?”
남궁천과 손우곤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는 남궁검을 보았다.
남궁천의 표정은 이게 ‘웬 떡이야?’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고, 손우곤은 ‘정신 차리십쇼!’ 하고 외치는 것만 같다.
남궁검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남궁천을 응시했다.
“네가 변하고 나서 본 가는 격동하는 중이다. 네가 정식 소가주가 된 이상, 본 가의 미래는 네 손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내 너에게 모든 의사결정을 맡기도록 하마.”
남궁천의 입매가 길쭉하게 찢어진다.
호오, 이 영감 보소. 모처럼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시는데?
반면 곁에 있던 손우곤은 간절한 심정으로 고개를 황급히 내둘렀다.
‘아닙니다, 가주님! 그건 정말 아닙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하지만 남궁검은 바위가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남궁천의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남궁천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죠?”
“그렇다.”
“제 방식대로 헤쳐 나가면 되는 겁니까?”
“그렇다.”
“나중에 뒷말하시거나 후회하지 않으시는 거죠?”
“후회는…… 모르겠으나, 뒷말은 하지 않으마.”
어째 조금씩 불안해진 남궁검이 살짝 흔들렸으나, 곧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오늘은 그저 태풍의 눈이 되겠다는 손자 녀석을 지켜만 보리라. 어차피 언제까지 품 안의 자식일 수도 없는 법 아니겠나?
무엇보다 태풍에 맞설…… 아니, 태풍이 될 용기를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남궁천이 어깨를 활짝 펴고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 방식대로 한 번 태풍의 눈이 되어보겠습니다!”
그리하여…….
* * *
“한 번 잡숴보시라니까요. 맛이 기가 막힙니다.”
조검명은 코앞에 불쑥 내밀어진 닭다리를 보고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반쯤 뜯어 먹다 만 닭다리가 눈앞에서 기름을 뚝뚝 흘린다.
“이…… 이……!”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말도 나오지 않는다.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칠대세가회가 치러질 자리에서 술판을 벌여? 거기에 뜯어 먹다 만 닭다리를 자신에게 들이밀다니? 새것도 아니고!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너무 황망하다 보니 생각조차 이상하게 흐른다.
보다 못한 모용환이 앞으로 나서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말 할 것 없다. 자리를 비우도록 해라.”
“어…… 그건 좀 곤란한데요.”
“뭐라?”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지 않습니까? 지금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은 상황인데 갑자기 쫓아낼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그러자 조검명이 다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여긴 원래 칠대세가회 장소였다니까!”
“그러게 좀 일찍 오시지.”
남궁천이 시선을 외면하고는 혼잣말처럼 구시렁거린다.
조검명이 이젠 입에 거품을 물 기세로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저, 저……!”
갑자기 혈압이 오르니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다. 뭐 이런 말도 안 통하는 녀석이 다 있나?
다만 당고륜만이 이 상황을 나름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세간에서 남궁천, 남궁천 하더니 가히 범인은 아니로군.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그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는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전령이 실수를 한 모양일세. 우리 쪽 잘못도 있으니 마냥 자네 탓을 할 수는 없을 것 같군.”
“이제야 말이 좀 통하시네요.”
“그래도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긴 한데.”
“뭡니까?”
“이 술과 음식은 칠대세가회에서 지불한 돈으로 먹는 것일 테지? 본 회가 하루치 대여료를 냈으니 말일세.”
“음. 그렇죠.”
“하면 자네는 칠대세가회가 열릴 거라는 걸 짐작은 했을 텐데, 그 돈을 함부로 사용한 셈이 아닌가?”
당고륜이 조목조목 따지자 조검명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하나 남궁천이라는 인간에게 이런 논리가 통할 리 없었다.
남궁천이 특유의 빈정거리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전 다르게 생각해서요.”
“다르게라면?”
“아, 역시 돈 많은 집안은 이렇게 돈을 펑펑 쓰는구나. 할지 안 할지도 모를 회담을 일단 잡아놓고 돈부터 지르고 보는구나.”
“하하. 취소할지도 모를 회담을 잡진 않네.”
“그래서 저도 혹시 몰라 대비를 해두긴 했습니다.”
“대비라니?”
“저기, 자리를 좀 비워뒀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기서 회담을 진행하시는 게 어떨까요?”
모두의 시선이 남궁천이 가리킨 방향으로 돌아갔다.
최상층 한쪽 구석에 마련된 둥근 탁자.
하지만 여덟 명 정도가 앉으면 꽉 찰 듯했다.
즉 후기지수들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
“좀 좁은 것 같은데.”
“설마 한 시진이나 늦으실 줄은 생각지 못해서요.”
남궁천이 끝까지 능글맞게 웃자 참다못한 조검명이 다시 성큼 나섰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건 엄연히 공금 횡령이나 다름없는 짓이야!”
“돈이 문제면 드리죠.”
“뭐? 네놈이 돈이 어디 있다고? 땅을 파도 먹고 죽을 돈이 없을 남궁가가!”
감정이 거칠어지자 말도 거침없이 튀어나온다.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가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이거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순간 가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건……?”
“금왕의 명패가 아닌가!”
“어째서 저걸 남궁천이 가진 거야?”
이쯤 되자 당고륜이 껄껄 웃으며 나섰다.
“자자, 그리 감정적으로 해결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마침 빈자리도 있으니 앉도록 하세나. 우리 잘못도 있으니 음식값은 우리가 내도록 하겠네.”
의외로 당고륜이 화통하게 말하자, 남궁천이 가만히 그를 보았다.
‘부자지간에 어지간히 다르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겪어본 당우기는 구제불능이 아니던가?
그에 비하면 그 아비는 나름 말이 통한다.
하긴, 전생에 만났던 당호진도 비교적 화통한 성격이었던 게 기억난다. 손을 한 번 섞은 후로 뒤끝 없이 헤어졌으니까.
그러고 보니 당호진이 당우기의 할아버지겠군. 아, 현재 적랑단주 당예설도 나름 시원시원하고 괜찮은 성격이었지.
‘그럼…… 저놈만 모지린가?’
당우기를 보며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데, 조검명이 씨근거리며 끼어들었다.
“아니 될 말입니다! 당 가주! 감히 세가회를 방해한 이 녀석에게 마땅히 벌을 내려야 할 겁니다!”
그때, 칼바람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감히 누가 본 가의 소가주에게 벌을 내린다는 건가?”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언제 나타난 것인지 남궁검이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198화. 태풍에 맞설 용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 검을 뽑을 듯 으르렁대던 조검명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만큼 남궁검의 기세는 매서웠다.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였지만, 선풍도골의 풍채에서는 가히 마주하기도 힘든 엄중한 기운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남, 남궁 가주…….”
조검명이 신음처럼 목소리를 흘려냈다. 그러면서도 말꼬리는 알아듣기 힘들 만큼 흐려진다.
그도 그럴 것이 똑같은 가주의 신분이지만, 남궁검의 나이는 그들보다 한 배분 더 위라고 봐야 했다.
마땅히 뒤를 이을 인재가 없어서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남궁검 본인이 워낙 정정하고 강인한 통솔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십 년.
강산이 두 번은 변할 시기다.
무림이 철저하게 외면하고, 세상이 완전히 등을 돌렸음에도 그 긴 시간 동안 남궁가가 이나마도 버틴 것은 남궁검이 철기둥처럼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세간의 평도 있었다.
그만큼 남궁검은 어려운 상대.
“남궁검 가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당고륜이 예를 갖춰 다가가자 남궁검이 예의 그 싸늘한 시선을 한 번 던지고는 걸어왔다.
“다들 늦으셨소.”
“아무래도 전령의 실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과드립니다.”
“사람을 한 시진이나 기다리게 하고서 사과 한마디로 넘어간다. 쉽구려.”
남궁검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번에는 조검명에게 향했다.
그 매서운 눈초리에 조검명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는 시선을 외면했다.
남궁검이 칼날처럼 서늘한 눈빛으로 조검명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누구는 엄벌을 내리자고 할 것 같소만.”
“하하. 그건 막상 와보니 워낙 뜻밖의 상황이라 놀라서 던진 말일 겁니다. 그나저나 어디에 계셨습니까?”
당고륜이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얼른 말을 돌렸다.
남궁검이 그제야 당고륜을 돌아보고는 답했다.
“회담이 취소된 줄 알고 아래층에서 가족들과 식사 중이었소.”
“아, 그러셨군요. 하면 이번 일은 우리 실수도 있으니, 가족분들 식사까지 대접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사죄의 의미입니다.”
당고륜이 정중하게 말하자, 남궁검도 더는 따지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가장 큰 탁자를 차지하고 앉은 일부 창응대원들을 보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네들은 아래층에 가서 마저 즐기도록 하게. 빈자리가 있을 것이야.”
“예, 가주님.”
칠대세가주들이 올라와서 득실거려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창응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더니 절도 있게 계단을 내려갔다.
단순한 과정이지만 그 일련의 행동들에서 충성심과 존경심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물론 그럼에도 다른 탁자에 앉은 창응대원들은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따로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제자리를 고수할 생각인 듯했다.
게다가 비켜준 자리는 한차례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빈 접시와 먹다 남은 요리들로 너저분했다.
남궁검이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가서 무심한 손길로 자리를 가리켰다.
“다들 앉으시오.”
어쩌다 보니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상황.
남궁검이 슬쩍 남궁천을 돌아본다.
마치 눈빛으로 ‘이게 너의 방식이지?’ 하고 물어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남궁천이 입매를 틀어 올리고는 탁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앉았다.
이리 되자 다른 세가주들과 후기지수들도 엉겁결에 자리에 앉게 됐다.
조검명으로서는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일부러 틀린 시간을 알려서 망신을 주려던 계획이 완전히 뒤틀어진 셈.
오히려 칠대세가가 한 가문에게 망신을 당하는 상황 같지 않은가?
그가 넌지시 눈치를 살피는데, 마침 모용환이 희미하게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궁 가주.”
“오랜만이오. 모용 가주.”
“한데 가족들과 식사 중이셨다고요.”
“그렇소.”
“하면 이왕 이리 올라오신 것, 가족분들도 여기로 부르시지요.”
“그럴 수야 없지 않겠소? 엄연히 칠대세가회라면 가주와 소가주만이 참석하여…….”
“아닙니다. 이번에는 당 가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쪽 실수가 있었으니 예외로 두겠습니다. 가족분들에게 직접 대접하고 싶군요. 그렇지 않소? 조 가주.”
모용환이 호의를 베푸는 자 같지 않게 날카로운 시선을 조검명에게 던졌다.
그 시선이 마치 질책을 담은 것 같기도 하고, 대답을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조검명은 대번 모용환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모용환은 결코 당고륜 같은 부류의 인사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자신과 결이 닮은 자였다.
즉, 지금의 제안이 순수한 호의는 아닐 터. 조검명이 포권지례하며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남궁 가주님, 그리하시지요. 이번엔 어디까지나 전령을 보낸 제 실수입니다. 이왕 이리 된 것 가족분들도 함께 뵙지요.”
그러자 남궁검이 침음을 흘리다가 옆에 앉은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어찌 생각하느냐?”
“……!”
다른 가주들은 물론 후기지수들도 움찔거리고는 남궁검을 보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소가주의 의견을 묻다니?
독선적이라는 말도 들릴 정도로 고집스럽고 대쪽같다는 그가 이런 자리에서 소가주의 의견을 구한다는 건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남궁검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 오늘 이 자리에서는 나보다 여기 소가주가 주로 발언하게 될 거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내가 이제는 서서히 일선에서 물러날 때도 되었으니. 여러분도 배분 차이가 나는 나보다야 그편이 편할 테고.”
그 말에 모인 사람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가문의 일인 데다 지금까지 칠대세가회에서 종종 그런 경우가 있었기에 누구 하나 나서서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문제는 소가주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점이었다.
보통의 경우 소가주가 전면에 나서게 될 때는 이미 중년으로 접어들거나 청년의 티를 벗어날 때쯤이었다.
한데 이제 겨우 약관에 들어설 아이를 전면에 내세우겠다니.
상황이 이렇게 되니 졸지에 칠대세가주들의 위엄이 남궁천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는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래서야 마치 남궁검이 상석에 앉아서 태상군주처럼 위엄을 차리고, 남궁천이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서서 대화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그 짧은 사이에 분위기를 역전시키다니. 과연 남궁세가로구나.’
당고륜이 눈을 가늘게 여미고는 생각에 잠겼다.
반면 다른 가주들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그러는 사이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왕 오셨으니 여기 계신 분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렇군.”
남궁검이 묵묵히 받아들이자, 남궁천이 손우곤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에 손우곤이 얼른 내려가 남궁표와 남궁효, 남궁화를 데리고 올라왔다.
“여러 세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궁표를 비롯한 가족들이 인사를 하자, 세가주들이 어딘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례했다.
“어서들 오십시오.”
그렇게 남궁세가 사람들이 섞여서 앉으니, 마치 칠대세가가 남궁세가의 초청을 받은 모양새가 됐다.
거기에 남궁천이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자자, 차린 건 부족하지만 드시지요.”
“…….”
세가주들이 눈살을 잔뜩 구기고는 탁자를 훑어보았다. 여기저기 먹다 남은 음식들이 접시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조검명이 욱하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는 불쑥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어찌 이리 푸대접하는가? 먹다 남은 음식을…….”
“아, 푸대접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이게 푸대접이 아니고 무엇인가!”
“음. 칠대세가회는 사람을 푸대접하시는구나.”
“무슨 말이냐? 지금 자네가 우리를 푸대접하지 않는가!”
“응? 이거 제가 사는 거였어요? 그새 또 말이 바뀐 겁니까? 이 자리는 칠대세가회 아니었습니까? 여러분이 본 가를 초청한 자리잖아요?”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이다.
조검명이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으로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갑자기 뒤틀어진 상황에 머릿속이 꼬여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조검명이 당황해서 더듬거리는데, 모용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어서 탁자를 깨끗하게 비우고 새 음식을 내오지 않고 뭐 하느냐?”
그제야 계단을 따라 점소이들이 우르르 올라왔다.
“죄송합니다요.”
“금방 새로 내어드리겠습니다요!”
점소이들이 허둥지둥 탁자를 치우는 동안 모용환이 서늘한 웃음을 지으며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늦었지만 무연회 우승을 축하하네. 자네의 명성이 날로 높아지더군.”
“감사합니다.”
“이제 남궁세가도 기지개를 켜는 모양일세.”
그러자 듣고만 있던 조검명이 입매를 비틀며 이죽거렸다.
“해가 중천이 되어서야 기지개를 켜게 된 게 안타까울 따름이죠.”
그 말에 다른 세가주들이 툴툴 웃음을 흘린다.
한마디로 일어서야 할 시기를 놓쳤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리라.
모욕적인 언사가 분명했지만 남궁검은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남궁천을 가만히 보았다.
‘뭐가 되었든 네 방식대로 해보아라. 오늘은 지켜보기만 하마.’
반면 남궁표는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조검명을 보며 답했다.
“출발이 늦어도 토끼가 거북이를 이기는 법 아니겠소?”
“그 말은 우리가 거북이라는 뜻입니까?”
조검명이 사뭇 날카로운 어조로 묻자, 남궁표가 손을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만큼 본 가가 부지런하게 재기할 거란 말이외다.”
그는 최대한 세가들과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아무리 튼튼한 가문이라도 외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서는 존립하기가 어렵다는 걸 오랜 세월 겪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황산을 떠나 무한에 자리를 잡은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무림맹과 연을 쌓고 이왕이면 세가가 재기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반면 남궁천은 그런 남궁표를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사람 보는 눈이 저리 없어서야.’
자고로 곁에 둘 사람이 있고, 멀리 걷어차야 할 사람이 있는 법. 여기 세가들 중 몇 명이나 곁에 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조검명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썩 편하지 않은 대화가 한동안 이어졌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황보승이 개념 없는 발언을 하면서 더욱 위태로워졌다.
“그런데 저는 어려서 잘 모릅니다만, 남궁세가는 한때 그 위용이 하늘을 찌르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어려워진 겁니까?”
“그러게요.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던데. 고작 이십 년 만에 이렇게까지 폭삭 망할 줄이야.”
당우기가 이죽거리며 말을 받았다.
당고륜이 아들에게 엄한 눈짓을 주긴 했지만 그 입을 막진 않았다.
그로서는 이런 말에 남궁세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조검명은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
“하하.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알 수 없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 자네들도 항상 조심해야 하네. 잘나갈 때는 끝 모르고 솟구칠 것 같지만, 한순간에 훅 가는 수가 있으니.”
“반면교사로 삼아서 늘 주의해야겠습니다.”
악후까지 가세한다.
이에 모용환이 피식 웃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남궁가의 소가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나?”
“뭘요?”
“들었다시피 세상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기니까 물어본 걸세.”
“그러니까 고작 이십 년 만에 왜 이렇게 됐냐고요?”
모용환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반면 남궁표와 남궁효, 남궁화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 분을 숨기지 못했다.
동시에 어디로 튈지 모를 남궁천이 사고라도 칠까 봐 좌불안석이기도 했다.
한데 남궁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뜻밖의 말을 꺼내는 게 아닌가?
“그래서 저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정치가 엉망이고 외교를 못하면 한 나라도 십 년이 지나지 않아 망할 수 있는 법이지요. 뒷짐 지고 떵떵거리며 살던 백성들도 식민 지배를 당하며 개돼지처럼 사는 게 한순간이란 말입니다. 몽골인에게 당한 기억을 벌써 잊은 건 아닐 테지요?”
“흐음.”
“모용 가주께선 망해보셨어요?”
“…….”
“세상이 등을 돌린 그 악랄함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 망해본 적도 없으면서 상상만으로 주둥이를 터는 사람들이 많죠. 이십 년. 강산이 두 번은 변할 시기예요.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는 법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그냥 뒈지는 거예요. 높이 올라갈수록 무섭게 떨어지는 거죠. 그럼에도 이만큼 버틴 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렇게 칠대세가에 초청도 받고. 정신 나간 새끼들이 아니고서야 칠대세가와 함께 있는 본 가를 우습게 여기진 않겠죠?”
“…….”
“모든 상회가 거래를 끊어 버리고 일절 협조하지 않으면 어느 가문도 일 년을 버티지 못할걸요? 망하는 거? 그거 한순간이에요. 물론 내 실수로 망한 거면 삼대는 갈지도 모릅니다. 한데 세상이 등을 돌리면? 회유할 주변인이 없다면? 모래사막에 꽃을 피우는 것만큼이나 힘들 겁니다. 여기 세상과 맞서 싸운 자가 있습니까?”
“…….”
모두 침묵하며 남궁천만 바라본다.
남궁천이 벌떡 일어나더니 남궁검을 향해 돌아서며 포권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자리에서 가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모진 풍파를 맞고서도 끝까지 버텨주셔서. 다 내려놓고 싶을 시기에도 최선을 다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건 진심이다.
딸이 매도당해 병을 얻고 죽었을 때 아비의 마음은 얼마나 너덜너덜 걸레 조각이 되었을까?
남궁검의 얼음장 같은 눈빛에 묘한 이채가 서린다.
좌중의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딘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숨소리조차 죽인다. 창응대원들 역시 먹먹한 표정으로 식사에만 집중한다.
그런데…….
‘왜 그쪽이 울고 난리여?’
남궁표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남궁천을 보고 있지 않나?
그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생각했다.
‘남궁천……! 넌 본 가의 희망이 될 녀석이었구나…… 한때나마 널 배척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흑!’